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선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불교와 기독교의 차이

우암(雨庵) 2016. 1. 12. 12:01

선이란 착한 일이고 악이란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바라다 보는 불교와 기독교에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두 종교 모두 선을 권하고 악을 멀리하라고 하지만

선악을 바라다 보는 시각이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선악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에는 자성이 본래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나니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만약 마음이 사라지면 죄도 또한 없어지네


그러면서도 오계가 있어서 신구의 삼업을 맑게 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Pāṇātipāta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ami
② 도둑질 하지 말라(不偸盜)   Adinnādāna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ami
③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淫)   Kāmesu micchācāra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ami

                                           (Abrahmacārīa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ami)
④ 거짓말 하지 말라(不妄語)   Musāvāda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ami
⑤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a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ami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ami(웨라마니 시카빠당 싸마디야미)의 뜻은 '떠나는 것을 수행하여 지니겠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살,도,음,망어,음주 등이 되는 것입니다.


pāṇa : [m.] life; breath; a living being
(pāṇa呼吸+atipāta杀)
atipāta : [m.] slaying; killing
veramaṇī : [f.] abstinence, 離, 離れること
vera : [nt.] enmity; hatred
veraṃ , appeti : revenges
sikkhāpada : [sikkhā+pada] 'steps of training', moral rules, a precept
sikkhā : [f.] study; discipline, 学, 訓練
pada : [nt.] foot; foot-step; a word; position; place; reason
samādiyati : [pass. of samādāti] takes upon oneself, 取得, 承受, 受持
samādāti : [saṃ + ā + dā + a] takes; accepts, 拿,接受
adinnādāna : [adinna+ādāna] : [nt.] theft
Adinna ,(pp.) [a + dinna] that which is not given
dāna : [nt.] gift; charity; alms; alms-giving
musāvāda : [m.] lying
musā : [ind.] falsehood; lie
surā , (f.) intoxicating liquor
meraya : [nt.] fermented liquor, 迷羅耶, 果酒, 花酒
majja : [nt.] an intoxicant
pamāda , (m.) negligence; indolence; remissness; carelessness
ṭhāna , (nt.), place; locality; condition; reason; office; cause; standing up; stay
aṭṭhāna : [nt.] 1. a wrong place or position; 2. an impossibility


위 두 내용을 종합하면 악은 없다고 하면서 악을 짓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구조는 나는 없다고 하면서 나는 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설명입니다.

두 가르침의 차이는

그 설명의 촛점이 나라는 존재에 맞추어져 있는가 아니면 악이라는 행위에 맞추어져 있는가 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불교에서는 열 가지의 악한 행위(십악업)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 가지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열 가지의 선업이라고 합니다.


십악업(十惡業 dasa akusaladhammapada)

몸(신)으로 짓는 행위: 살생(殺生 pānâtipātā), 도둑질(偸盜 adinnâdāna), 사음 (邪淫 kāmesu-micchâcāra)

말(구)로 짓는 행위: 거짓말(妄語 musā vāda), 잡담(綺語 samphappalāpa vācā), 이간질(兩舌 pisuṇa vācā), 욕설(惡口 pharusa vācā)

마음(의)으로 짓는 행위: 탐진치; 간탐(慳貪) abhijjhā, 진애 瞋碍 vyāpāda, 치암 癡暗 micchā diṭṭhi (邪見)


pisuṇa : [nt.] slander; malicious speech 中伤,挑拨离间(backbiting, calumnious, malicious)
pharusa : [adj.] rough; harsh; unkind 粗糙的,苛刻的,无情的
samphappalapa : [m.] talking nonsense, 绮语
sampha : [nt.] frivolity; useless talk 雑穢の
palāpa : [m.] chaff (of corn); prattle; nonsense; voice of essence 無益的辯論





이러한 모순된 것 처럼 보이는 가르침은 연기법을 이해한다면 모두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연기법이란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조건지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법을 믿지 않는 것이 다섯 장애 중에 하나인 회의적 의심(vicikicchā)일 것입니다.)


