부처님의 가르침

연기법-12지의 이해

우암(雨庵) 2015. 2. 21. 11:49

▶무명(avijjā)이란 나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내 몸 중심으로 생각해서 ‘나’라는 존재(오취온)를 중심에 놓고 파악한다.
무명의 조건이 번뇌이고 번뇌의 조건이 무명이라고 알려 주심. (M9 올바른 견해의 경 §67, 71).
번뇌란 탐진치에 물든 마음이다. 현생의 내게 이롭게 하려다 보니 탐진에 물들고 탐진에 물들다 보니 내가 더 강화된다 (탐진치가 더 강화된다)는 말씀일 것이다.

 

▶행(行 saṅkhāra)이란 무명 때문에 착각한 ‘나라는 존재’를 중심에 놓고 (나, 나의 것, 나의 자아)
몸과 말과 마음으로 일으킨 변화.
각묵스님께서는 행을 의도적 행위로 번역하셨는데 그렇다면 행위 중 의도적인 행위가 아닌 것은 고를 유발시키지 않는다는 말인가? 행위 자체가 고를 유발시키는 것은 아닐까?
행위의 의도성과 무관하게,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판단하면 괴로움이 온다는 것이 세존께서 알려주신 가르침이 아닐까?
각묵스님께서 의도적인 행위로 번역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지 않을까?
만약 이 ‘의도적’이란 서술어를 제외시켜 버린다면 ‘무명이 사라지면 행위가 없어진다’고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의도적인 행위는 이해가 가지만 비의도적인 행위가 사라진다는 말이 이해가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이란 말로 행을 제한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의도적인 행위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이 해석은 일부 타당성은 있으나 전체적 맥락을 담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식 (알음알이 識 viññāṇa)란 이미 우리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쌓여있고 그를 기반으로 현재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것.
식에는 아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있다.
이 식들은 오래된 업이고 가치 판단의 결과이며 의도의 결과이며 느껴졌던 것입니다.(S35:146 업 경)

 

▶명색 (名色 nāmarūpa)이란
외부에 분별할(나누어 다름을 알) 수 있는 세상이 있으며(색, 물질)
내부에는 이를 구분할 기능이 있다는 것(명, 정신).
물질(색色 rūpa)은 사대(지수화풍)와 파생된 현상들,
정신(명 名 nāma)은 느낌(受), 인식(想), 의도, 접촉, 주의 기울임

(vedana sanna cetana phasso manasikaro (S12:2 §12))

 

물질(색)은 감각기관으로 인식되는 것(色)이고,
정신(명)은 개념으로 인식되는 것(수상식)이다.

 

물질은 그 특징으로 구분되며 이를 색신(rūpakāye)이라 하고,
정신(명)은 인식된 대상들의 특징을 통해서 대상을 구분하며, 이를 명신(nāmakāya)이라 한다. (D15 대인연경 §21).

 

물질은 형태적, 정신은 개념적 특성이다.

 

식 (알음알이 viññāṇa)과 정신·물질(명색)은 상호 의존적이라고 설명해 주신다. (S12:65 도시 경)
즉 식 때문에 명색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는 과거 경험에 따른 식의 쌓임이 있으며
그 쌓임의 바탕 위에서 현재 경계(명색)와 만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식과 명색이 상호 의존적이란 말씀(명색의 조건은 의식이고 의식의 조건은 명색이다.)은
인간에게는 식이 있고 경계에는 명색이 ‘동시에’ 있음을 설명해주시는 것 같다.

 

▶육입(육입 salāyatana)이란 경계에 대한 가치 중립적 감각작용.
‘외부의 자극이 감각기관으로 들어와서 그 자극이 전기적인 신호로 바뀌어 뇌에 전달된다.

 

여섯 감각장소(육입)란 육근 육경이라고 일반 사람들이 지칭하는 현상의 문제점
즉 감각작용과 인식작용이 혼합된 개념을 벗어나시고자
세존께서 감각작용만을 지칭하려고 사용하신 용어라고 판단된다.

 

육근의 눈으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S35:146 업 경

눈은 오래된 업이고 가치 판단의 결과이며 의도의 결과이며 느껴졌던 것입니다.
(Cakkhu, bhikkhave, purāṇakamm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vedaniyaṃ daṭṭhabbaṃ)

 

즉 눈이라는 것은 이미 업을 통해서 갖고 있는 것이며 (색 있는 안경, 식온 purāṇakammaṃ)
따라서 업으로(습으로) 세상을 바라다 본다는 말씀.
그래서 눈은 전생을 포함한 과거 경험에 조건지워진 것이며 형성된 것이고(abhisaṅkhataṃ)
우리의 의도도 작용을 했고(abhisañcetayitaṃ) 느껴졌던 것(vedaniyaṃ)이라 보아야 한다라는 말씀 아닐까?

