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S22:87)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maṃ :mama(1), mamaṃ(2),see ahaṃ
mama :pron. [ahaṃ の dat., gen.] 私の, 私のもの, 我所
ahaṃ : [nom. sing. of amha] I
우리는 위 문장을 읽으면서 법을 보는 자가 부처님(불성 자리)을 본다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maṃ)를 정확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즉 위 문장에서 나는 누구일까요?
부처님이신 여래를 뜻할까요?
아니면 이 글귀를 읽고 있는 사람인 '나라는 존재'일까요?
그래서 나라는 존재의 허상(잘못된 자아관)을 본다는 말이 아닐까요?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글귀에서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문장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법을 보는 자가 부처님을 본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maṃ이 여래를 가르친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자아(나)라는 관점 즉 오온이 '나'라는 관점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1.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스스로를 나(asmi)로 지칭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나(asmi)라는 것은 부처님의 관점에서는 중생이 갖고 있는 잘못된 관념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지칭할 때는 새로운 조어(?)인 여래(tathāgata)란 말을 사용하신 것 아닌가 합니다.
2. 또한 경전 내용을 살펴보아도 이 말씀 바로 이어서 '나'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나'라고 지칭하고 있는 오온이라는 경험의 집합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오온이란 것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3. 더 나아가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나'라는 것에 대한 이해에 대해 다짐을 받으십니다.
따라서 위 문장을 제 방식대로 해석해 본다면
진리(법)를 보는 자는 '나라는 것(오온)의 허상 [무아]'을 보고 '나라는 것(오온)의 허상 [무아]'을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 해석을 지지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은 경전의 문구 때문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러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몸은 이제 세존을 친견하러 갈만한 힘마저도 없습니다.”
8.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Cirapaṭikāhaṃ, bhante, bhagavantaṃ dassanāya upasaṅkamitukāmo, natthi ca me kāyasmiṃ tāvatikā balamattā, yāvatāhaṃ bhagavantaṃ dassanāya upasaṅkameyyan”ti.
“Alaṃ, vakkali, kiṃ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Dhammañhi, vakkali, passanto maṃ passati; maṃ passanto dhammaṃ passati.
cirapaṭikā : [ind.] long since [ciraṃ+paṭika]
dassana: [nt.] sight; intuition; insight 見,
upasaṅkamitukāma: «upasaṅkamituṃ+kamu+ṇa»
upasaṅkami : [aor. of upasaṅkamati] approached
tāvatā : [adv.] so long; on that account; by that much, tāva: [in.] so much; so long; as far as
balamattā : [f.] a little strength
yāvatā : [ind.] as far as; in comparison with
alaṃ : [ind.] enough! have done with! stop! (adj.), able; suitable
iminā ,指示代名词
pūtikāya: [m.] the body which contains foul thing, pūti : [adj.] rotten; putrid; stinking
diṭṭha: [pp. of passati] seen; found; understood. (nt.), vision
즉 왁깔리는 세존을 보려 했는데(dassanā) 힘없어 못보았고 이제 세존을 친견합니다(dassanā) 라고하니까
세존께서는 무상한 몸(pūtikāyena)을 보아(diṭṭhena) 무엇하겠느냐라고 물으시며
법을 보는(passati) 자는 나를 보고(passati)
라고 하시니 이는 '나'가 세존의 법신(?)을 지칭한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법신의 개념은 초기 불교 경전에는 없지 않나요? 대승의 개념이 아닌가요?)
하지만 제가 위 문장을 해석해 본다면
충분하다 와칼리여, 이 스러져가는 몸을 친견하려 하느냐?
