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진흙 속의 연꽃

우암(雨庵) 2016. 6. 13. 14:42

譬喩如臭泥中生蓮花  (비유여취니중생연) 비유하자면 냄새나는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但採蓮花勿取臭泥也  (단채연화물취취니야) 오직 연꽃 만을 취하고 냄새나는 진흙은 취하지 말라.


고승전 제 2권 역경(譯經)편, 구마라집((鳩摩羅什 Kumrajva 344-413) 편에 나오는 글이라 합니다.

구마라집 스님께서 '당신의 생을 돌아보며 하신 말씀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꽃의 비유는 빨리 니까야에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만

진흙 속에 연꽃이란 개념은 그 유래가 어디일까 하고 찾다보니

구마라집 스님의 비유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진흙 속의 연꽃이란 개념은 예토(穢土; 더러운 땅)에서 청정한 깨달음이 온다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토를 모르는 자는 더러움를 모르기에 정토(淨土; 깨끗한 땅)를 알 수가 없다고 우암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욕계인 인간 세상이 깨끗하기만 한 천상 보다 깨달음에 더 적합하다는 말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암은 어리석고 어두워서 (愚暗) 그런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모진 풍파를 만나고서야 비로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이제는 이전과는 반대로 사람들의 행동이 '자신의 이익'만을 따라간다는 것을 보면서 커다란 좌절을 제대로 맛 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것이 있기에 연구를 해서 만들었더니

불의의 권력과 불법을 통해서 빼앗어 가더군요.

아름다움을 취하자 아름다움이 스스로 추함으로 변하더군요.

세간의 삶이란 '호랑이 등'을 타고 가는 것이란 것을 제게 알려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려야 할까 봅니다. _()_^^


쓰고 비린내 나는 세간의 삶을 느끼고 나서야 비로서 부처님 가르침이 와 닿더군요.

부정관도 그렇고 제 탐욕도 비로서 보이더군요. 마노(意)의 작용을 알 수 있더군요.

다시 말해 세상 흐름의 더러움을 느껴 보고서야

비로서 그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하며 정토를 찾게 되더란 말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자가 상처를 불구덩이에 넣으면서 '아! 시원하다!'하는 (위안의) 행위 조차 더러움임을 알고 나서야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세간 삶의 습이 남아 있어서

이렇게 육근을 쫗지 않는 행동하는 것이 결국 내게 손해가 아닐까하는 '어리석은 마음'이 가끔 일어납니다만

냉정히 생각해 본다면 그런 습(習) 때문에 결국 윤회의 삶을 살아왔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러움에도 깨끗함에도 걸리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삶입니다.

머무는(걸리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이십니다. (應無所住而生其心)


더러운 예토를 알아야 비로서 연꽃이 필 수 있다는 것!

우리 인생은 세간 기준으로는 비극이겠지만

하루 하루가 좋은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日日是好日)



M75. 마간디야의 경


마간디야여, 예를 들어 한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는데, 상처의 구멍을 손톱으로 할퀴고,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운다고 합시다. (Seyyathāpi, māgaṇḍiya, kuṭṭhī puriso arugatto pakkagatto kimīhi khajjamāno nakhehi vaṇamukhāni vippatacchamāno aṅgārakāsuyā kāyaṃ paritāpeti.)그래서 그를 위해 친구나 동료나 친지나 친척이 외과의사를 초빙해서, 그 외과의사가 그를 치료하게 한다고 합시다. 그는 그를 치료해서 나병에서 해방되면, 병이 없고 안락하게 자유자재로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를 두 명의 힘센 사람이 각각 팔을 붙잡고 숯불구덩이에 끌어넣는다고 합시다. 마간디야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때 그 사람은 이리 저리고 몸을 피하며 뒤틉니까?”
[마간디야] “존자 고따마여, 그렇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참으로 그 불은 닿으면 괴로운 것으로 커다란 열기, 커다란 타는 듯한 고뇌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30. “마간디야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불은 지금만 닿으면 괴롭고 커다란 열기, 커다란 타는 듯한 고뇌를 가져온 것입니까 혹은 이전에도 닿으면 괴로운 것으로 커다란 열기, 커다란 타는 듯한 고뇌를 가져온 것입니까?


“존자 고따마여, 그 불은 지금만 닿아도 괴로운 것으로 커다란 열기, 커다란 타는 듯한 고뇌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닿으면 괴로운 것으로 커다란 열기, 커다란 타는 듯한 고뇌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그 나병환자는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고, 상처의 구멍이 손톱에 할퀴어지고, 모든 감각능력이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불이 실제로 닿으면 괴로울 텐데 즐겁다고 느끼는 거꾸로 된 지각을 갖고 있습니다.


31. “마간디야여, 이와 같이 참으로 과거에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닿으면 괴로운 것으로 커다란 열기, 커다란 타는 듯한 고뇌를 가져온 것이며, 미래에도 닿으면 괴로운 것으로 커다란 열기, 커다란 타는 듯한 고뇌를 가져올 것이고, 현재에도 닿으면 괴로운 것으로 커다란 열기, 커다란 타는 듯한 고뇌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간디야여, 이들 뭇삶들은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모든 감각능력이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이 실제로 닿으면 괴로울 텐데 즐겁다고 느끼는 거꾸로 된 지각을 갖고 있습니다.


32. 마간디야여, 예를 들어 한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는데, 상처의 구멍을 손톱으로 할퀴고,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마간디야여, 그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는데, 손톱으로 상처의 구멍을 할퀴고,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울수록, 점점 그 상처 구멍은(vaamukhāni) 더욱 오염되고 (asucitarāni) 더욱 악취가 나며 (duggandhatarāni) 더욱 썩어 들어가지만 (pūtikatarāni), 상처 구멍의 가려움 때문에 그 쾌감에만 만족하는 것입니다. 마간디야여, 이와 같이 뭇삶들은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할수록, 점점 더 그들 뭇삶들에게 더욱 더 감각적 쾌락의 갈애가 증가하고, 더욱 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게 되지만,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 때문에 그 쾌감에만 만족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