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어떻게 해야 괴로움이 사라지는가?-팔정도

우암(雨庵) 2015. 2. 21. 11:43

세존께서는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하신다.

팔정도란 무엇인가?

왜 팔정도를 따라서 살면 괴로움이 사라지는가?

 

이미 앞선 글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인생을 경험한 자로 판단하고 있다고 했으며

세존께서는 이것을 분석적으로 해체하여 오취온이라고 알려 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오취온이 나라는 견해를 갖고 살면 그것이 곧 괴로움이라고

즉 괴로움이란 오음성고라고 설명을 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있다고 보아야 한다.

괴로움이란 '나'라는 개념을 세우고 사는 것이니

이 나라는 개념을 뛰어 넘고,

그런 견해의 기반위에서 신구의로 생활을 하고

세존께서 알려주신

오온이 내가 아님을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도록 해 주는 것이 팔정도이다.

 

즉 팔정도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정견 - 오온이 내가 아니라는 견해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 신구의로 정견을 생활화 함 (신행)

정정진, 정념, 정정 - 세존께서 말씀해 주신 것을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는 작업.

 

이러한 견해는 제 개인적인 견해로 기존에 팔정도를 계정혜로 분석하는 것과는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해본 오온에 대한 이해, 괴로움에 대한 이해가 맞다면,

팔정도도 저와 같이 해석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팔정도란 무엇인가?

팔정도란 자아(att?)라는 개념은 잘못된 견해라고 알려주시고(정견), 자아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방법을 신구의로 알려주시고(정사유-정어-정업-정명),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정정진-정념-정정). 만약 정견~정명까지만 알려주셨다면 이것은 철학(하나의 생각, 가설)일 것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실상이 그러하다는 것을 수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음을 정정진-정념-정정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래서 팔정도는 성스러운 진리(magga ariya sacca, 도성제)이다.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사성제를 아는 것. (나라는 것을 세우고 사는 삶이 잘못된 것이다!)

정사유(sammāsaṅkappa): 탐을 여읜 사유(nekkhammasaṅkappa 출리), 진을 여읜 사유. (abyāpādasaṅkappa) , 폭력을여읜 사유(avihiṃsā
saṅkappa)
정어(正語, sammāvācā): 거짓말, 이간질, 욕지거리, 꾸며대는 말(기어, 망어, 악구, 양설) 하지 않는 것.
정업(正業, sammākammanta):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지 않는 것.
정명(正名, sammāājīva):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올바른 생계로 생활을 유지한다.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 사정근 (단단 斷斷, 율의단 律儀斷, 수호단 隨護斷, 수단 修斷).

정념(正念, sammāsati): 사념처(신수심법)의 마음챙김.

정정(正定, sammāsamādhi): 사선정 (초선, 이선, 삼선, 사선)

 

정견이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나라는 것을 세우고 사는) 인생이 괴로움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괴로운 이유는 '나'를 오온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온이 내가 아님을 아는 것이 정견입니다.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이란

이전에 내가 오온인줄 알고 살 때의 버릇(탐욕과 화냄의 신구의)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내게 이롭게 하려던 사유를 멈추고 (정사유)

내게 이롭게 하려던 말들을 멈추고 (정어)

내게 이롭게 하려던 행동을 멈추고 (정업)

여법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명)

여기 까지는 깨우치지 못한 중생들의 윤리적인 신구의의 행위입니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직접 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나를 가정하면 우리의 주의(mano 意)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하려고

아무 것에나 주의를 주게 됩니다.

이 부분을 교정하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정념은 마음을 챙겨서 (오온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알아차리라는 말씀이고

선정을 통해서 무상, 고, 무아를 체득하여 해탈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왜 팔정도를 중도라고 하셨나?

 

여법한 삶이란 지금 이순간의 삶이다. 생각이 끊어진 삶이다. 집착함, 치우침이 없는 삶이다.

그래서 이러한 삶을 majjhimā paipadā(중도)라고 표현하신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세상을 경험하는 나의 자아라는 변치 않는 실체가 있는 줄 알고

라는 잘못된 환상을 세우고 사는데

그 잘못된 견해의 결과가 집착, 치우침(오취온)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한 삶이자 존재의 실상에 여법한 삶을 (팔정도)

'치우치지 않은 삶'인 중도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attā(자아)의 삶이 괴로운 이유는 나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유리하게 살려다 보니 신구의로 십악업을 짓게 되어서 윤회하고 과보를 받게 된다. 

