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의 문제-객관은 있다!
내가 죽은 후에도 내일이 있고 태양이 떠 오를까요?
즉 객관세계란 것은 있는 것일까요?
아니라면 이 세상이란 것은 식이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할까요?
그래서 객관 세계란 그저 중생의 착각에 불과할까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문제에 대해서
아래 '대상은 밖에 없는가?'라는 글에서
저는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객관 세계란 존재하는 것 아닌가?'라는 취지로 글을 올렸었습니다.
깨달은 분의 경지는 제가 상상을 해 볼 수 밖에 없는 수준이라 언급은 회피하겠습니다. ^^
오늘 저는 '동시성'이라는 문제 제기로 대상이 있음을 설명하려 합니다.
감각현상은 동시적이 아니라는 말을 통해서 대상이 존재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의 문제를 통해서 대상(객관세계)은 존재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대상을 감각하는 현상은 동시적인 현상이 아니라서
먼저 감각대상이 존재하고 나서 나중에 그걸 우리가 인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이라는 객관세계가 나의 감각기관을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상이라는 객관세계를 감각하는 것은 나의 감각기관을 의지해서 존재한다.'라는
일반인도 다 알고 있는 당연한 말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을 하게 된 것은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인식하는 방법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감각기관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동시'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인식이란 현상을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해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객관 세계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을 하십니다.
그 이유로 우리의 감각과 보는 대상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말을 하십니다.
내가 본다는 현상을 보는 자(안이비설신)와 보이는 대상(색성향미촉)으로 둘로 나누는 것은
하나의 현상을 주관 및 객관 둘로 나누어 놓고 그렇게 분별을 해 보았기 때문이지
사실은 현상이란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질 수 없다는데서 문제의식이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 둘의 존재(주관과 객관)는 서로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배제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죠.
따라서 '주관이 없다면 객관세계도 없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생각이 불교 논리의 '일체유심조'를 만나서 '세상은 꿈이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대상(객관)을 감각하는 것은 (존재가 아닙니다!) 감각기관과 대상에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배제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 의존하는 것은 감각의 문제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객관세계란 중생세간에 엄존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보죠.
눈 앞에 모니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제 눈 앞에 모니터란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니터는 제 눈을 의지하지 않으면 보여질 수 없고
제 눈이 없다면 모니터는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실은 이 세계란 '꿈과 같아서' 내 감각기관이 사라지는 순간 (죽는 순간)
객관 세상이란 것 자체가 존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즉 다시말해 감각 기관과 대상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면
감각기관이 사라진다면(내가 죽는다면) 대상 또한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도 없어진다).
그리고 그 대상이란 것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꿈같은 것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이 사라지면 내일도 없고 객관 세계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의 식의 조작(일체유심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논리가 마치 소피스트 (괴변론자) 비슷한 논리 아니냐고 의문을 던져봅니다.
혹은 희론일 수도 있구요...^^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논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감각의 동시성을 가정한다는 것입니다.
대상과 감각현상은 동시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의지한다고 합니다.
만약 동시적이 아니라면
다시말해 대상이 먼저이고 감각이 뒤에 있다면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말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 아닐까요?
과연 대상과 감각기관은 동시적일까요?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대상을 감각하는 현상은 동시적인 현상이 아니라서
먼저 감각대상이 존재하고나서 나중에 그걸 우리가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상이 나의 감각기관을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사용하는 감각기관은 모두 매개체를 이용합니다.
시각은 빛을, 청각은 공기의 떨림을, 후각은 공기에 실려온 화학물질을, 미각은 음식 안에 있는 화학물질을, 촉각은 접촉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감각하는데는 시간 차이가 나서 동시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우리 감각 기관에 감지된 것이 우리 뇌까지 도달해서 처리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이러한 감각 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대상과 감각의 동시성은 깨집니다.
따라서 서로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대상에 의지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태양은 지구에서 엄청 멀리 떨어져 있죠. 빛의 속도로 8분 12초인가 떨어져 있다고 배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태양은 8분 12초 전의 태양입니다.
