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인생

인식의 주체는 뇌인가?

우암(雨庵) 2016. 5. 9. 12:54

불교를 공부하는 분들 중에는

과거 불교의 스승들이 가르쳐 주신 내용을 현대 과학을 수단 삼아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비판은 유물론적인 시각에서 불교적인 관점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우암은 생각합니다.

이렇게 바라다 보는 이유는 과학이란 모든 현상의 근원이 물질에 있다고 전재하고 세상을 바라다 보는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우암이 바라다 보는 세상이란,

물질적인 세상은 분명히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 조건적으로 = 연기적으로) 작동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그 물질 세계가 펼쳐지는 더 큰 장(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큰 장(場)이란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불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적인 표현의 문제점은, 언어적인 개념의 바탕 자리가 '불성'자리이므로, 언어적 표현은 한계를 갖고 있어서 소위 말하는 불성 자리를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는 그런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언어적으로 (개념을 통해서) 정의하려는 순간 그 자리는 이미 언어의 하부적인 개념이 되어버리므로, 불성이란 것은 개념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고 옛 스승들께서 알려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불성이란 단지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을 언어적으로 알려주시기 위해 할수 없이 채택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 조차도 사실은 사족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있고 없고를 벗어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있다 없다가 펼쳐지는 근원적인 자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어도단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십무기에서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 표현을 보면 모든 논리적인 가능성이 다 부정됩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열반(여래의 사후)이란 모든 개념을 벗어난 자리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 다른 예를 들어 보면 만법귀일에 일귀하처? (萬法歸一 一歸何處; 세상 모든 일이 하나의 마음 작용이라면 그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하나(一)라 해도 틀리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하자니 하나라고 했지 사실은 하나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성이니 여래장이니 하나니 하는 것들을 손가락이라고 했지요. 달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달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물으실 수 있는데 달이란 바로 그런 '있다 혹은 없다'라는 언어적인 개념을 벗어난 상태를 표현한다고 우암은 이해합니다. 인류의 조상들에게 절대는 상대의 개념으로(언어로) 제한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예를 들어보자면

주인공이 가짜 세상에서 벗어나자 진짜 세상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진짜 세상이 불교에서 의미하는 불성이요 열반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가짜가 없어짐(언어적 표현 이전의 자리)이 우암이 표현해 본 열반입니다. 어디에 새로운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가 없는 바로 지금 여기가 열반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얻은 바가 없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새로운 세계가 있다면 이는 얻은 것이 됩니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상태(생각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표현해 보자면 우리의 뇌가 작동을 하기 전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부에서 감각 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신호에 대해서 무심(無心)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능숙하게 가 보신 분들은 이 자리가 그냥 비어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명상을 통해서 적멸의 상태(생각이 가라앉은 상태)에 머물면 머물수록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진귀한 현상' 나타난다고 합니다. 진흙탕 물이 고요해지니 물이 맑아지고 번뇌는 가라앉아 바닥까지 훤히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자신의 전생을 보는 숙명통과 남의 운명을 아는 신의 눈(천안)을 갖게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아잔 브람 스님의 어느 책에선가 숲 속에 들어가 명상을 할 때 고요하게 머물수록 진귀한 동물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을 해 주시는데 아마도 이런 경계를 말씀하심이 아닐까합니다.


만약 인식의 주체를 뇌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우암의 주장은 얼토당토 않는 헛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을 포함한 많은 아라한, 조사들께서

내 현생의 몸(뇌)를 뛰어 넘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뇌가 인식의 끝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부모로 부터 이 몸(뇌)을 받기 이전(父母未生前)에 함장식(含藏識, 아뢰야 식, 父母未生前本來面目)에 이미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뇌란 '물질 세계'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 처리 기관이지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물론자들은 뇌가 '모든' 감각의 최종 그리고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를 보니까 소위 불성자리라는 것을 언어적으로 분명히 드러내서 알려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성일 선생이 그렇고 벽공 선생이란 분이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분들의 동영상은 '명쾌하게' 불성자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조사들의 난해해 보이는 선문답을 그야말로 시원하게 풀어버립니다.


그런데 우암은 이 분들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왠지 불편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 분들은 적멸의 자리(말로 표현될 수 없는 자리)로 가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실재로는 그저 앎의 문제로 모든 것을 해결한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신기루가 없다는 신기루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