세존께서는 자아(attā)는 잘못된 환상이고 눈병이며 anattā(무아)가 실상이라고 알려주셨다.

 anattā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견이다.

따라서 anattā의 삶을 신구의로 사는 것이 정사유-정어-정업-정명에 해당하겠지요.

anattā 임을 알면 당연히 그렇게 살수 밖에 없겠지요.

 

즉 anattā 알기 이전의 신구의는

모두 자아(attā)를 기반으로 하며 (나, 나의 것, 나의 자아)

따라서 나에게 유리하게 생각되는 것으로 신구의를 실행하게 되겠죠.

그러나 anattā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면,

이제는 신구의가 소위 정사유-정어-정업-정명’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바뀌겠죠.

 

그리고 anattā임을 체험하는 것이

수행인 정정진-정념-정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세존께서는

anattā란 일단의 논리적 구성물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이고

확인 가능하다고 알려주시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8정도의 삶을 살게 되면 이제는 외부 경계에 대해서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이 회광반조이다. 이것이 치우치지 않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중도 즉 majjhimā paṭipadā 이다. 나라는 개념에 몰입되어서 살지 않는 방법이 중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중생은 느낌에서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봐야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를 반대로 추구하는 일단의 고행주의자가 나타난다. 어찌 보면 고행주의는 단순히 즐거움 추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고통 속에서 마음이 고통에 휩쓸리지 않게 간수할 수 있는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 보았지만 고행주의자들은 몸만 힘들게 했을 뿐 여전히 인생의 의미를 알 길이 없었다. 세존께서 보살로서 고행하셨을 때와 같이

 

이러한 두 태도의 문제는 즐거움, 괴로움이라는 느낌에 대해서 그것을 아는 주체인 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즉 느낌이란 '나라는 존재의 기반 위에서 나타나는 태도'이기 때문에 여전히 att?(자아)의 관점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라는 집착인 오취온에 기반한 것이므로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고 내가 느끼는 괴로움이기 때문에 느낌에 대해서 나라는 관점이 살아있는 한 쪽으로 치우친 관점이기 때문에 두 의견 모두 중도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세존의 가르침이 즐거움도 취하지 않고 괴로움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 중간 어디에 쯤 있어서 중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라는 관점을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식이 머물지 않으셨기 때문에) 중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라는 자아'에 대한 문제 역시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즉 우문에 majjhimā paṭipadā 로 대응하신 것이다. 

 

그런데 앙굿따라 니까야 A6:55 소나 경에서 보면 vina란 악기의 조율이 너무 팽팽해도 안되며 너무 느슨해도 안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세존께서 사용한 단어는 중도가 아닌 조화로운이란 뜻인 samata를 쓰셨다. 즉 이 경우는 중도가 아니다.

 A6:55소나 경중에서

 소나여, 그와 같이 지나치게 열심인 정진은 들뜸으로 인도하고 지나치게 느슨한 정진은 나태함으로 인도한다. 소나여, 그러므로 그대는 정진을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다섯 가지] 기능들[五根]의 균등함(조화로움)을 꿰뚫어야 하고 거기서 표상을 취해야 한다.

Evameva? kho, so?a, acc?raddhav?riya? uddhacc?ya sa?vattati, atisithilav?riya? kosajj?ya sa?vattati. Tasm?tiha tva?, so?a, v?riyasamatha? adhi??haha, indriy?na?ca samata? pa?ivijjha, tattha ca nimitta? ga?h?h?ti.

 

acc?raddha : [ati + ?raddha] exerting oneself very or too much, with great exertion 極精勤

sa?vattati : : [sa? + vat + a] exists; leads to

atisithila : [ati + sithila] very loose, shaky or weak

kosajj?ya : [nt.] idleness; indolence

tasm? : [ind.] therefore

adhi??hahati: [adhi + ?h? + a] stands firmly; determines; fixes one's attention on 確立, 決意, 執持

samat? : [f.] equality; evenness; normal state

pa?ivijjha : [abs. of pa?ivijjhati] having penetrated; having comprehended 看穿적了解적

ga?h?ti : [gah + ?h?] takes; holds of; seiz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