무명에 휩쌓여 나라는 것이 있는 줄 알고 탐진치를 일으켜서

끝없는 윤회를 반복하면서 어느 때는 선업을 짓고 어느때는 악업을 짓고 .....

이런 것들의 결과가 현재의 내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내가 피해자라 하더라도 이는 전생의 업연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내게 어려운 일이 닦치거든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금강경 제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에 나타납니다.


復次 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부차 수보리 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先世罪業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 이금세인 경천고선세죄업


則爲消滅 當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수보리여!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는 선남자 선여인이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당한다면,

이 사람이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는 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하겠지만,

금생에 다른 사람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고 반드시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생의 일이 전생의 업연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현생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무력하게 '운명'을 따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주어진 일에 대해서 탐욕을 내는 마음과 화를 내는(해코지 하려는)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래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십악업을 행할 때에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온화하지만 무력하지 않은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온화하다는 말은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라는 것'에서 풀려나니 탐진치에서 벗어나고 그래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둘째는 우리 같은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온화함이란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내가 있으니 나를 기준으로 이익과 손해를 따지게 됩니다.

그 결과로 욕심을 내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십선업이란 모든 (과거 생의) 원인을 초월해서 그것을 실천하면 좋은 것입니다.

십선업을 실천하는 사람은 온화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온화한 행동을 무연자비(無緣慈悲)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연기법이 작용하는 세간의 기준에서 본다면 자비를 베풀어 줄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지만

연기법을 보는 지혜(智慧)가 생기고 나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고(悲心)

더 나아가 그 존재 역시 불성(佛性)의 나툼이므로 잘 되기를 바래줄 수 있는 것(慈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無緣善巧捉如意   (업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인연을 벗어난 선한 일을 마음대로 펼치니

歸家隨分得資糧   집으로 돌아갈 때(열반) 필요한 여비와 식량을 얻음이라.


따라서 불교에서의 악(惡)이란 조건지워진 것입니다.

즉 악이란 것이 원래부터 있어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악에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空)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선(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 불변의) 선악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인 한에는 일단 '억지로'라도 마음을 내서 신구의 삼업을 맑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존재의 본래 모습을 보는 수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계를 지켜야 하고, 십선업을 행하여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설명한 것이 팔정도의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입니다.

팔정도의 이 부분은 정견 즉 연기법을 믿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중생에게 연기란 견해가 확립되면 신구의(身口意) 삼업에서 선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른 사유(정사유), 바른 말(정어), 바른 행동,(정업) 바른 생계 수단의 영위(정명)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깨닫지 못한 우리에게는 선악이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수행 앞 부분에 선악의 문제에서 풀려나기 위해 정정진이 위치하게 됩니다.

정정진이란 사정근입니다.


S49:1 동쪽으로 흐름 경

§3. 비구들이여,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sammappadhāna)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아서 성취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 부분이 계정혜(戒․定․慧 sīla samādhi pañña) 삼학에서 계(sīla)에 해당하는 부분이 됩니다.


중생이 깨달음을 향해 수행해 나간다면 정념-정정-지혜-해탈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생긴다는 것은 바로 연기법을 알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처음에 세웠던 정견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반야입니다.

이런 연기법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삼명의 숙명통 및 천안통일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법을 확인하고 나면 비로서 번뇌를 없애는 누진통을 얻게됩니다.

이것은 연기 세계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악은 없다고 하면서 악행을 짓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나라는 존재의 조건이 '신의 창조'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설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특히 선악을 '절대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어떤 존재가 악한 일을 한다면 그 악이란 조건 지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존재가 있던 것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즉 악한 특성이 '원래부터' 있어야 합니다.

불교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악한 자성이 본래부터 있다고 해야 합니다.

아마도 원죄라는 개념이 바로 이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선악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이 존재해서 그게 사람들을 잘 못된 길로 이끌므로

악은 처단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선(神)이 존재해서 그게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끌므로

선은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독교 설명의 문제는 대체 선악을 누가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만약 신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악 조차도 신이 만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악은 신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참으로 모순된 논리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기독교란 연기법 내의 세간 일에 대한 가르침이란 생각이 듭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