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사마타와 위파사나는 왜 쌍으로 닦여 진다고 하는가? (止觀雙修)

우암(雨庵) 2017. 1. 22. 21:23

니까야에서 사마타와 위파사나는 항상 쌍으로 나온다고 한다.

사마타란 무엇이고 위파사나란 무엇이길래

항상 쌍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할까?


우암은 이런 의문을 풀어보려고 먼저 빨리어 어원 분석을 통해서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해석해 보았다.

우암이 빨리어 파자를 통해서 풀어본 사마타란
함께(sa) 머물지(tha) 않는다(ma).” 뜻이.
다시 말해 어떤 대상에 대한 식(viññāa; 판단 혹은 기억)에 '마음'이 함께(sa) 머물지(tha) 않는다(ma)는 의미이다.

Samatha : [m.] calm; quietude of heart; settlement of legal questions

Mā : [a prohibitive particle] do not. (m.) the moon.

ṭhā , (sthā)【字根I.】停留(to stay),站著(to stand)


어떻게 마음이 식에 머물게 되는가? ( viññāassa hitiyā)
과정 S12:38 의도 1 (Cetanā-sutta) 나타나 있다.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잠재성향을 가지면 (Yañca ceteti yañca pakappeti yañca anuseti), 그것이 대상에 대한 (판단, 기억)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멈추게 된다 의도하지 않고 그러므로 사유할 이유가 없어지고 잠재성향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마음이 대상에 대한 작용을 멈추게 된다(止)' 것이다.
이것이 우암이 이해한 사마타(samatha)의 의미이다.

이 해석에서 우암이 독창적으로 생각해 본 것은 viññāassa hitiyā라는 빨리어의 해석이다.
우암은 이를 '식에 머문다.'로 번역해 보았다. 즉 assa를 여격(格, 소유격)으로 본 것이다.
여격 조사는  '~에, ~에게'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식을 판단 혹은 기억으로 보았다.
식을 이렇게 본 이유는 식(viññāa)이란 분리되어 있는(vi) 지식(ñāṇa)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식(viññāa)이란 개념화된 지식 혹은 판단을 뜻한다고 보았다.
각묵스님의 이 구절 번역은 '식이 머문다.'이다.
그런데 '식이 머문다.'라고 하려면 양성 단수 주격인 어미가 붙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면 viññāṇo = ( viññāṇa + o ) 字尾: a<>o 陽性%单数,复数%主格,呼格
(빨리어 문법에 거의 문외한인 우암이 너무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 걱정이 됩니다. ^^)



한편 우암이 빨리어 파자를 통해서 풀어본 위파사나란
(마음이 대상과) 함께하지(sa) 않는으로(nā) 향하여(pa) 분리됨(vi)이란 뜻으로 있다.
우리 범인의 마음은 언제나 인식된 대상에 대해서 분리되지 않고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하면서 같이 가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해서 의도를 내고 사유하고 잠재성향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를 ‘(마음이) (판단, 기억) 머문다.’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하지(sa) 않는 (nā)으로 향하여 (pa) 분리되는 (vi) vipassanā 아닐까?
다시 말해 내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객관적으로(중도적으로) 바라다 본다는 것이다.


vipassanā : [f.] insight [fr. vi+passati] , 毘鉢, , 内観

passati : [dis + a; dis is changed to pas.] sees; finds; understands, , (see); 發現找出找到(find); (know, recognise, realise)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정관이 작동하고 대상이 무상하고 고통이며 무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갈애가 있고 애착이 있다면 vipassanā 없다는 말이 된다.

Vipassanā 되지 않는다면 마음이 대상에 대한 (판단, 기억) 머물게 된다는 것이므로 생각이 멈출 () 없게 된다.
따라서 Vipassanā없이는 samatha 없게 된다.
samatha가 되지 않은 마음이란 대상에 대해서 의도하고 사유하고 잠재성향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대상에 대해서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판단하면서 머무는 것이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세상을 중도적(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samatha가 되었다면 이는 이미 Vipassanā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위파사나가 된다면 사마타가 될수 밖에 없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중도적인 관점이 생겼다면 대상에 대한 마음을 멈출 수 있으며)
사마타가 되었다면 위파사나가 되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멈추었다면 그 마음은 대상에 대해 중도적인 관점을 갖고 있을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파사나는 쌍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닐까? (止觀雙修) _()_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전현수 박사님의 강의를 듣고
과연 념처 수행과 위파사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 였다.
우암이 내린 결론은 염처 수행과 위파사나는 완전히 다른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 역할이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S35:245 낑수까 나무 비유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sati는 문지기에 비유하시고, 위파사나 및 사마타는 전령에 비유를 하신다.
즉 위파사나란 대상에 대한 견해를 갖는 수행을 의미하고
사마타란 그 견해로 인해 마음이 멈추는 수행이다.
그런 현상에 대해서 문지기로 인식(지켜 보는 것)을 하는 것이 sati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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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5:245 낑수까 나무 비유 경


8. “비구여, 이와 같이 그들 확신을 가진 참된 사람들은 그들의 아주 청정한 봄[見]에 따라서 설명을 한 것이다.


