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금강경에 나오는 큰 몸

우암(雨庵) 2019. 5. 16. 11:19

금강경에는 큰 몸(大身 mahākāya)이라는 비유가 나옵니다.


우암은 이 비유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늘 궁금하였습니다.


'우리 중생이 아는 몸이란 아무리 커 봐야 2.5m를 넘을 수 없을 뿐인데,

왜 큰 몸이라는 비유를 드셨을까? 그것도 수미산(카일라스 산) 만큼 큰 몸이라니...

이 비유에는 아마도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우암이 보기에는 큰 몸이란 시간적인 의미, 공간적인 의미, 그리고 중생이 느끼는 의미 등 세가지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금강경에서 큰 몸을 언급하신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불국토의 장엄)


"수보리여! 어떤 사람의 몸이 산들의왕 수미산 만큼 크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몸 아님을 설하셨으므로 큰 몸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 위대부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수보리언 심대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수보리여! 항하의 모래 수 만큼 항하가 있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이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진정 많다고 하겠는가?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궁극의 가르침인 무아)


"수보리여 일체법이란 일체법이 아닌 까닭에 일체법이라 말한다."


"수보리여! 예컨데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과 같다."

수보리가 말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매우 크다는 것은

큰 몸이 아니라고 설하셨으므로 큰 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수보리언 세존 여래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우암이 생각해 본 시간적 의미의 큰 몸이란

우리의 전생이 포함되는 나의 영혼이라는 개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숙명통을 말씀하시면서 '십만 전생'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넓게 보자면) 다겁 중생으로 경험한 것이 쌓여있는 것(蘊)이 '나'라는 것입니다.

중생은 과거의 업연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전생의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전생을 포함하는 전체를 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뢰야식 (阿頼耶 ālaya)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바라다 본다면 '나'는 정말 큰 몸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암이 이렇게 본 이유는

장엄정토분에서 큰 몸 비유 바로 다음에 갠지스강의 모래 비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암은 갠지스 강을 우리 세계가 시간을 따라 흐르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강의 모래 알이 바로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이 갠지스 강의 모래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전생이 엄청 많다는 의미)

이렇게 나를 바라다 본다면 정말 큰(mahā) 몸이라 할 수 있겠지요?^^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非身 즉 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청난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우암 같은 중생이 생각하는) 나의 근원인 '식(영혼)'이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주셨다고 우암은 읽습니다.

즉 식이란 계속 변화하는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서...

따라서 이것은 변치 않는 나의 본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 식이란 드러난 현상일 뿐입니다.


우암이 생각해 본 공간적 의미의 큰 몸이란

지금 내가 인식하는 것 그 모두가 나라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마치 '나'라는 몸을 가진 자아가 주어진 객관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과정을 살펴본다면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입니다. (김춘수의 꽃)

즉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관적으로 인연이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나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인식하는 것이 모두 나 입니다.

즉 나는 이 육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볼 때도 적용됩니다.

(이 경우는 물질주의(객관적인) 우주를 인정하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바라다 보는 세상은 우리 뇌에서 재구성된 공간일 뿐입니다.

빛이 눈을 통해 들어와서 전기신호로 바뀌어서 뇌로 전달되고

뇌에서 이를 공간감각으로 바꾸어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눈에 비춰진 세상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뿐입니다.

따라서 나의 몸과 마음이 경험하는 것이 나를 이루므로 (색수상행식; 오온 五蘊)

결국 나라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내가 주의를 기울여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크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암이 이렇게 본 이유는

구경무아분에서 큰 몸이란 표현이 일체법 (sabbe dhamma)이란 표현이 바로 다음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빨리어 삼법인(삼특상): sabbe sankhara anicca, sabbe sankhara dukkha, sabbe dharma anatta

제행무상 제행개고 제법무아)

내가 인식한 것이 나라면(일체법 一切法 sabbe dhamma) 이는 엄청 큰 것일 터인데

부처님께서는 구경무아분에서 이에 대해서 非大身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인식되는 일체를 나라고 본다면 육체를 나로 보는 것에 비해 엄청나게 큰 몸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도 나의 본질인 '그 무엇'에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그런 인식이 내 몸이라고 표현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는 내 몸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말씀이라고 우암은 이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암이 생각해 본 '중생이 느끼는 의미'의 큰 몸이란

세속적인 의미의 '큼'입니다.

재산을 많이 갖고 있거나 권력을 많이 갖고 있는 경우입니다.

혹은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금강경의 사구게로서 답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즉 우리가 갖고 있는 크다는 것의 기준이 과연 적절한가?

'나라는 것은 무엇이며 세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질문해 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나라는 것의 본질은 그것들을 뛰어 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큰 몸이란 큰 몸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결론)

그러나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알아 듣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과정-방편)

이러한 현상을 큰 몸이라고 설명하실 수 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암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