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불자는 부조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암(雨庵) 2015. 2. 21. 12:29

불자는 부조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불자가 부조리를 본다면 중도로 대처하여야 합니다.

중도로 대처한다는 것은 '나'를 중심에 놓지 않고

올바른 행위를 중심에 놓고 대처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부조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理; 이치나 도리에 맞지 않음  

 

즉 부조리란 한마디로 현실이 모순 투성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어렸을 적에 알베르트 까뮤의 이방인을 읽었었는데

그 역시 부조리(absurd)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즉 많은 철학자들 역시 세상이 부조리한 것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 겁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여신 석가모니 세존께서도

현실 생활 뿐만 아니라 삶에서

이 부조리한 모습이 고통으로 다가오셨던 것은 아닐까요?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현실,

가졌다 해도 언젠가는 잃을 수 밖에 없는 현실

미워도 만나야만 하는 현실,

우리의 인생 생로병사 자체는 고통이었으며 모순투성이라고 느끼신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수행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무엇을 알아내셔서 부조리를 해결하셨을까요?

세존께서 알아내신 것은 12연기입니다.

12연기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하는 삶의 법칙성입니다.

이 법칙은 세존께서 발견하신 것이지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과거의 부처님들께서도 동일한 이 법칙을 발견하신 겁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들은 오직 이번 생 만을 보면서 (왜냐하면 다른 생은 알 수가 없으므로; 무명)

부조리에 대응하거나 혹은 부조리를 행하는 것이

결국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근원으로 보신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부조리를 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동시에 '부조리를 볼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생활의 원리는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란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오온)이 나가 아니라는 견해(정견)를 갖고

신구의 즉 몸, 말, 마음으로 그 정견에 따라서 살아가며 (정사-정어-정업-정명; 욕심내고 화내지 않으며)

수행을 해서 삼매를 얻는다. (정정진-정념-정정)

이중에서 세간의 부조리를 대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정견이 있건 없건 간에 (정견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없다면 믿음으로라도)

정사~정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해설은 제 블로그 글 '팔정도와 열개의 족쇄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내용이 너무 시시하지 않습니까?

내용은 초등생도 알 수 있지만 실천은 박사 할아버지라도 어렵습니다.^^

 

이런 삶을 실천하는 것이 중도의 삶이고 무아의 삶입니다.

중도의 삶이란 나를 내세우지 않는 삶입니다.

왜 나를 세우지 않을까요?

탐과 진을 멈추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오온이 나'라는 잘못된 사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왜냐하면 오온은 무상한 것이니까요!

 

사실 이런 삶의 태도는 평상의 마음에서도 항상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부조리를 볼 때 실천해야 할 행동원리가 아닐까 합니다.

 

세존꼐서 어떻게 이런 가르침을 펴실수 있으셨을까요?

 

(1) 왜 출가를 하시게 될까?

세존께서도 깨달음을 성취하시기 이전에는 우리의 현재 모습과 비슷하셨을 겁니다.

우리가 현재 주어진 인생만을 살펴본다면 모순 투성이 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러저러한 집에서 이러저러한 배경을 갖고 태어났을까?

왜 인생은 처음부터 불평등하게 시작될까? 등등...

우리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인생이 내 전부인 양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밖에 모르는' 인생에서의 인생관이란 (몇몇 성자의 경우는 제외되겠지요.)

'나의 감각을 즐겁게 해줄 방안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탐욕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장수하려는 욕망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우리는 이것들을 성취하려고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걸 얻으려면 돈만 있으면 되겠지요.

그래서 모두 다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가끔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러한 인생살이란 필연적으로 괴로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세존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왕자셨기 때문에 처음 4가지는 갖추고 있으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재색식명은 갖고 있으셨다는 거지요.

하지만 '지금의 인생 밖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또 왕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노예, 전쟁, 다툼...이 얼키고 설키는 인생이란 어떻게 보였을까요? 

 

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아무 이유도 모른채 태어나서

세상에서 주어진 상대적인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가다가

어느날 뜬금없이 사라져가야하는 우리 모두는, 세상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세존께서는 수행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세상의 가치관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 재색식명수가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셨기에-

세속의 견해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

즉 '왕자 자리를 박차는' 출가를 결행하십니다.

 

(2) 어떻게 진리를 알게 되시는가?

세존께서는 삼매에 드십니다.

색계 사선정이란 선정에 드신 후에

(나라는 생각이 옅어지셔서인지)

삼명을 얻게 되십니다.

삼명이란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입니다.

숙명통이란 내 전생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10만 생 이전 까지 보셨다고 합니다.)

천안통이란 다른 이가 왜 그런 일들을 겪게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숙명통과 천안통이 생긴다면

진리를 모두 이해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12연기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흘러가는가에 대한 대답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명지입니다. 무명에 반대가 되는 명지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생기시자 누진 즉 번뇌를 없애시게 됩니다.

명지가 드러났으므로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일도 없고 (탐심이 사라짐)

그러니 남과 타툴 일도 없어지신 겁니다. (진심의 사라짐)

따라서 탐진치가 모두 사라지신 겁니다. 즉 번뇌를 소멸하신 겁니다.

누진통을 얻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삼명을 얻으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사셔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