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 -삼세양중인과의 문제점
삼세양중인과란 12지를 삼세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고
이를 인과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이다.
12지 |
시간 |
인(因)과 과(果) |
무명 |
과거 |
因 |
행 | ||
식 |
현재 |
果 |
명색 | ||
육입 | ||
촉 | ||
수 | ||
애 |
因 | |
취 | ||
유 | ||
생 |
미래 |
果 |
노사 |
삼세양중인과는 붓다고사가 청정도론에서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붓다고사는 연기(의존적 발생)법을 과거생, 현재생 및 미래생이라는 3생에 걸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과거생의 무지와 의도행위가 현재생을 일으키고,
현재생에서는 과거생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경험한다.
이 과정이 조건이 되어서 현재생의 오염원(갈애와 집착)을 일으키고,
이번에는, 이 오염원이 이끌어서 미래생의 탄생과 괴로움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2연기의 해석은 두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존재론과 연기를 인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I. 존재론
삼세양중인과라는 해석은 과연 누가 윤회하는가라는 문제를 내포합니다.
마치 과거에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동일한 '존재'로 바라 보는 것이 아니냐는
그래서 세존께서 알려주신 무아의 개념과 상충되는 해석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중생이란 입장에서는 연기법을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분명히 아나타(anatta 無我)로 설해주셨습니다.
고정된 나라고 부를 실체가 없다고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부인하신 건 아니죠.
단지 그것을 바라보기를 계속 변화하는 그런 흐름으로 보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 과거 흐름에 궤적은 있습니다. 그것이 전생입니다.
(앞글 상견 단견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존께서는 숙명통을 설명해 주시면서
중생의 존재로서의 당신 모습을 과거 당신의 경험을 갖고 있는 존재로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존의 설명이 이렇다면 붓다고사의 삼세양중인과 설명도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을까요?
붓다고사의 입장은 중생입니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있고 실재합니다.
십이연기란 바로 우리가, 중생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바라보는 시점이 진리의 측면이라면 (중생의 측면이 아니라면)
이러한 견해는 문제를 내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anatta와 상충하는 듯 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본질은 본디 없는 것인데
삼세양중인과는 과거-현재-미래로 연결되는 '나'를 가정하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세양중인과를 잘못 받아들이면
내 존재란 '이 세상을 경험하는 자이다' 즉 오취온이다라고 설해주는 것으로 오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아(atta)에 취착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고
그래서 오취온을 멸진시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종지를 잊어버리고 "‘선한 내 자아’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II. 연기법과 인과법
삼세양중인과로 십이연기를 바라 보는 문제점중 더 큰 문제는
연기법과 인과법의 혼용이 아닐까 합니다.
삼세양중인과에서는 연기법을 인과법처럼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연기법이란 괴로움이 발생하는 과정입니다.
연기법(paṭiccasamuppāda)이란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서 형성된(paccaya)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과법이란 사건이 발생하는 과정입니다.
연기법을 인과법으로 보는 것은 사건을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업으로 쌓여 결국 나의 지금 상태, 괴로움을 유발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 대한 의문점은 과연 괴로움이란 어떤 사건에서 유발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괴로움은 사건에서 유발 될 수는 있지만 사건과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즉 누가봐도 괴로울 것 같은 사건이 발생해도 전혀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혹은 전혀 괴롭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무척 괴로울 수 있습니다.
연기법이란 사건의 발생 과정이 아니라 이런 괴로움의 발생 과정을 밝힌 것이아닐까요?
인과법이란 씨앗이 있기에 열매가 맺힌다라고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 그에게 선행을 하니 그 댓가로 그도 내게 선행을 한다.
그가 내게 악행을 하니 나도 그에게 악행을 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다 보는 인과법일 것입니다.
연기법이란 그런 사건이 발생할 때
우리에게 어떻게 괴로움이 발생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제 의견은 아래 글 찰라연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주 괴로움이 어떤 사건 때문에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해서, 사회가 정의롭지 않아서…)
그러나 사건의 발생과 괴로움의 발생은 겹쳐지는 부분도 있지만
괴로움이란 심리적인 현상이고 사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세존께서는 괴로움의 원인은 사건이 아니라
심리적 취착, 갈애 때문이고, …무명 (홀연히 잘못된 마음을 일으킴) 때문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삼세양중인과는 괴로움(느낌)의 문제를 지금 이순간의 느낌의 문제로 보지 않고
외부의 사건 위주로 보고 있습니다.
사건 위주로 본다면
사건의 주체가 있게 되고 우리는 지금 그 주체를 위해서 몸 바쳐 행동해야 합니다.
만약 사건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면 어떻게 과거 일을 소멸해서 현재의 괴로움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괴로움이란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의 문제이며 (‘나’라는) 한 마음 바꾸면(방하착)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경전을 보면 세존께서는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을 업으로만보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담즙, 점액, 바람, 체질, 계절의변화, 불운한 사건, 우연한 피습, 업보의 성숙 이렇게 여덟 가지 요인으로 생겨난다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개하셨다는 점입니다.
일이 발생하는 원인이 아니라 느낌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느끼는 주체에 따라서 느낌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상윳다 니까야 36 느낌 상윳다
S36:21 시와까 경
3.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여기에 대해서 고따마 존자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4.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담즙 때문에 생긴 것이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도 사실로 인정되어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는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5.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점액 때문에 생긴 것이니,...
6.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바람 때문에 생긴 것이니,...
7.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그 세가지가 겹쳐져 생긴 것이니,...
8.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계절의 변화 때문에 생긴 것이니,...
9.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예기치 못한 충격 때문에 생긴 것이니,...
10.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상해 때문에 생긴 것이니,...
11.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업의 익음 때문에 생긴 것이니,...
13. 담즙, 점액, 바람, 겹침, 계절, 충격, 상해, 그리고 업이숙이 여덟 번째이다.
(담즙과 점액과 바람과 체질과 계절의 변화와 불운과 우연한 피습이 있고 여덟 번째로 업보의 성숙이 있네.-전재성 박사 번역)
또한 세존께선 괴로움을 업 때문으로 설명하시지 않았습니다.
S12:24 외도 경
3.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고 남도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지도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사문 고따마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설하며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설명하면 사문 고따마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게 되며
사문 고따마를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사문 고따마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하는 것이 됩니까?
어떤 동료 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4. 도반이여, 괴로움이란 연기된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반연하여 [괴로움이] 있습니까?
감각접촉을 반연합니다.
이렇게 설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게 되며,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하는 것이며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됩니다.
앙굴리마라가 99명의 사람을 죽였는데
그리고 연기법이 인과법이라면
어떻게 그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을까요?
III. 기타사항
식을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으로 본다면 명색의 이해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긴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마치 식이 물질과 정신현상을 창조한다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한 생에 있고 그 결과가 다른 생에 있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득이 되도록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M101 데바다하의 경에서 세존께서 니간타들에게 한 질문)
명색이 사라진다는 것은 명색을 구분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고 이해합니다.
명색이란 외부 경계에서 보여지는 사물 형태의 다름과 그것에 붙여진 개념(언어)입니다.
그 구분 작용이 멈추어진다는 것입니다.
명색이 사라지면 식이 사라진 것이고
식이 사라지면 명색이 사라진 것이다.
여기서 사라지는 식이란 것은 '중생의 식'을 말합니다.
구름입니다.
나라고 생각하여 쌓여 있는 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달)은 고요히 빛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나라는 식이 사라지면 구분이 없어진다.'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또는 '구분이 없어지면 나라는 식이 사라진다.'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구분한다는 것은 생각이 있다는 것이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욕탐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