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시작점-자성
자성을 보았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자성은 중생들도 항상 보고 있다.
단지 자신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조사께서 '자성을 보는 것은 코 만지기보다 쉽다.'라고 말씀하셨다.
앞 글을 쓰다보니 금강경의 문구가 다시 들어온다.
색성향미촉법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입류(수다원, 예류자)라 한다.
수다원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금강경 9. 일상무상분)
즉 자성을 본다는 것은
색성향미촉법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것
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성을 보았다는 것은 이제 수행을 시작해도 되는 경지라는 것이다.
즉 자성을 보았다는 것은 높은 경지가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 경지에서는 '윤회란 존재하는지?' 등등의 여실지견이, 지혜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화선 하신 분들 가운데서
경전공부도 하지 않고 자성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여실지견, 통찰지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간이야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경전 공부를 통해서 확인을 하고 보림을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맛지마 니까야에 나타난 수행의 점차는 다음과 같다.
M38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Mah?ta?h?sa?khayasutta)
§66 부처님의 출현
§67 출가
§68 몸으로 짓는 계를 지키는 삶(정업)
§69 입으로 짓는 계를 지키는 삶(정어)
§70 청정한 삶(정명?)
§71 옷, 음식, 거처에 구애 받지 않는다.
§72~77 육근수호; 육근은 작동하지만 인상과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78 정념 정지
§79 계행을 갖추고, 육근을 수호하면서, 정념하면서 외딴 처소를 벗 삼는다.
§80 다섯 가지 장애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81 사선정을 성취한다.
이 경을 기준으로 본다면 자성을 본다는 것은
육근수호에 해당한다. 자성 자리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제야 겨우 sati와 sampajano를 해 볼 수 있는 경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79 까지의 순서이며
그래봐야
아직도 오개(다섯 장애;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열의, 분노, 해태와 혼침, 들뜸과 회한, 의심)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이다.
따라서 자성을 보았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자리를 본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너무 과대 평가되어도 안될 것이다.
상윳다 니까야에 나오는 수행의 점차는 다음과 같다.
두 경의 경지를 일대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맛지마의 사선정은 상윳다의 삼매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실지견은 자성을 본 것 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윳다 니까야 12:23 기반 경
upanis? : (f.) cause; means; likeness
괴로움의 발생(12연기)
믿음(saddh?)
환희(p?mojja) ; delight; joy; happiness
희열(p?ti) ; rapture, enthusiasm
경안(passaddhi) ; calmness; tranquility ; serenity
행복(sukha)
삼매(sam?dhi)
그대로 알고 봄(yath?bh?ta-???a-dassana) ; 'the knowledge and vision according to reality'
염오(nibbid?) ; aversion; disgust; weariness
탐욕의 빛바램(vir?ga)
해탈(vimutti)
멸진의 지혜 (khayasmi? khaye???a? ; 멸진이 일어나는 멸진의 지혜)
번뇌의 멸진(?sav?na? khaya?)
만법귀일 일귀하처: 이 모든 것이 모두 한마음의 작용임을 알았다면, 그 한마음은 어디에 의지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