동시적이 아니죠? (물론 이 동시성이란 생각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주관과 객관이 서로를 의지해서 존재한다면
내 눈이 8분 12초 전의 태양과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 8분 전에 태양이 사라졌다해도 우리는 아직 알 지 못합니다.
만약 태양과 제 눈 감각이 서로를 의지한다면 그래서 식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주로 눈을 돌린다면
내 눈은 수 억년 전의 이미 사라져 버린 지도 모르는 은하에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주관과 객관이란 '존재'가 서로를 의지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제 생각은 부처님 말씀에서도 확인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상윳다 니까야 S14:8 아님 경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의 감각이란 시간적으로 진행됨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요소-인식-사유-열의-열기 순으로는 진행 되어도
그 반대로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소가 있고 인식을 하지 인식이 있고 요소가 있거나
혹은 동시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가르침은 주관과 객관이 동시성이 아니라는 것이고
주관과 객관이 (물질적으로) 서로를 의지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란 것을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객관세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5. 형색의 요소를 반연하여 형색의 인식이 일어나고,
형색의 인식을 반연하여 형색의 사유가 일어나고,
형색의 사유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의가 일어나고,
형색의 열의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기가 일어나고,
형색의 열기를 반연하여 형색의 추구가 일어나지만,
형색의 추구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기가 일어나지는 않고,
형색의 열기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의가 일어나지는 않고,
형색의 열의를 반연하여 형색의 사유가 일어나지는 않고,
형색의 사유를 반연하여 형색의 인식이 일어나지는 않고,
형색의 인식을 반연하여 형색의 요소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 외에도 시간의 흐름이란 개념을 고려하고 생각해 본다면
중생에게 '객관세계가 없다!'는 생각은 제게는 잘못된 사고라고 판단됩니다.
예를 들자면 중생에게는 시간에 흐름 속에 있는 윤회세계도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예를 들어서 윤회의 세계를 상정해 본다면 전생이 있고 현생이 있고 내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살아갑니다. 혼자 사는게 아닙니다. 다른 중생들과 함께 유정물 무정물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것이 중생세산 기세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었다면서 그 모든게 다 꿈이다? 이상한 이야기 아닐까요?
내가 죽는다고 지금 내가 사용하는 몸이 작동을 멈추었다고 내 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식이 계속 우리가 사는 곳에서 작용하고 있는데
이게 다 꿈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생멸하는 객관 세계는 모두 존재합니다. 고정되지 않고 변화를 하지만 그런 세계는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꿈 같이 보라는 말씀은
집착을 떠나라는 말씀이지 진짜 꿈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객관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세상을 사는 것이 괴로움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팔정도의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객관의 세계가 없다는 표현이 깨달음 자리의 표현이라고 말씀해 주신다면
제 답변은
깨달으신 후에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그 말을, 그 알음알이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S14:8 아님 경 (Nocetam-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요소들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인식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인식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사유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사유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의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열의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기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열기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추구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만, 추구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기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열기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의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열의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사유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사유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인식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인식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요소들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요소들의 다양함인가?
형색의 요소, 소리의 요소, 냄새의 요소, 맛의 요소, 감촉의 요소, 법의 요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요소의 다양함이라 한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요소들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인식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인식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사유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사유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의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열의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기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열기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추구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만, 추구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기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열기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추구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만, 추구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기의 다양함이 일어나지 않고, 열기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의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열의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사유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사유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인식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인식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요소들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는가?
