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거울(古鏡)
우암이 이해하기로는
사마타란 오래된 거울(古鏡)에 비추어진 모습입니다..
먼저 그렇게 보게 된 경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S36:10 감각접촉에 뿌리박음 경(Phassamūlaka-sutta)
7.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두 개의 나무토막을 맞대어 비비고 마찰하면 열이 생기고 불이 붙지만 이러한 두 개의 나무토막을 따로 떼어서 놓아두면 거기서 생긴 열도 꺼지고 가라앉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이들 감각접촉에서 생겼고 감각접촉에 뿌리박고 있으며 감각접촉을 원인으로 하고 감각접촉에 의해 조건 지워진 세 가지 느낌도 꼭 그러하나니, 어느 한 가지 감각접촉에 반연하여 그에 상응하는 느낌이 일어나며, 그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그에 상응하는 느낌은 가라앉는다.”
이 글에서 나타나는 나무토막의 빨리어는 kaṭṭhā입니다.
이를 우암이 파자를 해 본다면 '머문(ṭhā) 것(ka)'입니다.
'내 앞의 현상'이라는 것도 머문 것이요 '그 현상을 관찰하는 자' 역시 머문 것이란 말입니다.
kaṭṭhānam = ( kaṭṭha + ānam ) 字尾: a<>ānam 陽性%复数%與格,屬格
kaṭṭha, (pp. of kasati), plouhged; tilled. (nt.) timber; a piece of wood
그리고 이 두 머문 것을 세워서 수행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두개가 결합되어 있으면(sati가 되지 않으면) 이것이
'맞대어 비비고 마찰하면 열이 생기고 불이 붙는' 형국입니다.
우암식으로 이야기 해 보자면
사마타(止 비추어진 실체)와 위빠사나(觀 비추어진 상에 대한 알음알이)가 구분없이 혼합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실체의 일부를 보고는 잘못된 판단을 내려서
'내게' 잘 되게 해 본다면서 이리 저리 계교를 피우다 보니
마찰하면서 열이 생겨 불이 붙은 형국입니다.
더 나아가 '나라는 것'은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구분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글을 쓴 후에 다시 경전을 보니 두 개란 '당연히' 접촉과 느낌으로 읽힙니다. 이 말은 위에 우암이 해석해 보려한 것이 틀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결론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조금 더 수행해 본 후에 다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따라서 아래 글도 잘 못된 해석일 수 있습니다.
현재로선 그저 참고만 해 주시기 바랍니다. _()_)
sati란 이 둘을 분리시키는 작업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sati도 파자를 해 보면 '함께라는(sa) 것(ti)'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함께'라는 말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sati는 문지기이므로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합니다. (S35:245 낑수까 나무 비유 경)
문지기가 없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서로 엉겨서 나라는 존재가 되어서 불이 붙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 우암이 이해하기로는
사마타란 오래된 거울(古鏡)에 비추어진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비추어보고 있지만 그런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거울 속 비춰진 모습을 나라고 착각하고 판단하고 계교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울 속에 비춰진 모습은 부분일 뿐 전체가 아닙니다.
6조 단경에서 이러한 거울(鏡)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먼저 오조 홍인 대사의 질문입니다.
오조 홍인(五祖 弘忍)대사께서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셨다. 문인들이 다 모이자 말씀하셨다.
'내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세상 사람의 나고 죽는 일이 크거늘 너희들 문인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며 다만 복밭(福田)만을 구할 뿐, 나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들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라. 지혜가 있는 자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써서 각기 게송 한 수를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六代)의 조사가 되게 하리니, 어서빨리 서둘도록 하라.'
신수 상좌의 게송입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時時勸拂拭. 시시권불식)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莫使有塵埃. 막사유진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明鏡亦無臺. 명경역무대)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佛性常淸淨. 불성상청정)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何處有塵埃. 하처유진애)
원각경 보현보살장에도 나무토막 비유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비유하면 불을 피울 때 나무를 서로 비벼 불이 붙어 나무가 타서 없어지면
재는 날아가고 연기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과 같다."
얼핏 보면 이 내용은 초기경전인 상윳다 니까야의 S36:10 감각접촉에 뿌리박음 경과 반대되는 내용처럼 보입니다.
이 경우에는 나무를 서로 비벼 불이 붙어서 나무가 타서 없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암이 이해하기로는 원각경 역시 동일한 수행 방법을 알려 주시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무를 서로 비벼'라는 구절에서
이미 나무가 2개 있다는 가정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원각경에서는 대상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를 환화(幻化) 즉 환상에 비유하셨습니다.
즉 착각한 모습입니다.
