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뻔한 질문이고 너무나 뻔한 답변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에서든 주인이 되어야,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가 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누구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눈꼽만치도 알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 대부분의 대답은 이 몸입니다. 이 몸이 곧 나입니다. 그 외에는 알지를 못합니다. (유신견 有身見)
그래서 이 '한 몸'에 몸 받쳐 몸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의 즐거움이 거부당했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게 됩니다.
나라는 것의 실체가 '이 몸'이라는 한 생각이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어리석음(무명 無明)입니다.
유신견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중생)들은 이걸 모릅니다.
중생은 내 눈 앞에 펼쳐진 것(현생) 만을 볼 수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견해를 근거로 해서
현생에서 나타난 세상 일에서 유불리를 따지기 때문에
탐심과 진심 즉 욕망을 내고 성을 내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을 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 같은 깨달으신 분께서
'세상 일에는 다 원인이 있다!'(연기법)라고 진실을 말씀해 주시자
이때 부터는 업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괴로운 것은 다 원인이 과거에 있으니 나는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의 내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는 선업을 쌓아야 합니다. (계금취 戒禁取)
이런 견해는 이치상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전에 갖고 있던 몸의 의미가 단지 현재에서 과거 및 미래로 확장이 되었을 뿐
여전히 몸을 떠나고 있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업의 상속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 업의 상속자를 위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란 결국 괴로움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시고
깨달으신 분들께서는 '세상은 공한 것으로 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즉 나라는 것이 변치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것에 집착해서 업의 상속자를 자처하고 있으니
그 세상이란 것이 흐름이지 잡을 수 없는 것이란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나라는 것도 무상하고 법이라는 것도 무상하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렇게 설해 주심으로써 중생들이 업의 상속자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나'란 집착 대상도 내려 놓으란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은 조건지워진 것이기 때문에 변치 않는 존재란 없다는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업의 상속자라는 것도 결국 업을 조건으로 형성되는 조건지워진 존재이지
브라만 교에서 말하는 진아(atta)는 따로 없다는 가르침이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생들이 모든 것이 공하다는 공병(空病)에 걸립니다.
'나'도 공한 것이고 세상도 공한 것인데... 하면서 마치 도를 다 끝낸 사람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란 내 인생의 주인공이 '공이란 생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분들은 이런 이해를 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꿈 깼다면 다른 꿈 꾸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인생이 어차피 꿈이고 공이라면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습니까?
왜 꿈 깬 사람이 꿈꾸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까? 이 모든게 어차피 다 꿈인데요???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에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은 꿈이 아니라는 의미가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스님께서는 이 부분을 지적하십니다.
육조단경 27 對 法 에서 취해본 내용입니다.
著空卽惟長無明이요 著相惟長邪見이라
착공즉유장무명 착상유장사견
空을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지금 현재의 모양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만 기르느니라.
自性上說空하나 正語言하면 本性이 不空하니 迷自惑은 語言邪故라
자성상설공 정어언 본성 불공 미자혹 어언사고
자성에서 空을 말하는 것이니
바르게 말하자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다고 하여야 하지만
미혹함에 스스로 현혹되므로 언어적 표현은 틀리다고 한 것이다.
어쨌든 공이란 개념에 걸리신 분들은 말로는 부처님 말씀을 등불삼아 살아간다고 하지만
부처님 등불은 남의 등불일 뿐이므로
그 불이 꺼지자 내 앞이 깜깜한 것입니다. 즉 내게는 스스로 비출 등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삶의 방식(나에 걸리고 공에 걸리는 것)이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양변(兩邊)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일까요?
세존께서는 자귀의 법귀의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도 참 이상하시지
무아라고 하실 때는 언제시고, 이제는 '나라는 존재에게 귀의하라!'는 말씀을 하신단 말인가요?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허언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한 뜻이 있으십니다.
첫째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것은 전생에서 현생으로 연결되는 업의 상속자입니다. 현생 만의 나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못 박고 계십니다.
그 나에 귀의해서 즉 섬 삼아서 의지처 삼아서 풍랑치는 바다를 건너라 하셨습니다.
또한 법에 귀의하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법이란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일까요?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연기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이란 연기법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귀의하라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연기법을 외우라는 말씀일까요?
제 이해로는 연기법을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을 통해서(법귀의) 나의 전생 및 현생을 관찰하여(자귀의) 파도가 치는 거친 바다를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라고 알려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한 나의 괴로움에 대한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사념처 수행을 말씀해 주십니다.
사념처란 신수심법이며 이는 우리가 생활하는 순간 순간을 의미합니다.
념처 즉 지금 이 순간에서 sati를 하라는 것입니다.
전생의 습에 물든 판단을 하지 말고 sati하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비추어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생에 물든 판단을 하는 곳은 몸, 느낌, 마음 상태, 그리고 가치 판단 기준에 있다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에 부딪혀 한 생각이 일어나려고 할 때 그 마음을 돌이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전생의 습을 바라다 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전생의 습은 우리에게는 폭류처럼 일어난다고 유식 삼십송은 알려주십니다.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아뢰야 식은) 되풀이 되는 일도 없고 (전생에 대해) 기억되지도 않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觸作意受想思) 작용할 때 그러하여,
항상 전변하는 것이 폭류와 같으며
아라한이 되면 평정해 진다. (아라한에서 윤회가 멎는다.)
즉 경계에 부딪히면 중생ㅇ은 생각을 볼 틈도 없이 습이 한 생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뢰야식(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다 보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가 바로 자성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어난 마음을 가지고 놀지말고, 일어나는 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던져진 진흙을 따라가지 말고, 진흙을 던지는 것을 덮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그곳이 곧 바른 깨침 자리이고'라고 가르쳤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현재의 나란 모습과 그 근간인 과거의 습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귀의)
또한 그런 현상을 무시하지 말고 연기법에 따라 이해를 직접해서 (법귀의)
즉 자귀의 법귀의 해서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는 것
이것이 제가 이해한 주인공의 삶입니다.
만약 자귀의만 한다면 업병에 걸립니다.
만약 법귀의만 한다면 내 문제는 해결이 되질 않습니다. (공병)
더 나아가 법성게는 다음과 같이 알려주십니다.
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착여의
(업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인연을 벗어난 선한 일을 마음대로 펼치니
즉 이제는 업의 상속자가 아니라 선업의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로서 인생의 진짜 주인공이 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깨치신 분들은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게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업의 상속자로 살 때에는
그 심층적인 원인도 모르면서 일어나는 일을 대하며 나는 일희일비하였는데 사실은 그 모두가 괴로움이었고
이제 비로서 중생의 삶과 연기법을 이해하여 괴로움에서 풀려나니
하루하루가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隨處作主 立處皆眞 입니다.
그 어디에 가더라도 불국토를 장엄하라!
이것이 제가 이해하고 있는 주인공의 삶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