법을 보는 자는 '(스러져 가는) 나'라는 것을 보고 '나'라는 것을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즉 '나'를 에서 나는 세존의 무상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말씀은 적절하게 중의적인 즉 두 의견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직 공부가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읽은 바에 따르면 세존께서는 '나'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글 니까야에는 '나'라는 말이 많이 나타나지만 팔리어 경전에서는 세존께서 주어를 나로 나타내는 경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착각이라면 한번 논박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사한 표현이 M28 코끼리 자취에 비유한 큰 경 §27에 나타납니다.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
이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면 앞서 말씀드린 나를 본다는 것은 오온을 본다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 잘못된 '나'라는 개념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즉 위 말씀을 하시고는 뜬금없이(?^^) 오온 (나라는 개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은 결국 연기란 오온의 진행과정이며
이 오온의 진행과정을 나라고 부른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세존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온)은 연기된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욕망하고 집착하고 경향을 갖고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발생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벗들이여, 이렇게 되면, 그 수행승들에게 많은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연기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보는 것일까요?
연기법이란 숙명통과 천안통을 얻으신 세존께서 직접 확인하신
세상이 작용하는 이치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작용의 원인 혹은 결과가 '나'라는 잘못된 한 생각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법을 볼 때 나라는 오온을 보고, 나라는 오온을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Dhammañhi, vakkali, passanto maṃ passati; maṃ passanto dhammaṃ passati.
passanta: [pt.p. of passati] seeing; finding; understanding
즉 나(maṃ)란 부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을 뜻한다.
S22:87 왁깔리 경(Vakkali-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왁깔리 존자는 도기공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왁깔리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3.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세존께 가시오. 가서는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고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시오. 그리고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여쭈어 주시오.”
4.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5. 그때 세존께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왁깔리 존자에게로 가셨다. 왁깔리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몸을 움직이며 일어날려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만 가만히 있거라, 왁깔리여. 침상에서 움직이지 말라. 여기에 마련된 자리가 있구나. 나는 앉아야겠다.”
6.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왁깔리여, 어떻게 견딜만한가? 그대는 편안한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차도가 없다고 알아질 뿐입니다.”
7. “왁깔리여, 그대는 후회할 일이 있는가? 그대는 자책할 일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후회할 일이 적지 않고 자책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왁깔리여, 그러면 그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왁깔리여, 만일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자책하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러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몸은 이제 세존을 친견하러 갈만한 힘마저도 없습니다.”
8.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9.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 인식은 … 형성은 …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0. “왁깔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11. “왁깔리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2. 그때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법을 설하시고 격려하시고 분발하게 하시고 기쁘게 하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독수리봉 산으로 가시었다. 그러자 왁깔리 존자는 세존께서 나가신지 오래되지 않아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나를 침상째 들어서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옮겨다 주시오.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집안에서 임종할 생각을 하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왁깔리 존자를 침상째 들어서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옮겨다 놓았다.
13. 그때 세존께서는 그날 밤을 독수리봉 산에서 머무셨다. 그날 두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독수리봉 산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원만하게 해탈한 사람으로 해탈할 것입니다.”
두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린 뒤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거기서 사라졌다.
14. 세존께서는 그 밤이 지나자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왁깔리 비구에게 가라. 가서는 왁깔리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라. ‘도반 왁깔리여, 세존의 말씀과 두 천신의 말을 들으시오. 도반이여, 어젯밤에 두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독수리봉 산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원만하게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라고.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임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15.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한 뒤 왁깔리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왁깔리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왁깔리여, 세존의 말씀과 두 천신의 말을 들으시오.”
그때 왁깔리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오시오, 도반들이여. 나를 침상에서 내려 주시오.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분 세존의 교법을 들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왁깔리 존자를 침상에서 내려놓았다.
16. “도반이여, 어젯밤에 두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독수리봉 산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원만하게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라고.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임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17.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려주시고,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드려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느낌은 … 인식은 … 형성은 … 의식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물러갔다.
18. 그러자 왁깔리 존자는 비구들이 물러간 지 오래지 않아서 칼을 사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 그때 비구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이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느낌은 … 인식은 … 형성은 … 의식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20.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자. 거기서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가 칼을 사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가 침상 위에서 몸통이 거꾸로 된 채로 엎드려 있는 것을 보셨다.
그 무렵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각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21. 그러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각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은 사악한 마라가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의 의식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라고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의 의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는 의식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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