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여래(如來)의 의미

우암(雨庵) 2016. 2. 12. 09:38

부처님의 호칭 중에 여래(如來)라는 칭호가 있습니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표현하실 때 '나(aham, mam)'라는 용어 대신에 '여래(tathāgata)'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결론적으로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신 것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아라면 왜 하필 여래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을까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저는 여래란 단어의 한글 번역을  '이와 같이 오신 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란

'전생 모든 존재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결과 지금 여기에 나타나신 모습.'을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여래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여래 [如來, Tathāgata]

여래의 의미는 예로부터 많이 열거되고 있는데 그중 중요한 것에는

1) 과거의 제불()과 '같은' 동일한 길을 걸어 열반의 피안으로 '가는' 사람(tathā+gata),

2) '진리'에 '도달'한 사람(tathā+āgata),

3) 과거의 제불과 '같은' 진리에 '도달'한 사람(tathā+āgata),

4) 과거의 제불과 동일한 길을 걸어 현세에 오는 사람(tathā+āgata),

5) 진리에 복종하여 현세에 오는 사람(tatha+agata)의

5종류인데, 한역()은 4), 5)를 기초로 한 것이다.

여래라는 말은 원래 성도() 후의 불타를 자칭한 것이고, 불제자 사이에서 불타를 칭하는 호칭이었다. 그러나 여래라는 호칭을 불타에 한정하지 않고, 불타가, 서거한 덕망 높은 제자를 가리켜 여래라고 불렀던 경우도 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여래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여래의 의미를 우리는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제 주장만 맞다고 말씀드리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 글 또한 또 하나의 주장이겠지요.^^)


여래의 빨리어는 tathāgata이며

tathā란 이와 같이란 뜻이고() gata 혹은 agata란 오다 혹은 가다 입니다.


tatha :a. [tathā の形容詞形] 真實の, 實の. n. [=tathā] 真如, 如

gata:[pp. of gacchati] gone; moved; walked; passed; arrived at; having come to a condition.行ける,達せる, 関係せる; 様子, 姿

āgata : [(pp. of āgacchati), nt.] coming


제가 여래의 의미를 찾으면서 핵심적으로 관심을 가진 부분은

왜 '나' 대신에 '여래'를 사용했는가 입니다.

한 동안 저는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신 줄 알았었습니다. 무식하게도...^^

그런데 빨리어 경전을 보니 aham이란 단어를 사용하신 경우도 있더군요.

그렇다면 언제 나(aham)를 사용하시고 언제 여래(tathāgata)를 사용하셨을까요?


'나'란 현생(現生)의 이 몸을 근거로 말하실 경우에 사용을 하시고

'여래'란 전생의 모든 인연이 포함된 '진리'의 존재로서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것이라는 이해가 오늘 제게 생겼습니다.

세존께서는 주의를 기울이시면 언제나 그 어떤 '사건'의 조건들을 다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런 주의 기울임이 있어서 모든 조건과 과보를 관통하시는 입장에서 말씀하실 때가 '여래'란 말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아니냐는 제 주장입니다.


이런 경계를 법성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一中一切多中一   한 생 안에 모든 생이 있고 많은 생이 하나로 나타나니 (나에겐 수많은 전생이 있고)

一卽一切多卽一   한 생이 곧 모든 생이요 여러 생이 곧 한 생이라.

  (나라는 것은 모든 전생의 결과요 여러 전생의 결과로 내가 있다네)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중생) 안에 모든 세상(전생의 세계)이 들어있고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중생들 역시 그러하다.

 

無量遠劫卽一念   하나가 된 마음으로 (심일경성에서 숙명통으로) 내 과거(무량겁)를 보니

一念卽是無量劫   한 마음을 일으켜 윤회의 세계(무량겁)가 생겼구나.

 

九世十世互相卽   시간을 뛰어 넘어 세상의 이치를 살피니 (숙명통도 보고 천안통도 보니)

仍不雜亂隔別成   (현생과 전생은) 나누어져 별도로 이루어지니 섞여서 혼란치 않다.  (인과란 명백하다.)


