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계금취 (戒禁取)

우암(雨庵) 2016. 4. 1. 09:28

오하분결에서 세번째로 나타나는 것이 계금취(戒禁取)입니다.

유신견, (불법에 대한) 의심, 계금취, 감각적 욕망, 악의 이 다섯 가지가 오하분결 즉 낮은 단계의 다섯 가지 결박입니다.

그리고 그 중 세번째 나타나는 것이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 )입니다.


유신견은 현생의 몸에 취착하는 것이고

전생 및 미래생의 나에 취착하는 것이 바로 계금취입니다.


bata :=vata
vata : [ind.] surely; certainly; indeed; alas. (nt.), a religious duty or observance, 宗教义务,禁戒

parāmāsa : [m.] 1. touching, seizing, taking hold of ; 2. handling; 3. a contagion, 'adherence', attachment, 'misapprehension', 取, 取著, 執取, 執


계금취 sīlabbata-parāmāsa : 계(sila; 해야만 하는 것) 혹은 금(bata=vata;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꼭 지켜야 한다는 것(parāmāsa; 취).


계금취에 대한 우암의 이해는 이것은 또 하나의 ‘변치 않는 자아’에 대한 취착이라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려는 이유가 이치상 그러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나’에게 손해가 될 것 같기 때문일까요? 왜 계를 만들어 놓았을까요? 세존께서 계를 만든 이유는 ‘나’에 함몰되어서 살아가는 중생에게 진리의 깨달음(오취온은 ‘나’가 아니다.)을 당장 실현시키기는 어려우니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 지침을 진리의 이치에 맞도록 말씀해 주신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계로서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가르침이십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연기를 이해하고 보니 (불법에 대한 의심을 극복함.) 연기법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야 현생의 괴로움도 풀 수 있고 내생의 괴로움도 피할 수 있다는 당연한 연기적인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 태도의 문제는 연기라는 그물에 그대로 묶이게 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자유로워 지려고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했는데, 그 가르침의 하나인 연기법을 보고나자 유신견 (몸이 나라는 생각)은 극복했지만 연기라는 그물에 단단히 매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의 취지인 대자유인이 되려는 것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다시 ‘나’에 함몰되어서 지켜야 하는 계(sila) 및 하지 말아야 하는 금(vata)에 대해서 나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있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계금취를 경전에서는 ‘번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것’이라 표현하신 것은 아닐까요?


정견~정명의 옳음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십니다. (M117 커다란 마흔의 경)
- 번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것 (윤회, 선업)
-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것


계금취도 취(parāmāsa)입니다. 따라서 중도가 아닙니다. 참고로 오취온에서는 취는 upādāna로 나타납니다.





우암은 현재 커다란 인생 문제에 봉착해 있는데

그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서 불교 공부에 매진을 했습니다.

그래서 몸이 나가 아니라는 점 즉 유신견을 극복할 수 있었고

경전 공부를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도 많이 옅어졌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윤회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바로 계금취에 걸려버렸습니다.


연기를 이해했다고 하면서 윤회를 받아 들이자

우암이 현재 봉착한 문제가 (명지로 알지는 못하지만) 어떤 과거에 원인이 있었다고 보았고

그래서 톱의 비유 경에서 처럼 혹은 금강경에서 처럼

몸이 잘려나가도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리라 하는 '믿음'을 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내포하는 문제점은

왜 우암은 그렇게 생각했는 지를 살펴보면 나타납니다.


이런 우암 생각의 배경에는 '윤회하는 나'라는 확고 부동한 존재가 있게됩니다.

'미래에는 다시는 이런 악연을 만들지 않아야겠다'라는 그래서 미래에는 '잘 살아 보아야겠다!'라는 의지(chanda:欲, 志欲, 意欲)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윤회라는 측면(있다)에서만 본다면 이런 생각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아'라는 측면(없다)에서 본다면 이런 생각에는 '윤회하는 나'라는 명백한 문제를 안고 있게됩니다.