비구들이여, 형색의 요소를 반연하여 형색의 인식이 일어나고, 형색의 인식을 반연하여 형색의 사유가 일어나고, 형색의 사유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의가 일어나고, 형색의 열의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기가 일어나고, 형색의 열기를 반연하여 형색의 추구가 일어나지만, 형색의 추구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기가 일어나지는 않고, 형색의 열기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의가 일어나지는 않고, 형색의 열의를 반연하여 형색의 사유가 일어나지는 않고, 형색의 사유를 반연하여 형색의 인식이 일어나지는 않고, 형색의 인식을 반연하여 형색의 요소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비구들이여, 소리의 요소를 반연하여 소리의 인식이 일어나고, 소리의 인식을 반연하여 소리의 사유가 일어나고, 소리의 사유를 반연하여 소리의 열의가 일어나고, 소리의 열의를 반연하여 소리의 열기가 일어나고, 소리의 열기를 반연하여 소리의 추구가 일어나지만, 소리의 추구를 반연하여 소리의 열기가 일어나지는 않고, 소리의 열기를 반연하여 소리의 열의가 일어나지는 않고, 소리의 열의를 반연하여 소리의 사유가 일어나지는 않고, 소리의 사유를 반연하여 소리의 인식이 일어나지는 않고, 소리의 인식을 반연하여 소리의 요소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비구들이여, 냄새의 요소를 반연하여 냄새의 인식이 일어나고, 냄새의 인식을 반연하여 냄새의 사유가 일어나고, 냄새의 사유를 반연하 냄새의 열의가 일어나고, 냄새의 열의를 반연하여 냄새의 열기가 일어나고, 냄새의 열기를 반연하여 냄새의 추구가 일어나지만, 냄새의 추구를 반연하여 냄새의 열기가 일어나지는 않고, 냄새의 열기를 반연하여 냄새의 열의가 일어나지는 않고, 냄새의 열의를 반연하여 냄새의 사유가 일어나지는 않고, 냄새의 사유를 반연하여 냄새의 인식이 일어나지는 않고, 냄새의 인식을 반연하여 냄새의 요소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비구들이여, 맛의 요소를 반연하여 맛의 인식이 일어나고, 맛의 인식을 반연하여 맛의 사유가 일어나고, 맛의 사유를 반연하 맛의 열의가 일어나고, 맛의 열의를 반연하여 맛의 열기가 일어나고, 맛의 열기를 반연하여 맛의 추구가 일어나지만, 맛의 추구를 반연하여 맛의 열기가 일어나지는 않고, 맛의 열기를 반연하여 맛의 열의가 일어나지는 않고, 맛의 열의를 반연하여 맛의 사유가 일어나지는 않고, 맛의 사유를 반연하여 맛의 인식이 일어나지는 않고, 맛의 인식을 반연하여 맛의 요소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비구들이여, 감촉의 요소를 반연하여 감촉의 인식이 일어나고, 감촉의 인식을 반연하여 감촉의 사유가 일어나고, 감촉의 사유를 반연하 감촉의 열의가 일어나고, 감촉의 열의를 반연하여 감촉의 열기가 일어나고, 감촉의 열기를 반연하여 감촉의 추구가 일어나지만, 감촉의 추구를 반연하여 감촉의 열기가 일어나지는 않고, 감촉의 열기를 반연하여 감촉의 열의가 일어나지는 않고, 감촉의 열의를 반연하여 감촉의 사유가 일어나지는 않고, 감촉의 사유를 반연하여 감촉의 인식이 일어나지는 않고, 감촉의 인식을 반연하여 냄새의 요소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비구들이여, 법의 요소를 반연하여 법의 인식이 일어나고, 법의 인식을 반연하여 법의 사유가 일어나고, 법의 사유를 반연하 법의 열의가 일어나고, 법의 열의를 반연하여 법의 열기가 일어나고, 법의 열기를 반연하여 법의 추구가 일어나지만, 법의 추구를 반연하여 법의 열기가 일어나지는 않고, 법의 열기를 반연하여 법의 열의가 일어나지는 않고, 법의 열의를 반연하여 법의 사유가 일어나지는 않고, 법의 사유를 반연하여 법의 인식이 일어나지는 않고, 법의 인식을 반연하여 법의 요소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비구들이여, 요소들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인식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인식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사유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사유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의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열의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기의 다양함이 일어나고, 열기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추구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만, 추구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기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열기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열의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열의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사유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사유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인식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고, 인식의 다양함을 반연하여 요소들의 다양함이 일어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