 

육경 또한 이미 우리가 경험한 가치판단이 작용한 것이기에
육경인 색성향미촉법 대신 육외입처란 말씀을 해 주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렇게 육근 육경과 육입처를 구분하신 이유는
연기법이란 우리가 어떻게 생각에 묶여 윤회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세밀하게 그 과정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육근 육경이란 말을 사용하자면
이미 육입-촉-수-애 까지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육입이란 가치 중립적인 감각작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이러한 제 이해를 뒷받침해주는 경전 내용이 S35:232 꼿티따 경이라고 생각됩니다.

 

S35:232 꼿티따 경

8. 세존께서는 눈이 있고 형색을 보십니다. 그러나 세존께는 욕탐이 없습니다.

 

이 경에서는 세존께서 눈(육근)이 있고 형색(육경)이 있다고 사리뿟따가 꼿티따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는 앞서 제가 제시한 이해와는 달라보이지만
그 내용상으로 보면 눈과 형색에서 욕탐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경 제가 말씀드린
감각작용과 인식작용이 분리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경의 근거로 생각합니다.

 

▶촉(觸 phassa)이란 내입처-외입처-의식(알음알이)의 만남.
그래서 어떤 대상에 주목(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manasikāra)
외부 대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경향성의 작용(想 saññā 습)하고 유리 불리의 판단(saṅkappa)이 발생합니다.

 

뇌에서는 육입에서 감각된 자극을 분류하고 구분하게 됩니다.
그 중에 (‘생각 이전’에 패턴으로 인식하여) 우리의 주목을 받게 되는 자극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으로 번역하는 saññā가 아닐까요?
이런 현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잠재의식, 아뢰야식, 습기, 개성 등이 될 것입니다.
식 viññāṇa에 쌓여 있는 과거 경험의 경향성이란 지금 이 순간의 판단이 아니라
이미 패턴화 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판단’(게슈탈트?)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경우를 살펴 보면 순식간에 화가 올라옵니다.
이때 우리는 많은 분석을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이미 패턴화 되어있는 유리 불리의 기제가 작동한 것은 아닐까요?
그 대상에 대해서 ‘나라는 존재’를 기반으로 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saṅkappo: 감각적 즐거움, 적의, 폭력).

 

따라서 촉이 일어날 때 우리는 사념처를 발동시켜서
과거의 습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체란
내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감각하고
이미 내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갖고 있는 가치판단 기준을 작동시키며
또한 이번 경험을 통해서 이해된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S35:27 철저하게 앎 경
일체란 눈-형색-안식-안식으로 이해되어진 법
(cakkhu- rūpa- cakkhuviññāṇa- 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즉 안식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습에 의한 경향성이고 (색안경)
안식으로 이해되어진 법(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이란
그런 색안경을 쓰고 의식으로 (알음알이로) 판단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애착이 작동하지 않아야 그대로 알고 본다고 알려주십니다.


M149 광대한 여섯 감역에 대한 경 (Mahāsaḷāyatanikasutta)

 

§10. 시각-형상-시각의식-시각접촉-느낌에 애착하지(sārajjati) 않아야
      그대로 알고 본다(jānaṃ passaṃ yathābhūtaṃ)

 

jāna ,(adj.) [to jñā, see jānāti] knowing or knowable, understandable
passa [cp. Sk. paśya, fr. passati] seeing, one who sees


육근의 수호(cakkhundriyasaṃvara)란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억제한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육근이란 이미과거 경험으로 이루어진 판단 기준을 포함하는 것 감다.
그래서 육근 수호란 우리 각자에게 존재하는 각 감각기관의 습, 경향성을 억제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즉 육근수호란 감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이 작동할 때, 무의식적인 경향성이 작동하지 않게 깨어있으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경향성, 생각이 다 ‘의식적인 판단 작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세존께서는 육근을 수호하라고 하셨겠는가?
모든 것이 두뇌의 작용이라면 ‘의근’만 수호하면 되는 것은 아닐까?

 

육근 수호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의근을 포함하는 안이비설신의 모두에 경향성이 존재해서
우리가 의근을 작동시키기 전에
이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경향성(색안경)이 자동으로 작동함을 말씀해 주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수호해야 하는 것은 이 색안경이 불쑥 불쑥 작용하는 것을 억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이러한 의식이 작동하기 전에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다 보는 것인 아닐까?

 

참고로 육근수호를 저는 육근 억제라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saṃvara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의 문제이다.
saṃvara : [m.] restraint, 防護, 律儀, 摂護, 抑制 수호 보다는 억제이다.
 

M28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

§27 안으로 시각능력이 완전하고, 밖에서 형상이 시각영역으로 들어오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M27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작은 경

§20 그는 시각으로 형상을 보지만 그 인상에 집착(nimittaggāhī)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anubyañjanaggāhī)하지 않습니다.
     만약 시각 능력을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과 근심 그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자신을 침범할 것이므로
     그는 절제의 길을 따르고 시각능력(육근)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합니다.

 

이 경에서 인상(nimitta 相)이란 감각대상에 대한 생각의 일어남 (vitakka 심尋),
연상(anubyanjana)이란 그 일어난 생각에 대해서 의근(의식)이 작용하여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vicāra 사伺)이라고도 볼 수 있다.