우암은 윤회와 무아의 문제를 분명하게 '문자적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윤회란 '나는 있다!'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에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무아란 그 생각을 벗어난 존재 방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암은 분명히 무아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세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행동의 기반이 되는 견해가 '나라는 존재' 즉 윤회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연기법을 이해했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행동 방식의 문제는 '잘 되어야 하는 나'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동에 자유로움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암이 바라는 제 일에 대한 해결은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고 잘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아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일이 여법하게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결코 쉽지 않고 사바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제가 존경하는 어느 분께서 알려주시더군요.

파사현정(破邪顯正; 잘못을 부수어 바름을 드러낸다.)이 오히려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지 어찌 '나에게 업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적당히 덮고 가려느냐? 하고 물으시더군요. 상대방이 오계를 범할 때,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자비라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우암이 파사현정을 하지 않고 '기다린 이유'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미래의 악연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제 전생이 셀 수 없이 많다면 업 또한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이 바로 고해(苦海)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암이 취한 태도는  현생의 업에 가중치가 너무 많이 가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 수 많았던 '나의' 전생 사건에서 파생된 업을 모두 각각 하나씩 이와 같이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무념의 마음자리로 들어가 무아자리에 머뭄으로써 그 모든 업이(번뇌가) 흔적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를 들어 앙굴리 말라는 99명을 죽인 후에도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만약 99명을 죽인 업을 모두 풀어야만 아라한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가 아라한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정견을 갖고 있다면 업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물론 정견을 갖고 있다는 의미는 정견에 근거한 행동이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등으로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간 우암이 갖고 있던 문제점은 정사유를 우암에게만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는 적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사유(sammāsaṅkappa :正思维)란 감각적인 욕망에서 벗어나고 (nekkhammasaṅkappa), 악의에서 벗어나고 (진에; abyāpādasaṅkappa), 해꼬지에서 벗어나는 (avihiṃsāsaṅkappa)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바로 계금취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우암은 어리석게도 이제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금취란 '연기하는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또 다른 일종의 유신견에 불과합니다.

유신견은 현생의 몸에 집중을 하는 반면 전생 및 미래생의 나에 취착하는 것이 바로 계금취라는 것입니다.


불자(佛者)는 상대방의 잘못을 연민과 자애의 마음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어리석은 모습이 과거의 나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상대방이 '정신차려 주기를' 기다려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인욕)

그런데 상대방이 감각적인 욕망에 빠져서 악의, 해꼬지의 마음을 내고 지옥(niraya)으로 향하는 것이 명확하다면

(그것도 불법(不法)을 동원 해서; 마치 데바닷다가 부처님을 해하려 한 것 같이...)

불자(佛者)가 현명하고 단호하게 행동해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행동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보호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더 큰 업이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해 주는 것입니다.

단 이런 행동을 할 때에는 스스로에게 정사유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상대방이 일으킨 번뇌의 파도에 휩쓸려서 놀아나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kāma) 이렇게 하는 것인가?

악의때문에(byāpāda) 이렇게 하는 것인가?

해꼬지(vihiṃsā) 때문에 이렇게 하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고 상대방의 행동을 평가해 보고

모두가 여법한 방향으로 향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암이 반성할 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너무 '나 자신'에게만 적용한 것입니다.

우암은 이제 비로서 아상(我相; 나라는 생각)을 확인했고 인상(人相; 너라는 생각)도 알았습니다.

우암은 잘못한 상대방에 대해서 그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상대방의 살림살이는 상대방이 책임져야 한다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상(人相) 아닐까요?

그 모든 일이 바로 '하나라해도 틀리는' 불성자리에서 벌어지는 꿈 같은 일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그 모두가 바로 '나의' 일입니다. (이게 중생상(衆生相)인가요???)


우암이 연기법을 이해하자 우암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현생의 일로 또 다른 업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처럼'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직은 우암에게 바람이 선명하지가 않습니다.

내려놓고 맡기는 것이 미숙합니다.

그러나 우암 자신에게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업을 쌓는 일일지라도 깨닫지 못한 우암이 깨달은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