저도 오늘 아침에 이 개념이 떠올랐기 때문에 분명한 주장을 하려면 더많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생각이 난 김에 잊지 않으려는 의도입니다.

(요즘은 적어 놓지 않으면 종종 잊곤 해서...)





이런 제 이해가 있고 보니 금강경 사구게의 의미가 명확해지더군요.


금강경 사구게 金剛經 四句偈


제5 여리실견분 (如理實見分)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


윤회라는 관점에서 눈 앞의 형상을 바라다 본다면

전생에 스쳐 지나간 수 많은 사건과 인연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앞에 펼쳐진 상(相)을 (내가 감각적인 욕망을 일으키고 성내는) 상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면

이와같이 오신 님 즉 과거 전생의 일대사인연을 포함하는 조건과 과보를 볼 수 있다는 의미라고 제게는 읽힙니다.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잘못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이 사구게의 의미는 현생의 눈과 귀로 현생의 나만을 바라다 본다면

이와같이 오신 님 즉 과거 전생의 일대사인연을 포함하는 조건과 과보를 볼 수 없다는 의미라고 제게는 읽힙니다.

그래서 여래를 보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구게와 같이 살라고 알려주십니다.


제10 장엄정토분 (莊嚴淨土分)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라,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이 사구게는 내 앞에 감각되는 현생만으로 세상일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왜냐하면 눈 앞의 일이란 진실로 조건지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 조건에 따라서 온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낸다면 중도에 머물러서

(다시 말해 나다 남이다의 이익의 문제를 벗어나서)

집착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제32 응화비진분 (應化非眞分)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의 세상 일이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집착없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을 내는 모든 일이란 것이 (모든 세상 일)

무상하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지니고 있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다가

세상의 모든 일이란 원인과 결과의 연기법에 지배 받을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생 및 내생이란 문제가 상상이 아니라 진짜로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과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귀결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원인 없는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란 그 현상을 살펴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만나서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나라고 하는 정신 혹은 혼 혹은 영혼 혹은 불교식으로는 식(識 viññāṇa)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일까요?

어느 날 갑자기 이유없이 생겨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중생이 사는 세상에는 조건없이 존재하는 그런 것은 없으니까요!


어떤 분들은 물질에서 정신작용이 나왔다고 합니다.

뇌가 바로 정신 작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뇌에 이상이 있을 때 혹은 호르몬에 이상이 있을 때 우리의 인식 작용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정신 작용이란 물질 작용의 일부일 수 있다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뇌가 정신 작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 다섯 개의 감각기관으로 감각한 세상을 처리하는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몸이 있는 인간 축생등은 입력된 정보의 처리는 뇌가 하고 좋다 싫다의 알음알이도 뇌가 하지만

그 정보의 저장은 식(識 viññāṇa)에 된다는 것이죠.

만약 신체에 이상이 있다면 들어오는 정보가 왜곡되거나 좋고 싫음이 왜곡될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그 식에는 우리가 쌓아 놓았고 계속 쌓이는 정보들이 있는데

그게 과거 생의 호 불호에 대한 경향성에 영향을 받아서

현재 각 개인 성격의 개성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외부의 대상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반응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조건으로 현재의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뇌가 정신 작용을 만들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만약 뇌의 작용이 정신을 만들어 낸다면 뇌가 작동을 멈추면 정신 작용도 멈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예들이 아주 드물지만 존재합니다.


우리는 사후 세계를 경험했다는 경우를 봅니다. 임사체험이라고도 하지요.

그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의학적으로는 죽었다고 판단되었지만

그 사람들은 그 죽었다는 시간 동안 자기 몸 밖에서 자신 및 주변 일들을 관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본 것이 사실로 입증된 경우도 있구요.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몸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이 눈, 귀, 코, 혀, 몸의 작용이 멈춘 상태에서도 세상을 감각하고

또한 감각한 내용에 대해서 판단까지 내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요?


이런 사례가 있다면 우리 몸이 나라는 생각은 뭔가 잘못된 결론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즉 뇌에서 나의 모든 정신 작용이 나온다는 것은 잘못된 결론이란 것입니다.


여래를 설명하다가 너무 이야기가 번졌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