이 허물을 멈추면 그것이 사마타입니다. 부동(不動 āneñja)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암의 공부가 부족한지 원각경에서 말씀하신 깨달음(覺)은 아직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우암은 아직 공부중인 학인에 불과하니까요.
우암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사마타(止)의 지속이 혹은 위파사나(觀 알음알이)의 사라짐이 수행의 조건이지 (과정)
수행의 목적(본각 本覺)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_()_
원각경 제2. 普賢菩薩章 (보현보살장)
수행의 실제
그때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며 오른 쪽으로 세 번 돌고 두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말씀 드렸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원하옵니다.
이 모임의 여러 보살들을 위하시며, 또 말세의 모든 중생들로서 대승을 닦는 이들을 위하소서.
이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듣고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저 중생이 환(幻)과 같은 줄 아는 자이면 몸과 마음도 또한 환이거늘 어떻게 환으로서 환을 닦습니까?
만일 모든 환성(幻性)이 일체가 다 멸했다면 곧 마음이 없으니 누가 수행함이 되며, 어찌하여 또 수행함이 환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중생들이 본래 수행하지 않는다면 생사 가운데 항상 환화(幻化)에 머물러 있어 일찍이 환 같은 경계를 요지(了知)하지 못하리니, 망상심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탈케 하겠습니까?
원하오니, 말세의 일체 중생들을 위하소서. 무슨 방편을 지어서 점차 닦아 익혀야 중생들로 하여금 온갖 환을 영원히 여의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씀 드리고 오체를 땅에 대어 절하며, 이같이 세 번 거듭 청하였다.
이때 세존께서 보현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재선재로다, 선남자여.
그대들이 능히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들을 위하여 보살의 환 같은 삼매를 닦아 익힐 방편과 점차를 물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환을 여의게 하는구나.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설하리라."
그때 보현보살이 가르침을 받들어 기뻐하며 대중들과 함께 조용히 들었다.
"선남자여,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가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남이, 마치 허공 꽃이 허공에서 생긴 것과 같다.
환화는 멸할지라도 허공의 본성은 멸하지 않나니, 중생의 환(幻)과 같은 마음도 환에 의해 사라지나 모든 환이 다 사라졌다 하더라도 본각(本覺)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환에 의해 각(覺)을 말함도 또한 환이며, 만일 각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오히려 아직 환을 여의지 못한 것이며, 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이 까닭에 환이 멸함을 이름하여 부동(不動 āneñja)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일체 보살과 말세 중생들이 응당 일체 환화인 허망한 경계를 멀리 여의어야 하나니,
멀리 여의려는 마음을 굳게 집착하는 까닭에
마음이 환 같은 것도 또한 멀리 여의며,
멀리 여읜 것이 환이 된 것도 또한 멀리 여의며,
멀리 여읨을 여의었다는 환까지도 또한 멀리 여의어서,
더 여읠 것이 없게 되면 곧 모든 환을 제(除)하리라.
비유하면 불을 피울 때 나무를 서로 비벼 불이 붙어 나무가 타서 없어지면
재는 날아가고 연기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과 같다.
환으로써 환을 닦는 것도 이와 같아서 모든 환이 비록 다하나 단멸에 들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환인 줄 알면 곧 여읜지라 방편을 짓지 아니하고,
환을 여의면 곧 깨달음이라 점차도 없느니라.
知幻即離 不作方便
離幻即覺 亦無漸次
일체 보살과 말세의 중생들이 이에 의해 수행할지니, 그리하여야 모든 환을 영원히 여의리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普賢汝當知 보현아, 그대는 마땅히 알아라.
一切諸衆生 일체 중생들의
無始幻無明 비롯함이 없는 환인 무명이
皆縱諸如來 다 모든 여래의
圓覺心建立 원각심에서 생겼느니라.
猶如虛空華 마치 허공꽃이
依空而有相 허공에 의해 모양이 있다가
空華若復滅 허공 꽃이 만일 사라져도
虛空本不動 허공은 본래로 요동치 않음과 같아서
幻縱諸覺生 환이 원각에서 생겨났다가
幻滅覺圓滿 환이 멸하면 각이 원만하나니
覺心不動故 본각의 마음은 요동치 않는 까닭이니라.
若彼諸菩薩 만일 모든 보살과
及末世衆生 말세 중생이
常應遠離幻 항상 응당 환을 멀리 여의면
諸幻悉皆離 모든 환을 다 여의리니
如木中生火 나무에서 불이 일어남에
木盡火還滅 나무가 다하면 불도 멸함과 같으니라.
覺則無漸次 깨달음은 점차가 없으며
方便亦如是 방편도 또한 그러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