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존께선 우리를 오온으로 설명하셨을까?
그간 항상 궁금해 하던 주제였는데
나름 비교적 정리가 된 것 같아서
한번 의견을 같이 나눠 보고자 글을 올려 봅니다.
오온 및 무아에 대해서 언어적인 개념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시길...
세존께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오온으로 설명하셨다. 무엇이 오온인가? 색수상행식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란 무엇인가? 세상에 대한 경험이 아닐까? 혹시 오온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색: 외부 물질 또는 사건 혹은 마음속에서 생각이 일어날 때,
수: 우리는 이것을 즐거움,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으로 경험하고,
상: 그 느낌을 과거 경험에서 축적된 경향(습)으로 지각하여 집착하는 마음 상태로 만든 다음에,
행: 그에 따라 우리 몸과 마음이 반응(행 sankhara 신구의)을 하게 되고,
식: 이 전체 과정에 대해서 가치 판단을 하게 된다. (viññāṇa: vi(분리접두어)+aññā: ‘knowledge, comprehension)
즉 오온이란 우리가 외부 대상 경계 혹은 생각의 경계에 반응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며, 이를 근거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란 살아가는 내내 언제나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경험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무더기로 쌓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을 다섯 무더기의 쌓임으로 볼 수 있다고 하신 것은 아닐까?
사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자 경험이 아니던가? 그리고 쌓여있다는 표현은 우리가 마음속에 저장해 놓고 있다는 이야기이다-내 것이라고 집착하면서(오취온). 즉 오온이란 인간이 경험을 하는 모습이고 오취온이란 그 모습에 나라는 개념의 붙어있는 모습인 것이다. 또한 이 쌓임을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해탈인 것이다. 이 나라고 하는 ‘쌓여있는 것’을 해체하는 방법은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집착하지 않아서 나라는 개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내가 없으므로, 나라는 생각(족쇄)으로부터 풀려났으므로, 대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멀쩡하게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를 보면서,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 아닐까? 인생이라는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해 주셨듯 분명히 무아이다. 삶이란 조건에 따라 연생연멸하는 현상이지 영혼, 자아가 따로 독립적으로 있지는 않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영혼, 자아라는 개념은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나라는 것을 정의해 보자. 우리는 ‘네가 누구냐?’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우리들은 ‘나’를 축적된 과거의 경험을 갖고 있는 자로 인식하고 있다. 나는 어떤 부모를 통해서, 언제 태어났으며,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과 결혼해서, 어떤 집에 살고 있다 등등 나의 주변환경을 통해서 ‘그것을 경험한 자’를 나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더 정밀하게 기록해서 정신과 의사까지 동원해서 평소에 인식조차 못했던 전체 인생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하여 수 만장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할 수도 있다.
또한 숙명통을 통해서 전생의 기록까지 다 훑어 볼 수도 있다고 하자.
그래 봐야 ‘나’란 그런 경험을 한 ‘주체’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험의 축적이 나인가 아니면 경험을 인식하는 실체(아트만)가 따로 있는가?
만약 그 실체가 따로 있어서 그 경험을 한 것이라면, 앞서 설명한 경험이란 그 ‘실체’에 포함이 되는 것인가 아닌가? 만약 포함되지 않는다면 축적된 경험은 실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결국은 나의 행위와 나의 축적된 경험이 유리되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결국 나의 경험은 내 실체와는 무관하다는 단멸론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반면에 만약 경험의 집합체를 나라고 한다면, 경험이 곧 ‘경험하는 자’를 구성하게 되고 따라서 ‘실체’란 곧 경험의 집합체가 된다. 즉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니, 주관과 객관이 하나인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오온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세상을 포함하는 나'라는 존재는 변함없이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것이고(무상 無常), 그래서 나라고 하는 존재도 독립적으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무아 無我).
그런데 생각을 잘못해서 독립된 내가 따로 존재한다고 상정을 하게 되면, 그 잘못된 인식인 ‘나’에 초점을 맞추어 ‘나의’ 이익이 되도록 행동(신구의, sankhara)을 하게 되고, 그것이 나라는 생각의 업을 쌓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이 괴로움으로 드러나면 '나'는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苦).
한편 경험이란 매우 광범위한 것이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 ‘나의’ 경험이라는 것은 주어진 시대, 국가, 주변환경, 가족관계, 인간관계 등 다양한 것의 결합체인 것이다. 따라서 나의 경험이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의존적이고 관계적인 경험의 집합체를 ‘나’라고 한다면, 이에 대비되는 우리가 갖고 있고 집착하는 ‘고통을 겪고 있는’ 개념적인 ‘나’라는 것은 매우 협소하고 제한적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 제한적인 나라는 개념 위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할 지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이 ‘나’라는 잘못된 개념 때문에(치, 사견) 내게 이롭게 하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데, 내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끌어 잡아당기고(탐), 내게 싫다고 생각하는 것은 밀쳐버리고(진) 하는 것이다.
사념처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신수심법인데 어찌 수행하라는 것인가?
사념처 수행이란 오온 중 색수상식 즉 우리의 삶의 경험에서 마음챙김(sati)하는 수행이 아닐까?
색수상식에 나라는 개념이 붙으면
우리 딴에는 내게 이롭게 한다고 아무 때나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데 (ayonisomanasikāra)
이를 sati로 회광반조하라는 가르침은 아닐까?
사념처 수행에서 행이 빠지는 이유는
행이란 '자아라는 가정'을 이미 받아들이고 신구의로 반응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미 색수상식에 '나'라는 레이블이 붙여진 다음에 행이란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행은 수행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행은 팔정도의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으로 다스려져야 하는 계행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