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팔정도와 열개의 족쇄 (samyojana)

우암(雨庵) 2015. 2. 21. 11:45

저는 팔정도와 열 가지 족쇄가 구조상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열가지 족쇄이란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이며 아래와 같습니다.

유신견 sakk?ya-di??hi

불법에 대한 의심 vicikicch?

계금취 s?labbata-par?m?sa

감각적 욕망 k?ma-r?ga

악의 pa?igha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욕 r?pa-r?ga

정신적인 것(무색)에 대한 탐욕 ar?pa-r?ga

자만 m?na

들뜸 uddhacca

무명 avijj?

 

열 가지 족쇄란 '오취온이 나라는 잘못된 견해를 갖고 (유신견, 의심, 계금취), 그 나에게 이익이 되도록 탐진치로 물든 생각(번뇌)을 일으키면서 살아가서 (감각적 욕망, 악의, 물질적인 탐욕, 정신적인 탐욕), 그래서 수행 없이 자만하고 들떠있는 삶을 살아서, 결국은 그런 오취온이 윤회를 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다.

즉 열 개의 족쇄는 중생의 삶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 같아 보입니다.

팔정도란 수행자의 삶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여주는 것이구요.

 

 

팔정도

열 가지 결박(족쇄)

 

견해

정견

유신견

불법에 대한 의심

계금취

오취온은 가 아니다.

견해에서 풀려나면 예류 (수다원, Sot?panna)

; 삼보에 귀의하고 계를 지킴.

살아가는

방법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감각적 욕망

악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욕

정신적인 것에 대한 탐욕

Anatt?(무아)와 오취온 삶의 대비.

팔정도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내가 없으므로 탐진치(번뇌)에서 벗어난 삶.

욕계가 옅어지면 일래 (사다함, Sakad?g?mi) 벗어나면 불환 (아나함, An?g?m?)

수행

정정진

정념

정정

자만 (비교하는 마음)

 

들뜸

자만이란 정정진을 하지 않는 것. 즉 ayoniso

manasik?ra.

정념정정은 들뜸의 댓 구.

결과

지혜

해탈

무명

(윤회)

오취온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명.

무명을 타파하면 아라한(Arahat)

 

 

 

저는 이 비교에서 팔정도를 여덟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로 표현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팔정도에 지혜 및 해탈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맛지마 니까야의 117번 경인 커다란 마흔의 경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대비의 장점은 열 가지 결박의 내용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각 항목이 갖고 있는 뜻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점이 있어 보입니다.

특히 자만과 들뜸이라는 내용이 왜 열 가지 결박의 뒷부분에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었는데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확연하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견해를 살펴보면 팔정도는 오취온이 나라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라는 내용이고

  열 가지 결박은 오취온이 나다.’라는 내용이다.

- 살아가는 방법은 팔정도는 신구의 즉 몸, , 마음으로 나 없이 살아가는 방법인 반면에

   열 가지 결박이란 나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행동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 같다.

- 수행 부분에서 팔정도는 정정진을 시작으로 하지만

  열 가지 결박에서는 수행을 하지 않는 상태인 자만입니다.

  수행자는 정념-정정으로 마음을 가라 앉히지만 중생은 마음이 들떠 있다.

- 그렇게 다른 삶을 산 결과

  수행자는 지혜를 얻지만

  중생은 무명 즉 오취온이 나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그래서 수행자는 해탈을 하지만 중생은 윤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삶을 사는 사람이 수행자의 삶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열개의 족쇄에서 풀려나냐 하는데, 그 내용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잘못된 견해가 바르게 잡혀야 합니다. (오취온이 내가 아니다.)

그리고 나서 올바른 견해에 맞지 않는 신구의로 행위(sankhara)가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 연후에 자만하고 들떠 있는 마음을 정정진-정념-정정 상태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즉 열 개의 결박이란, 이미 알려져 있듯이, 수행의 점차 즉 순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새롭게 생각해 본 것은 팔정도도 수행의 점차로 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열개의 족쇄 각 항목에 대한 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신견 sakkaya-ditthi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수상행식에 대해서 반복.)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aya-ditthi) 이러한 것입니다. (M44 교리문답의 작은  §8)

 

불법에 대한 의심 vicikicch?: ‘오취온이 자아가 아니다.’라는 불법 (anatt?)에 대한 의심

 

계금취 s?labbata-par?m?sa<!--[if !supportFootnotes]-->: (해야만 하는 것) 혹은 금(해서는 안 되는 것)을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변치 않는 자아에 대한 취착이다. 계를 지키려는 이유가 이치상 그러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에게 손해가 될 것 같기 때문인가?

