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상속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요즘 저는 '삼명'에 빠져있습니다. 그렇다고 신통에 흠뻑 취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연기법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연히 부처님의 깨달음을 나름대로 이해했다고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연기법이란 수 많은 케이스 스터디의 산물입니다. (숙명통, 천안통)
그래서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던 무명 상태에서 벗어나시자
그동안 이 무명때문에 일어나던 번뇌가 사라지게 되셨다는 겁니다. (누진통)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업'이란 것이 매우 중요해 보이고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 전생의 업이 큰 영향을 주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업을 짊어지고 있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과거의 업에서 풀려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1) 이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업장 소멸을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참회가 중요한 요소일 수 있습니다.
연기법을 이해했다면 그래서 내 과거 전생의 두터운 업장을 보거나 이해한다면
참회는 당연히 따라올 수 밖에 없는 행동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앞선 생에 대해 후회와 미안함을 낸다고 해서 연민하게 된다해서
인이 사라지는 지에 대해서는 제 수준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과거는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그 인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명해 주신 오개(五蓋 pañca nīvaraṇa 다섯 장애) 중 후회(kukkucca)와 들뜸이 있습니다.
이중 만약 우리가 과거 전생에만 매여있다면 이는 후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참회는 해야되지만 그것에 매여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닐런지요?
과거 전생에서 현재 모습의 원인을 본다면 지금 현재의 모습(과)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억울함이 좀 가실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과거의 일에 직접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참회는 필요하지만 이는 수동적인 대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시점에서 과거 전생을 알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현재 시점에서 현재 내 모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과거의 선택을 알게 될 경우
그 원인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결과의 확률적인 분포에 따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업연에 따라서 사는 삶)
원인에 파악하자 과보를 받고 업이 소멸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 양자역학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과거에 발생한 중요한 과정을 관찰하지 않으면
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경우가 확률적으로 일어나지만
- 과거에 발생한 중요한 과정을 관찰하면
그에 따라 확률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경우가 붕괴되고 한 가지로만 결정된다.
이러한 양자역학 실험의 함의는
과거 전생에 대한 이해가 현재의 모습을 확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며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업장이 소멸된다는 것은 그 업의 에너지가 더 이상 다른 업과 간섭을 일으키며 작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현생에서 전생을 관찰하는 것이 인과를 확정시키며, 그것으로 업은 끝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수 많은 전생을 모두 본다는 것은 모든 업을 종식시킨다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참회란 이미 과거 전생에 대해 개념적인 이해를 했거나 직접 보았다는 것을 전재로 하므로
현재의 내 삶을 변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2) 한편 미래도 지금 여기에 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시간이란 '지금 이 순간'이 됩니다.
즉 지금 이 순간의 행동(선택)에서 과거의 업에 매이지 않게 행동을 할 수 있고
나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의 업에 매이는 행동이란
현재 모습에서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혹은 불이익에 성을 내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탐과 진을 과감히 깨 버리고 사는 것이 업에 대한 대처 방법일 것입니다.
과거의 업력에 매이는 현상은 결국 현재의 삶에 이익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매이게 되면 결국 계금취 즉 또다른 집착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법을 알기 전의 삶은 오직 이 한생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므로 (치심 癡心)
현생의 나라고 하는 '업의 상속자'의 이익에 매여 살게 되며 이는 탐(욕망)과 진(성냄)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무명이 무엇인지 아는 이제부터의 삶이란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
그래서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일일시호일 日日是好日)
이러한 삶이
그대로 알고 봄(yathābhūtañāṇadassana)때문에
염오(싫어 함 nibbidā)하고
이욕(탐욕의 빛바램 virāga)하게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