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량심은 분노와 괴로움을 일으키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아닐까?
사무량심이란 자비희사이다.
mettā (자애)
karuṇā (연민)
muditā (만족)
upekkhā (평정)
그리고 자비희사에 대응하는 개념은
경(M55 지바까의 경 (Jīvakasutta))의 내용을 추론해 보고 논리적으로 보아도 다음과 같다고 판단된다.
mettā (자애) ↔ byāpāda (악의)
karuṇā (연민) ↔ vihiṃsā (폭력)
muditā (만족) ↔ arati (불쾌)
upekkhā (평정) ↔ paṭigha (분노)
일반적으로 muditā는 희로 번역되는데, 빨리어 원문을 보다가 보니 muditā를 함께 기뻐한다는 憙라기 보다는 만족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이란 주어진 경계를 불평없이 받아들임이라고 생각한다. 만족해서 기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만족과 기쁨은 다른 내용이 아닐까? 기쁨은 만족의 결과이지 만족 그 자체는 아니다.
muditā를 희로 번역하다 보니까 대승 쪽에서는 ‘남의 즐거움에 기뻐하는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오게 된 것은 아닐까?
만족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어떤 주변 환경이,
그것이 세간의 기준으로 얼마나 쓰라린 괴로움일지라도,
그것을 불평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는 muditā는 희 보다는 육바라밀의 인욕(khanti)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
제 짧은 생각으로는
사무량심이란 자애를 일으키는 수행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희사는 자애의 마음이 생겨나게 하는 순서로 보인다.
그 내용을 설명해 보자!
우리에게 '나'라는 개념이 멀쩡하게 살아있다면
어떤 일을 경험할 때
마음 깊숙이라도 내재하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한
남에게 자애를 보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즉 나와 남이 구분이 확실하다면
내가 소위 무조건적인 사랑을 남에게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내게는 슈바이쳐가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대체 그는 왜 아프리카로 떠났을까?
의사에 올갠도 잘 쳤고 지식인이며 그 사회에서 잘 살 수 있던 그가
왜 아프리카 오지로 갔단 말인가?
그 당시 제 결론은 '그 선택 역시 자기만족 때문이었다.'라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은 오감의 만족에서 자기 만족을 찾는데
슈바이쳐는 그 만족을 남을 도와주는 데서 찾았다는 점에서
나는 그를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 내겐 '사랑'이란 말이 잘 와 닿지 않았었다.
남을 도와주는 것에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슈바이쳐가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이제 40년이 지나 사무량심을 생각하다 다시 그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사무량심에서 연민은 나와 다른 존재(남)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우리 존재 혹은 삶의 방식에 대한 연민이 아닐까 한다.
너와 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삶에 방식에 대한 연민이다.
(동체대비)
불교적으로 이야기해 본다면
나란 존재가 지금 겪고 있는 일(괴로움)이란
세세생생 잘못 인식한 '나'라는 한 생각때문에
계속 반복되어 유전되면서 일어나는 것으로
원인과 시비를 가려서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란 것이다.
어떤 때는 가해자로, 어떤 때는 피해자로 혹은 방관자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것이다.
그런데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보니
그 모든 것이 무명에 가로막혀 일어난 일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야 비로서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도를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는
괴로움의 발생 원인도 모르면서
행복을 추구한다면서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바라다보면,
특히 노골적으로 그런 것을 부끄러움 없이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비록 그가 내게 괴로움을 줄지라도
그 존재를 내 과거 생의 모습으로 바라다보며
연민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민을 느끼는 사람도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면
또 다시 내게 괴로움을 준 사람 및 상황 (경계)을 불쾌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만족(muditā)이 아닐까?
그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상황이, 세간의 기준으로, 얼마나 아프고 쓰라리며 가슴을 파고드는 괴로움일지라도
불쾌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지 비로서 마음의 평정이 나타나지 않을까?
주어진 상황에 대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만족을 통해서 마음의 평정을 얻게되고
이제야 비로서 자애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러한 자애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어야
비로서 사선정에 들어갈 수 있는 흔들림 없는 마음이 준비가 되는 것은 아닐까?
사무량심으로 세상을 가들 채운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임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주객이 분리가 되지 않아야, 무량해야 가능한 것이다.
사무량심을 닦으면 '하느님 세계와 함께하는 길'이 된다고 알려 주시고 있다.
M97 다난자니 경 (Dhanañjānisutta)
§46 자비희사; 자애 慈-metta 연민 悲-karuṇā 喜-muditā 捨-upekkhā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慈-metta]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이것도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입니다."
M99 쑤바의 경 (Subhasutta)
§34~36 쑤바는 세존께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길을 여쭤본다.
§38 사무량심을 설해 주신다.
M40 앗싸뿌라 설법의 작은 경 (cūḷāssapurasutta)
사무량심을 수행을 하는 이유를
사무량심을 닦아 안으로 고요함을 얻는 것은 수행자로서 올바로 사는 길을 실천하는 것이다.
§28~31 자비희사 사무량심 수행
"그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문다."
연민- 기쁨-평정에 대하여 반복.
M62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큰 경
사무량심(慈悲喜捨)의 명상
자애(慈)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성냄이 끊어진다.
연민(悲)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적의가 끊어진다.
즐거움(喜)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불쾌가 끊어진다.
평정(捨)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혐오가 끊어진다.
이러한 내용은 사무량심이 사선정에 들어가기 전에
오장애의 하나인 악의를 해결하고 분노와 괴로움을 일으키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