왜 계를 만들어 놓았는가?

세존께서 계를 만든 이유는 에 함몰되어서 살아가는 중생에게 진리의 깨달음(오취온은 가 아니다.)을 당장 실현시키기는 어려우니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 지침을 진리의 이치에 맞도록 말씀해 주신 것은 아닐까?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취지는 온데간데 없고 다시 에 함몰되어서 계 및 금계에 대해서 나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내용인 계에 대한 취착을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까?

계금취를 경전에서는

번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것

이라 표현하신 것은 아닐까?

정견~정명의 옳음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신다. (M117 커다란 마흔의 경)

- 번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것 (윤회, 선업)

-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것

계금취도 취(par?m?sa)이다. 따라서 중도가 아니다. (오취온에서는 취가 up?d?na : 'clinging')

par?m?sa : 'adherence', attachment, 'misapprehension'

이것은 계만 지키면 된다.’라는 생각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감각적 욕망 k?ma-r?ga 외부 경계에 대해 좋아할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화살. (욕계)

 

악의 pa?igha 외부 경계에 대해 싫어할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화살. (욕계)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욕 r?pa-r?ga 몸에 대한 탐욕, 재산 등. 두 번째 화살. (색계)

 

정신적인 것(무색)에 대한 탐욕 ar?pa-r?ga 심미안 등. 두 번째 화살. (무색계)

 

자만 m?na

자만이란 오취온이 나다.’라는 기준 하에서

에게 유리한 것, 불리한 것을 잣대삼아

그 기준으로 세상에서 겪는 일들에 주의를 기울여 비교하며(ayoniso manasik?ra)

탐진치에 물드는 것이다.

 

그리고

정정진이란 오취온이 내가 아니다.’라는 기준 하에서

선과 불선을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 여부로 정의 내리고

그 기준으로 세상에서 겪는 일들에 주의를 기울여(yoniso manasik?ra)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즉 자만과 정정진이 댓구를 이루는 이유는 주의 기울임(manasik?ra)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들뜸 uddhacca: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한 시도 고요히 머물지 못함. sam?dhi의 반대 개념. 비교하는 마음이 결국 들뜸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비교하는 마음이 사라져야 비로서 들뜸을 제거할 수 있다.

 

무명 avijj? 지혜 없음이다. 오취온이 자아라고 생각함.

들뜸이 사라져야 비로서 명이 생기고 그래서 내가 오취온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제까지 많은 분들이 자만과 들뜸을 미세한 자만과 들뜸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케마까의 경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S22:89 케마까의 경 (Khemaka sutta)

장로들이 케마까에게

오온 가운데 어떤 것이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지 묻는다.

그러자 케마까 존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장로들은 그렇다면 케마까 존자는 아라한인가 하고 묻는다.

케마까 존자는 아라한이 아니라고 답한다.

케마까 존자는 그는 오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나다.’라고 관찰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자 장로들은

색수상행식 중 어느 것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하는 지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자 케마까 존자는

꽃의 구성 물질(꽃 잎, 꽃 자루, 암술 등)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꽃에서 향기가 난다며

그와 같이

나는 있다.’라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오온이 나다.’라고 관찰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13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제거되었다고 하더라도,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는 미세한 자만('asm?'ti m?no) 나는 있다라는 욕구('asm?'ti chando)와 나는 있다라는 잠재 성향('asm?'ti anusayo)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여 머뭅니다.

이렇게 할 때 오온에 대한 나는 있다.’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잠재 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힙니다.

 

위 내용이 오상분결의 자만을 미세한 자만으로 보는 유일한 근거라고 판단된다.

제가 더 찾아 보아야겠지만 세존께서 직접 오상분결의 자만을 설해 주신 부분은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케마까 경은 세존 멸도 후에 장로가 생기고 나서 형성된 경으로 판단됩니다.

만약 이런 단계가 있었다면 왜 세존께서 직접 이렇게 설하지 않으셨을까요?

또 왜 장로들은 케마까에게 이 사실을 거듭 물어 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