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많은 현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1. 이 몸이 '나'라는 것이다.
2-1. 삶이란 이번 한 생 밖에는 없다.
2-2. 혹은 막연히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 무엇이 너무 막연해서 생각을 전개시켜 볼 수도 없고 해서
그저 눈 앞의 현실에만 전념하고 살아간다.
결국 이런 삶이란 이번 한 생 밖에는 없다는 생각과 유사한 삶의 태도를 갖게 한다.
우리는 이런 삶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 모두가 의식으로 기억하는 모든 것은 이번 생에 국한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생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명(無明 avijja)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명 상태라면 내 기억이 존재하는 생은 지금 이 현생 밖에 없어서
현생이 모든 것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그 현생에서 잘 살아야 하므로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고
그래서 탐진치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의 결과(현재의 이 몸)가 마치 모든 것의 전체인 양 착각을 하고 전도몽상의 삶을 살아갑니다.
반면에 무명의 반대인 명(明 vijja)이란
나의 과거 전생을 알고(숙명통) 하늘의 눈(천안)이 있어서 탐진치에서 벗어나는(누진) 것입니다.)
과연 정말로 이번 한 생 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현대 과학이 설명하듯 빅뱅을 통해서 물질이 만들어 지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우연'에 의해서 DNA가 형성되고
'우연'에 의해서 내가 태어났을 뿐이란 말일까요?
모든 것을 우연으로 돌리는 논리는
과학을 전공한 저에게는 '엉터리' 논리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듭니다.
어떻게 아무 원인 없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수학으로 표현되는 물질의 논리들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일까요? (自然)
우리 주변에서 이유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어디에도 우연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 인간이 '무지'해서 그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우연'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 우연이라는 현상을 신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다시한번 강조해 드립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있던가요?
모든 일이 다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마음 먹은 것이 원인이 되어서 새로운 결과를 맺게됩니다.
자동차 사고, 자연 재해, 개인의 성취 등도 모두 나름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無)에서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태어났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는데
나라는 이 존재만 어느날 갑자기 "뿅!"하고 나타났을까요?
그럴리가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화두 중에 위산영우(潙山靈祐)선사께서 향엄지한(香嚴智閑)선사에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에 나의 본래 모습)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잘못 이 질문을 이어나가게 되면 희론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논리를 전개시키면 절대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누가 모든 것을 만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알음알이로 세상의 처음을 상상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상이 타당한 것인지 조차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인 무명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존재의 시작에 대해서는 말씀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침묵(무기)하셨습니다.)
대신 세존께서는 우리가 괴로움에서 풀려나는 방법에 대해서 설해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 존재가 있게 된 것은 너무도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신 조차조 자신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중생인 우리가 그 수많은 생이 겹쳐져서 나타나는 실타래를
원인을 하나씩 다 알아서 풀어낼 수 있을까요?
그 보다는 지금 이순간에서 '착각'을 바로 잡아서 모든 것에서 풀려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는
육도 윤회의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모든 은혜와 원한 등등의 '꿈 같은' 사건들에서
그 각각의 원인과 결과를 풀어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드라마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꿈을 깨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과의 관계 혹은 육도윤회 등이 왜 그렇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가르침,
즉 연기법은
세존을 포함한 과거 부처님들께서 모두 관찰하신 것이지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십니다.
세존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그 드라마의 대본을 쓰고 있다고 알려주신 겁니다. (자업자득)
그렇게 대본을 쓰게되는 이유는 '내가 있다.'라는 생각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그 나에게서 유불리를 따져서 이 모든 것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는 것(아는 자)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는 것은 연기법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는 열반입니다. _()_
A3:61 외도의 주장 경 (Tittha-sutta)
1. “비구들이여, 세 가지 외도의 주장이 있다. 현자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묻고 반복해서 질문하면 그것은 [스승 등의] 계보에는 이르겠지만 결국에는 [업]지음 없음에 도달하고 만다. 어떤 것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2. “비구들이여, 나는 이 가운데서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 존자들이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인가?’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이 생명을 죽이더라도 그것은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헐뜯는 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욕설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잡답을 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탐욕스럽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일 테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다.’라고 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하지 않으려는] 열의와 노력이 없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머물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스스로 정당하게 사문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정당한 논박이다.”
3. “비구들이여, 나는 그 가운데서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 존자들은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인가?’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이 생명을 죽이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헐뜯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욕설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잡담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탐욕스럽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고 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하지 않으려는] 열의와 노력이 없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머물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스스로 정당하게 사문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두 번째 정당한 논박이다.”
4. “비구들이여, 나는 그 가운데서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 존자들은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인가?’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이 생명을 죽이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헐뜯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욕설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잡담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그것은 원이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그것은 원인도 없을 것이고 조건도 없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에도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라고 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하지 않으려는] 열의와 노력이 없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머물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정당하게 사문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세 번째 정당한 논박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외도의 주장이 있다. 현자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묻고 반복해서 질문하면 그것은 [스승들의] 계보에는 이르겠지만 결국에는 [업]지음 없음에 도달하고 만다.”
5. “비구들이여,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 당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 당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 내가 설한 법은 어떤 것인가?
(1)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의 요소[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과 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2)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觸處]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3)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여덟 가지 마음의 지속적인 고찰이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
6.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의 요소[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하여 설했는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요소가 있다.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 허공의 요소[虛空界], 의식의 요소[識界]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의 요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이것을 조건하여 설했다.”
7.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觸處]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하여 설했는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다. 눈의 감각접촉의 장소, 귀의 감각접촉의 장소, 코의 감각접촉의 장소, 혀의 감각접촉의 장소, 몸의 감각접촉의 장소, 마노의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이것을 조건하여 설했다.
8.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여덟 가지 마음의 지속적 고찰이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하여 설했는가?
(1) 눈으로 형상을 볼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2)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3)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냄새를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냄새를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냄새를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4) 혀로 맛을 볼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맛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맛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맛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5)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감촉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감촉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감촉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6) 마노로 법을 알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법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법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법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여덟 가지 마음의 지속적인 고찰이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설했다.
9.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기자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하여 설했는가?
여섯 가지 요소에 의지하여 모태에 들어감이 있다.
듦이 있을 때 정신∙물질[名色]이 있다.
정신∙물질을 조건하여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入]가 있다.
여섯 가지 감각장소를 조건하여 감각접촉[觸]이 있고, 감각접촉을 조건하여 느낌[受]이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느낌을 느끼는 자에게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다.’라고 천명한다.”
10.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11.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인가?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12.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인가?
무명이 남김없이 빛 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이[行]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명색)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1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의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게 논박될 수 없고 오염될 수 없고 비난 받지 않고 책망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