비구여, 예를 들면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는 깊은 해자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여섯 개의 대문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문지기가 있어, 모르는 자들은 제지하고 아는 자들만 들어가게 한다. 그때 동쪽으로부터 재빠른 전령 두 명이 달려와서 그 문지기에게 ‘여보시오, 지금 이 도시의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말하면 그는 ‘지금 그분은 중앙광장에 앉아 계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 재빠른 전령은 성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때 서쪽으로부터 재빠른 전령 두 명이 달려와서 그 문지기에게 ‘여보시오, 지금 이 도시의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말하면 그는 ‘지금 그분은 중앙광장에 앉아 계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 재빠른 전령은 성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때 북쪽으로부터 재빠른 전령 두 명이 달려와서 그 문지기에게 ‘여보시오, 지금 이 도시의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말하면 그는 ‘지금 그분은 중앙광장에 앉아 계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 재빠른 전령은 성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때 남쪽으로부터 재빠른 전령 두 명이 달려와서 그 문지기에게 ‘여보시오, 지금 이 도시의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말하면 그는 ‘지금 그분은 중앙광장에 앉아 계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 재빠른 전령은 성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되돌아 갈 것이다." 


Seyyathāpi, bhikkhu, rañño paccantima nagara dahuddhāpa dahapākāratoraa chadvāra. Tatrassa dovāriko paṇḍito byatto medhāvī, aññātāna nivāretā, ñātāna pavesetā. Puratthimāya disāya āgantvā sīgha dūtayuga ta dovārika eva vadeyya: ‘kaha, bho purisa, imassa nagarassa nagarassāmīti? So eva vadeyya: ‘eso, bhante, majjhe sighāake nisinno’ti. Atha kho ta sīgha dūtayuga nagarassāmikassa yathābhūta vacana niyyātetvā yathāgatamagga paipajjeyya. Pacchimāya disāya āgantvā sīgha dūtayuga … pe … uttarāya disāya … dakkhiāya disāya āgantvā sīgha dūtayuga ta dovārika eva vadeyya: ‘kaha, bho purisa, imassa nagarassāmīti? So eva vadeyya: ‘eso, bhante, majjhe sighāake nisinno’ti. Atha kho ta sīgha dūtayuga nagaras­sāmikassa yathābhūta vacana niyyātetvā yathāgatamagga paipajjeyya.



9. “비구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여, 도시라는 것은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두고 한 말이니 이 몸은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여, 여섯 개의 대문이란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문지기란 마음 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재빠른 전령 두 명이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성주는 알음알이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중앙광장이란 네 가지 근본물질을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이다.

비구여, 있는 그대로의 말씀이란 열반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들어온 길이란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를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Upamā kho myāya, bhikkhu, katā atthassa viññāpanāya. Ayañcettha attho: ‘nagaran’ti kho, bhikkhu, imasseta cātumahābhū­tikassa kāyassa adhivacana mātāpettikasambhavassa odanakummāsūpacayassa aniccucchādanaparimaddanabhedanaviddhasanadhammassa. ‘Cha dvārāti kho, bhikkhu, channeta ajjhattikāna āyatanāna adhivacana. ‘Dovāriko’ti kho, bhikkhu, satiyā eta adhivacana. ‘Sīgha dūtayugan’ti kho, bhikkhu, samathavipassanāneta adhivacana. ‘Nagarassāmīti kho, bhikkhu, viññāasseta adhivacana. ‘Majjhe sighāako’ti kho, bhikkhu, catunneta mahābhūtāna adhivacana—pathavīdhātuyā, āpodhātuyā, tejodhātuyā, vāyodhātuyā. ‘Yathābhūta vacanan’ti kho, bhikkhu, nibbānasseta adhivacana. ‘Yathāgatamaggo’ti kho, bhikkhu, ariyasseta aṭṭhagikassa maggassa adhivacana, seyyathida—sammādiṭṭhiyā … pe … sammāsamādhissāti.




S12:38 의도 1 (Cetanā-sutta)

 

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잠재성향을 가지면 그것은 의식이 머무는 조건이 된다.  조건이 있을 의식이 확립된다. 의식이 확립되고 증장하면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정신물질) 있게 된다.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이 있게 되면 내생의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고온] 발생한다.”

 

Sāvatthiya viharati. “ Yañca, bhikkhave, ceteti yañca pakappeti yañca anuseti, ārammaameta hoti viññāassa hitiyā. Ārammae sati patiṭṭhā viññāassa hoti. Tasmi patiṭṭhite viññāe virūhe āyati punabbhavābhinibbatti hoti. Āyati punabbhavābhinibbattiyā sati āyati jāti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yan :nūna→ya, what

ceteti; : see cetayati, see cinteti, To think 感知(to perceive)

cetayati : [cita+aya+ti] perceives; thinks

naya : [m.] method; plan; manner; inference; right conclusion, 方法, 理趣, 意趣, 計畫, 定式

cinteti : [cint + e] thinks; reflects; considers

nūna : [ind.] indeed; surely; certainly

pakappeti : [pa + kapp + e] considers; designs; arranges; thinks over

kappeti : [kapp + e] prepares; harnesses; trims; considers; makes; leads (one's life)

anuseti : [anu + si + e] lies dormant [anu-seti, Sk. anuśayate] 随眠, 随増, 潜在. pp. anusayita

seti : [si + a] sleeps, sayati opt

sayati : [si + a] sleeps; lies down, たわる, 横臥

ārammaa:That on which anything rests or dwells, a support, stay, basis, 緣境, 對象

ara:Speedily, presently

hitiyā = (hiti + iyā ) 字尾: i<>iyā 陰性%单数%具格,離格,與格,屬格

hiti: [f.] [hā+e+ti] stability; duration; continuance , 止住,定立.

hā , (sthā)字根I.停留(to stay)站著(to stand)

virūha : [pp. of virūhati] grown; increased

rūhati : [ruh + a] grows; ascends; heals (a wound).

Ruha : [adj.] (in cpds.) growing; rising up; ascending

Ru , 1.= =(cry) 2.= =打破(break)

āyati: [adv.] in the future

nibbatti : 'arising', 'rebirth', is a synonym for paisand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