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십무기와 대승불교의 무념

우암(雨庵) 2019. 4. 19. 18:29

우암이 생각해 보니

초기불교 10무기의 개념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 대승불교의 무념이 아닐까 합니다.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음으로 드러낸 것에 대해 불멸 후에 학인들이 헷갈려 하므로

이를 해결하려고 대승불교에서 금강경등을 통해서 부처님 말씀을 빌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놓은 것이 무념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세존께서 대답하시지 않은 질문들을 모아서 십사무기(十事無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보시는(여실지견 如實知見 yathābhūtañāṇadassana) 부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니까야의 십사무기에 대해서는 이 글 맨 뒤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1-4는 시공간의 유한 무한에 대한 것입니다.

5, 6은 영혼과 육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7-10은 여래의 사후 존재 문제 입니다.


이 질문들은 존재라는 문제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들입니다.

몸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있는가? 해탈이란 무엇인가? 시간과 공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존재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따라서 중생의 눈 높이에서 볼 때, '깨달은 자'라면 당연히 답변을 해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답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암이 이해한 바로는

세존께서 당연히 바로 아셨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알려 줘도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여래의 사후 존재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7~10)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내용은 인간이 논리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다 나열한 것입니다.


중생이 보기에는 몸이 죽었다면 영혼이 있던지 없던지 할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하던지 아니던지 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혹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한번 더 꽈서 볼 수도 있습니다.

한번 더 논리를 꼰다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까지 따져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위 질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대응해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질문입니다.

위 질문들은 여래의 사후에 대한 모든 논리적인 가능성을 따졌으므로

중생이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면 상기 네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답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암이 보기에는

세존께서 답변을 하시지 않은 것은 

질문의 의도를 너무나 명확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에 따른 명백한 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후학들은 세존께서 왜 그러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세존의 가르침이 자칫 개인의 영혼 구제로도 흐르게 된 것 같습니다.

(주목할 점은 여래께서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비판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나니 이것이 대승불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께서 말씀 안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이를 말로 표현하려다 보니 논리가 번다해집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다 보니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무념(無念 마음이 비어있음)을 세존께서 뜻으로서 가르친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부처님의 마음이란 무념의 상태인 것입니다.


세존의 가르침을 중생에게 펼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가르칠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언어가 중생들이 극복해야 될 핵심적인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생들에게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치면

중생들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有念)

마음을 내려놓지(無念)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을 가르쳐 주려면 언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언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를 극복한 자리에서는 정해진 법도 없고 설하신 바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법이니 설하신 바니 하는 것들은 모두 가르침에 필요해서 한 말일 뿐

즉 손가락(수단)일 뿐 달(궁극의 자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제7 無得無說分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anuttarasammāsambodhi 無上正等覺)이라 할 정해진 법이 없고 또한 여래께서 설한 단정적인 법이 없다.

須菩堤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제23 非說所說分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나는 설한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이 있다.'고 말한하면, 이 사람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설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설법이라는 것은 설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므로 설법이라고 말한다.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 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즉 불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언어가 필요하지만

궁극의 지혜 자리에서는 이미 그 언어를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궁극의 지혜자리에서는(강을 건넜다면) 과정에서 필요했던 것(뗏목)은 버리면 될 뿐

강 건넌 사람이 뗏목을 이고 갈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第九 一相無相分 이라고 우암은 판단합니다.


수다원이란 깨달음의 흐름에 든 자(入流)라 합니다. 이것은 중생의 관점입니다. (과정)

그러나 궁극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다원은 육근 경계를 보고 마음을 내지 않는 경지입니다.

사다함이란 한 번만 돌아오는 자(一來)라 합니다. 이것은 중생의 관점입니다. (과정)

그러나 궁극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다함은 마음이 한번 일어남을 보고 멈췄으니 돌아올 것이 없는 것(實無往來)입니다.

아나함이란 되돌아오지 않는 자(不來)라 합니다. 이것은 중생의 관점입니다. (과정)

그러나 궁극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나함은 마음에 일어남이 없는 것이니 되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것(實無不來)입니다.


第九 一相無相分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 須陀洹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 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 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 名阿那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즉 중생의 관점과 궁극의 관점을 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정과 결과의 대비입니다.


니까야는 무념이라는 목표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지만 그렇게 가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자비희사(사무량심)를 펼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념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보니 번뇌가 일어남인데 그 원인은 자비희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비희사가 된다면 무념이 될 수 있으니 항상 마음을 sati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승 불교에서는 결과를 먼저 내세웁니다. 무념할 수 있다면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다하게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개구측착(開口卽錯)이란 말입니다.


우암이 보기에는

니까야의 가르침은 과정에 대한 친절한 가르침이지만, 뗏목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대승의 가르침은 분명히 구경(究竟)을 설명하지만 실천 방법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나 두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대승불교의 단점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무념만을 고집한다면 연기법에 따라서 지식이 부족해져서

현대적인 언어로 불법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는 것입니다.


M72.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Aggivacchasuttaṃ)


십무기(無記, avyakata)

 

1.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sassato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2.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sassato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3. 세계는 유한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ntavā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4. 세계는 유한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nantavā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5. 영혼과 육체는 같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taṃ jīvaṃ taṃ sarīraṃ,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6.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ṃ,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7.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8.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9.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ca na c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10.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