 

anubyañjana: [anu+vi+añja+yu] a secondary attribute, sign으로 가려는 경향성
byañjana : [nt.] a syllable; a consonant; a sign or mark; curry
vyañjana : [nt.] a distinctive mark; a consonant; a letter

 

그래서 육근 수호라는 말을 쓰신 것이다.
들어온 대상을 뇌에서 판단 내려서 작동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면 (연상을 멈추게 하려면)
육근이 아니라 의근 수호를 하면 된다.
육근 수호라고 하신 이유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에 이미 내재해 있는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식의 경향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느낌(수 受 vedanā)은 감각접촉에 대한 즐거움,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
주목을 받은 대상의 상태와 내가 기대한 상태를 비교하여 느낌이 나타남.

 

▶갈애(愛 taṇhā)란 느낌에 대해서 열의와 열기(열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chando, Pariḷāho)

 

▶취착(取 upādāna)이란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집착, 식의 머묾, pariyesanā)
감각적 즐거움, 견해, 계율과 의식, 자아가 있다는 취착 (유신견, 계금취)

 

▶존재(有 bhava)란 형색(색성향미촉법)의 획득이다. (유, lābha, 외적으로 개념화된 대상이 생겨남.)

3계의 존재란
대상에 대해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 (욕계)
대상을 보는 자 (색계)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을 보는 자 (무색계)


▶탄생(生 jāti)이란 ‘개념화된 대상’에 ‘나’라는 존재가 결합된 것.
나라는 개념: 내 것, 나, 나의 자아 (나의 기억); 오취온

이는 생물학적 태어남 혹은 육처의 태어남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오취온이 나라면 오취온은 경험을 계속 하는 한 지속적으로 태어난다. 육체적 탄생의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S35:33 태어남의 법 경(Jātidhamma-sutta)

3. 일체는 태어난 법이다. (일체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노와 법이다. S35:23)

눈-형색-안식-촉-수에 대해서 태어난 법(Jātidhamma)이라고 설명해 주신다. (귀코혀몸마노에 대해서 반복됨)


더욱이 노, 병, 사, 슬픔, 오염, 멸진, 사라짐, 일어남, 소멸 등에 대해서 동일하게 반복해 주신다. (S35:34~42)

즉 우리가 일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것을 의근을 통해서 판단한 것인 것,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경험이라고 하므로,
그리고 우리라는 존재는 그 경험의 집합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태어남이 되는 것이다.

 

▶노사(老死 jarā maraṇa)란 탄생한 나의 시간에 따른 변화이다.
괴로움의 다발 발생 (수비고우뇌)
 

pariḷāha :m. [<pari-ḍah] 열뇌 熱惱, 苦惱, 焦熱

lābha : [m.] gain; acquisition 득도 得到,얻어서 도달함 ; l? , (梵l?)?【字根I.】拿(to take)

bhava : 존재, 되어짐 'becoming', 'process of existence', 욕계(k?ma), 색계(r?pa), 무색계(ar?pa) 존재.

 

S14:9 감각접촉의 경

5 형색의 요소(Rūpadhātuṃ)에 반연하여 형색의 인식(rūpasaññā)이 일어나고
형색의 인식을 반연하여 형색의 사유(rūpasaṅkappo)가 일어나고
형색의 사유를 반연하여 형색의 감각접촉(rūpasamphasso)이 일어나고
형색의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형색의 느낌(rūpasamphassajā vedanā)이 일어나고
형색의 느낌에 반연하여 형색의 열의(rūpacchando)가 일어나고
형색의 열의에 반연하여 형색의 열기(rūpapariḷāho)가 일어나고
형색의 열기에 반연하여 형색의 추구(rūpapariyesanā)가 일어난다.
형색의 추구에 반연하여 형색의 획득(rūpalābha)이 일어난다.

 

S14:1~5 요소 경
안의 요소: 안이비설신의
눈의 요소-형색의 요소-안식의 요소 - 촉- 수
이비설신의 로 반복

밖의 요소: 색성향미촉법
형상-인식(想 saññā) - 사유 (saṅkappo) - 열의(chando) - 열기(pariḷāho) - 추구(pariyesanā) - 획득(lābha)

성향미촉법 으로 반복.

 

S12:65 도시 경

 

3 참으로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구나.
태어나서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난다.


kicchā vatāyaṃ loko āpanno jāyati ca jīyati ca mīyati ca cavati ca upapajjati ca.

 

kiccha : [adj.] difficult; painful. (nt.), distress; difficulty
vata: [ind.] surely; certainly; indeed
āpanno :Entered upon, fallen into; unfortunate
jīyati : [ji + ya] becomes diminished; loses; becomes old
mīyati : [mar + ya; mar is changed to miy and mī] dies
cavati :To disappear, to vanish, to die, to leave one world to be reborn in another

 

4 노사-생…- 명색
명색의 조건은 의식이고 의식의 조건은 명색이다.

 

5 이 의식은 명색에 다시 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괴로움

 

이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대부분은 무명-행-식인데…
깨달음을 얻으시면 식-명색 까지만 간다는 말씀이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