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과 서원(誓願)의 차이- 재가 불자의 마음 가짐
불교 공부를 하다가 보니
바른 공부 방법을 진작 알았더라면 노력도 시간도 절약도 하고 좋았었을걸 하는 마음이 듭니다.
한국에서 재가불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헷갈리는 일입니다.
불교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제 수준에 맞는 옷을 찾기란 쉽지 않더군요.
또한 우암은 이것이 내게 맞는 옷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다른 옷들이 더 좋다는 주장이 난무하더군요.
한마디로 부처님 가르침의 대의 및 그 구조를 다 알기 전에는 무엇이 내게 맞는 옷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분들께 불교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면
아마 그 답은 모두 제 각각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가자(궁극)를 위주로 했지만, 재가자(과정)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개의 불자들은 자신이 직면하고 처한 상황에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심오하다고 하기도 하지만 헷갈린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부처님 재세시에도 불교를 공부한다고 모두가 출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남자 및 여자 재가 불교도들이 존재했습니다.
부처님의 최대 후원자였던 아나타빈디까에게 부처님께서 출가를 권했다는 내용은 우암이 아는 한 경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출가는 하지 않았고 보시를 많이 한 (물론 수행도 하셨겠지요) 아나타빈디까는 사후에 천상의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재가자(청신사, 청신녀; 우바새, 우바이)가 없다면 불교의 승단(sanga)은 존립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재가자 없이는 스님들께서 필요한 4가지 필수 보시물(거처, 의복, 음식, 약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시물을 얻을 수 없다면 더 이상 출가자로 살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믿지만 출가하지 않은 재가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 모임에서 어떤 불교학자 분께서 소욕지족(少慾知足)을 말씀하시더군요.
만약 욕심을 낸다면 그것은 이루어지기 어렵고, 그래서 실패한다면 쓰라린 아픔을 경험할 것이란 말씀을 해 주시더군요.
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작은 목표를 세운다면 언제나 실패가 없고 언제나 행복(happy)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즉 행복이란 작은 것에도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 속에서 '무슨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불자라면 그가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은 욕심이라기 보다는 서원이라는 것입니다.
' 큰 원을 세우고 그 원을 이루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고, 그러나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던가요???
욕심과 서원(誓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암이 이해한 바로는 욕심이란 내가 펄펄 살아 있어서 그 나의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면서 이루려 하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오욕락(財色食名睡 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암이 이해한 서원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나면 정견(正見)에 따라서 열심히 살되 자비희사의 마음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서원이란 팔정도의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의 삶을 '열심히 살라는 것입니다. 그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사유(sammāsaṅkappa): 탐을 여읜 사유(nekkhammasaṅkappa 출리), 진을 여읜 사유. (abyāpādasaṅkappa) , 폭력을여읜 사유(avihiṃsā
saṅkappa)
정어(正語, sammāvācā): 거짓말, 이간질, 욕지거리, 꾸며대는 말(기어, 망어, 악구, 양설) 하지 않는 것.
정업(正業, sammākammanta):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지 않는 것.
정명(正名, sammāājīva):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올바른 생계로 생활을 유지한다.
kammanta [kamma+anta]: [nt.] work; business 業, 作業, 事業, 家業, 職業, 産業, 業務
ajīva : [na+jīva] livelihood; living; subsistence, 活命, 命, 生活,生存
jīva: the life, vital principle, individual soul, 生命, 命, 靈魂
그렇다면 정견이란 무엇일까요?
경전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사성제를 아는 것.
우암이 이해한 정견의 의미는
이번 생에서 주어진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고 그 몸의 즐거움을 위해 사는 삶이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괴로움이고, 괴로움의 발생 원인이니, 그 괴로움은 사라질 수 있는데 그 방법이 바로 팔정도의 삶을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고집멸도)
왜 그럴까요?
우리가 윤회하는 존재라면 '나'라는 존재는 이번 생 이전에 수 십만 번 혹은 무량겁 존재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과의 결과가 지금의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무명 無明; 어두움, 어리석음) 이번 생은 우연이고 이 생이야 말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느라 이기적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 업이 쌓이고 쌓여 또 다른 '불행한' 삶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암은 불교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암이 어렵게 찾아낸 '불교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저 만의' 답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의 해결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일들을 겪고 있는가? (이 뭐꼬?)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일대사인연'이니 '이 뭐꼬'니하는 것들은 우리 전통 불교의 공부 수단이지만
우암은 초기 불교 니까야를 공부하고서야 비로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니까야를 통해서 연기법의 대강을 이해하고서야 비로서 '아~! 그말씀이시구나!'하고 무릎을 칠 수 있었습니다.
우암이 저 만의 답이라 하면서 옛 스승들의 글귀를 가져다 사용하니 아이러니죠? ^^
불교를 공부하신 여러 분들을 뵈었지만 우암 처럼 해석하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에 '저 만의' 라는 표현을 써 봅니다.
우암은 한국 불교를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생의 문제를 푸는 핵심 키워드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더군요.
불교를 초월적인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 보고, 그 초월적인 지혜로 남보다 우월해지려고 수행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더군요.
사실 요즘 20~30대 젊은이들 가운데 과연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풀어 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물질적인 추구가 인생의 목적이며 그래서 내 감각기관의 즐거움이 '행복'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워왔습니다.
그들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느다면
좋은 집, 아름다운 배우자, 맛있는 음식, 건강, ... 등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부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알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탐진치니 무아니 공이니 색성향미촉법이니 하는 불교 교리의 내용들이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게 알기 쉬운 말로 풀이되어 보편적인 상식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선은 왜 하는 것일까요? 수행이란 무엇일까요? 해탈이란 무엇일까요? 부처란 무엇일까요?
