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세존께선 왜 고행을 극단이라고 하셨을까요?

우암(雨庵) 2015. 2. 21. 12:26

세존께서는 왜 고행을 극단이라 하셨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고행이란 변치않는 나(atta)를 근거로 한 수행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보려면

'왜 사람들은 고행을 수행방법으로 삼았을까?'를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아니 동물조차도

언제나 감각적인 즐거움을 찾아서 살아갑니다.

배고프면 먹어야하고 졸리면 자야하고 성욕이 올라오면 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생각의 능력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데

자신이 원하는 바를 구현하기 위해서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갈등이 발생되게 됩니다.

그래서 대체 이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자는 누구일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갈등을 원하지는 않는데 '무엇인가'는 내게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내 마음 속에서 나에게 감각적인 즐거움을 충동질 시키는 그것은 무엇인가?

내게 자아가 있다면 바로 이 자아가 나에게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라고 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자아'를 길들여보면 어떨까?

내가 내 자아를 길들일 수 있다면 이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올라오는 충동을 제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동물이 내 말을 듣도록 길들이는 방법은 채찍질(고통)이다.

따라서 내 자아에게도 채찍질을 해 보자. (고통을 통해서 자아를 길들여보자.)

그래서 그 '놈'이 내 말을 듣도록 하게 해보자

하는 생각이 고행이란 수행을 받아들이게 된 근거가 아닐까요?

 

세존께서는 죽음 직전까지 고행을 해 보십니다.

그러나 그 고행을 통해서는 구하시는 바를 얻지 못하십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나란 존재는 연기의 존재이지 항상 변치 않는 불변하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길들이려는 존재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을 존재 자체가 없는데 따라서 아무리 고행을 해도

길들여질 존재가 없는데 계속 고행을 한다는 것은 효과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행이란 

'변치 않는 존재'를 가정한 수행이기 때문에

즉 극단의 견해를 수용한 수행법이기 때문에

극단이고 중도가 되지못합니다.

또한 무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