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過海弄舟
우암(雨庵)
2016. 12. 21. 16:00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부처님께서 세상을 본 바에 따르자면 '우리 중생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세존께서 가르쳐 준 세상의 흐름이란 연기(paṭiccasamuppāda)입니다.
즉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서 형성된(paccaya)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물질현상이 다 조건지어진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천둥이 왜 치는지, 지진이 왜 일어나는지, 태풍은 왜 일어나는지, 혜성이란 무엇인지.....
하지만 잘 모르는 것도 아직 많습니다.
중력이 무엇인지? 우주는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 생명이란 무엇인지? 나란 존재는 무엇이고 영혼이란 있는 것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다시 말해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어두움(근원을 알지 못함; 무명 無明 avijjā)을 배경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런 어두움을 극복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어두움을 벗어나시고 보니, 다시말해 세상을 훤히 알게 되시니
우리가 현생에서 겪고 있는 일들이란 과거의 인연들로 얼키고 설킨 복잡한 실타래였습니다.
우리는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 관계를 갖고 살기에 그 관계들이 원인이 되는 파도 치는 바다에서
'나'라는 역할을 하는 작은 배를 타고 세상을 헤쳐나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자주 바다(samudda)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바다를 의미하는 samudda의 발음이 samudaya 즉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 ariya-sacca)의 두번째 진리인 '(세상일이) 일어나는 원인; 集, 集起'과 유사합니다. 바다에서는 끊임 없이 파도가 칩니다. 그 파도란 달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영향을 준 인력과 태양에서 지구로 비춰진 에너지가 각 지역 마다 그 차이가 있어서 이것이 재 분배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바람등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가 예측하기 매우 어렵게 흔들리는 물결입니다. 마치 우리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알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한편 뮤다란 도장이란 뜻도 되지만 동시에 머리, 미망이란 muddha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muddā :f. [Sk. mudrā] 印, 印契, 印算, 指算, 暗算, 記号, 符号術
muddha :① a. [muh の pp. =mūḷha, Sk. mugdha] 愚昧の, 迷妄の. ② m. [Sk. mūrdhan] 頭, 頂, 頂上
무명이 머리인 줄 알아야 합니다(avijjā muddā). 믿음과 새김과 삼매와 더불어 의욕과 정진을 갖춘 지혜가 머리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숫타 니빠따. 제5품 피안 가는 길, 1. 서시의 경 51)
Avijjā muddhāti jānāhi, 무명이 우두머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Vijjā muddhādhipātinī; 명이란 머리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Saddhāsatisamādhīhi, 믿음과 새김과 삼매와
Chandaviriyena saṃyutā 의욕과 정진으로 상응해야 합니다.
Vijjā muddhādhipātinī; 명이란 머리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Saddhāsatisamādhīhi, 믿음과 새김과 삼매와
Chandaviriyena saṃyutā 의욕과 정진으로 상응해야 합니다.
pātin :a. [pāta-in] 落下的, 已落下的
pāta , (m.) a fall; a throw 落, 投
saṃyuta : [pp. of saṃyujjati] connected; combined; bound together, 結合の
이런 측면에서 바다(samudda)를 본다면 모든 무명이라고도 할수 있고 모든 미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 인연이 만들어 낸 거친 바다를 건너갈 때, 과연 현생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한 선문답은 중국에는 육조스님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과해농주(過海弄舟)가 더 부처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과해농주(過海弄舟)
만공(滿空)선사와 혜암(惠蓭) 스님, 그리고 진성(眞性) 사미 삼인(三人)이 어느날 배를 타고 안면도(安眠島) 간월암(看月庵)으로 향하는 해상(海上)에서 만공선사께서 묻기를
『진성아! 배가 가느냐, 물이 가느냐?』하시었다.
그 때에 진성이 아무 말이 없자 혜암 스님이
『배도 가지 않고 물도 가지 않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만공 선사께서
『그러면 무엇이 가느냐?』하자
헤암스님은 만공 선사에게 수건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이에 만공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네 살림살이가 언제 그렇게 되었나?』하셨다.
여기에 혜암스님이 답하기를
『이렇게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하시었다.
이 법문은 참 재미있습니다.
우선 세 분의 이름이 그렇습니다.
만공(꽉 찬 비어 있음) 스님께서 안면도(安眠島 편안히 쉴 수 있는 섬, dīpa)의 달(진리)을 비추어 보는 암자 (간월암)로 가면서 (진리를 찾아 편히 쉴 수 있는 섬)
진성(진실한 성품)에게
과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인연의 파도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인가(過海 과거의 인연) 아니면 내가 노를 저어 가는 것이가(弄舟 현재의 나의 노력)를 물으십니다.
진실한 성정이있다고 믿는 이(진성 사미)는 이 질문에 답을 하기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작용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때, 은혜로운 자(혜암)가 대신 답을 해 주십니다. 그 둘이 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움직이는 것일까요?
혜암 스님께서 수건을 드셨습니다. 이 대답은 '그 수건을 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마치 풍번문답(風幡問答)과 같은 대답입니다.
깃발이 흩날린다면 과연 무엇이 흔들린 것입니까? 깃발이 있고 바람이 있어야 흔들림이 있습니다.
과거의 인연이 있고 현재 내 행동이 있기에 깃발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바람이란 과거의 인연이며 깃발이란 현재의 내 모습입니다.
이건 과해농주(過海弄舟)의 파도와 배의 관계와 동일합니다.
이 사건들은 중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에너지의 흐름일 뿐입니다.
중도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유무의 중도)
한 극단 만을 취한다면 있습니다 혹은 없습니다란 말을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 관점이라면 파도가 가는 것이거나 혹은 배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사들의 관점은 그 전체를 바라다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도도 지말이고 배 역시 지말일 뿐입니다. 바람도 지말이고 깃발도 지말입니다.
그 배경의 진실이란 이 현상을 바라다 보는 자 입니다.
이걸 마음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만 마음이란 개념이 사람에 따라서 너무 다르군요...
한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풍번문답을 인식론으로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즉 마음을 단순히 인식의 문제로만 보는 경우입니다.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라고 하면서 마음이 움직였다고 하니
마치 세상을 하나의 매트릭스로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우리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기는 하지요.
그러나 단순히 현생의 인식만을 마음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인식(認識)이라면 세세생생 쌓여오고 연기한 그 識의 문제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 견해를 듣는 분께서 인식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그렇다면 識의 주인은 무엇인가?'란 '있다!'라는 하나의 극단적 개념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일체유심조라는 글귀를 인식론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은
단순히 평면적으로 펼쳐진 감각의 인식에 대한 문제에 대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에는 과거에 했었던 인식은 빠져 있습니다.
일체유심조에서 심이란 과거 인연이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심(마음)'이란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