물론 이런 것에 대한 답은 다 나와 있지만 친절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연있는' 소수 만이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더욱이 한문경전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면 이해가 더 쉽지 않겠지요.
젊은이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되는 계기는 괴로울 때 일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이 허망하다는 것이 드러날 때 일 것입니다.
행복이라 생각했던 하나하나가 사라질 때, 비로서 그것이 바로 괴로움(불행)임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혜를 찬탄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소욕지족(少慾知足)이란 삶을 살아가는 상대적인 지혜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작더라도 나의 욕망이 있다면 성취가 있고 성취가 있다면 결국 성취의 상실도 있을 뿐입니다.
그 성취의 상실이란 결국 괴로움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결국 그 성취였으니, 그 성취의 작고 크고를 떠나 그것의 상실이란 '그의' 모든 것의 상실이기 때문에 결국은 큰 괴로움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我)가 있는 한에는 괴로움이란 있을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와 괴로움이란 관계 때문에,
그 괴로움을 없애보자고
우암이 멀쩡히 존재하는 '나'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란 것에 대해 부처님께서 살펴보시니 그것은 나의 경험(좁게는 기억; 오온-색수상행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이란 것은 계속 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경험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므로
어디에도 고정되고 불변하는 '나'라는 존재는 실재하지 않게됩니다.
또한 현재의 '나'란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미래를 결정합니다. 미래란 따로 신이 있어서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란 의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윤회의 법칙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것을 만든 신령한 존재가 있지 않은가?'하는 질문을 하실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자가 아니시라면) 모르셔서 그랬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알려 줘 봐야 우리가 그 가르침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은 아닐런지요?
혹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류의 질문은 '중력의 근원은 무엇이냐?'하는 질문과 유사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중력하에서 살고 있고 경험하지만 중력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설사 수학을 통해서 중력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또 다른 질문이 나오게됩니다.
수학이란 무엇이냐는 것이죠!^^
한편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해탈의 경지(無念)에서는 너와 나라는 '개념'이 붙을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이제 그 가르침에 따라서 살면 됩니다.
나 자신의 문제도 풀어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연민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여법한지는 이미 부처님께서 다 알려주셨습니다.
'소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 소유'입니다.
나의 능력을 발휘해서 청부를 쌓고 그 부를 통해서 불국토를 이루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상대사 법성게에서 알려주신 다음 구절입니다.
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착여의 (업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인연을 벗어난 선한 일을 마음대로 펼치니
歸家隨分得資糧 귀가수분득자량 집으로 돌아갈 때(열반) 필요한 여비와 식량을 얻음이라.
만약 당신이 (우암처럼)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을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 같아 보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됩니다.
팔정도에 따라서 내가 처한 상황에 맞게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과정일 따름입니다.
성공에 자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 역시 그저 과정일 따름입니다.
성공 실패에 따른 환희와 두려움은 그저 '나'라는 착각의 산물임을 알면 됩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에 매몰되거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그래서 폭력을 행하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른 길을 가기를 바라면서 우리 스스로 그 길을 인연이 없더라도 새로운 인연을 지어서 열어 가면 됩니다.
S36:31 출세간 경 (Nirāmisa-sutta)
3. “비구들이여,
세간적(sāmisā) 희열이 있고, 출세간적(nirāmisā) 희열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nirāmisā nirāmisatarā) 출세간적 희열이 있다. (pīti)
세간적 행복이 있고, 출세간적 행복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행복이 있다. (sukha)
세간적 평온이 있고, 출세간적 평온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이 있다. (upekkhā)
세간적 해탈이 있고, 출세간적 해탈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이 있다. (vimokkho)”
Atthi, bhikkhave, sāmisā pīti, atthi nirāmisā pīti,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ā pīti;
atthi sāmisaṃ sukhaṃ, atthi nirāmisaṃ sukhaṃ,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aṃ sukhaṃ;
atthi sāmisā upekkhā, atthi nirāmisā upekkhā,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ā upekkhā;
atthi sāmiso vimokkho, atthi nirāmiso vimokkho,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o vimokkho.
nirāmisa : [ni+āmisa] having no meat; free from sensual desires; non-material, 無食物味道的, 無染汚的, 離財的, 非物質的
āmisa : [nt.] food; flesh; bait; gain. (adj.) material, 財, 食, 味, 利益
sāmisa : [adj.] fleshy; carnal; smeared with food, 肉的,肉体的, 有味の, 食味ある, 物質的の, 肉体的の, -dukkha 物質的 肉体的の苦. -sukha 物質的 有染の楽
tara : [adj.] (in cpds.), crossing; passing over, 橫越渡過的(passing over), 度脫的
tarati : [tar + a] crosses or pass over; to be in a hurry, 橫越渡過, 度脫, 越過, 橫渡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간적 희열인가?
비구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희열을 세간적 희열이라 한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적 희열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적 희열이라 한다.”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희열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라 한다.”
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간적 행복인가?
비구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즐거움을 세간적 행복이라 한다.”
8.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행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잇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라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적 행복이라 한다.”
9.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행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육체적 행복(즐거움)과 정신적 행복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행복이라 한다.”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간적 평온인가?
비구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평온을 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11.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적 평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1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평온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1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간적 해탈인가?
물질과 관련된 해탈을 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1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적 해탈인가?
무색(無色)과 관련된 해탈을 출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1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해탈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