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는 열반 후에 대해서 구체적인 '존재'로 언급하시지 않았습니다.
열반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신 것은 '오온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입니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물질-느낌-지각-행위-의식; 우리의 삶)입니다.
따라서 열반이 락이라는 주장은
락이 즐거운 느낌이므로
열반을 느낌의 범주에 들어가게 하므로
이 주장의 타당성은 좀 애매해 보입니다.
니까야에서 열반을 락으로 표현한 예는 제가 본 바로는 없었고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열반에서의 락을 고통이 없음으로 본다면 그 표현은 맞겠지만
느낌인 희(삐띠)와 락(수카)으로 본다면 그건 이상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니까야에서 나타나는 락(느낌)은 열반을 얻는 '과정(선정)'에서 나타납니다.
욕망을 여읨의 즐거움 (nekkhammasukha)
멀리 여읨의 즐거움 (pavivekasukhaz)
적멸의 즐거움 (upasamasukha)
올바른 깨달음의 즐거움 (sambodhasukha)
(M139. 평화에 대한 분석의 경)
열반 전단계인 상수멸정을 살펴 보더라도 수가 끊어진 상태인데
즉 락에서도 이미 풀려난 상태인데
그 보다 수승한 열반에서 락이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M72.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 세존께서는 사변적 견해(10무기)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십니다.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
그것은 싫어하여 떠나게 하기 위한 것도, 사라지게 하기 위한 것도, 소멸하게 하기 위한 것도, 고요하게 하기 위한 것도, 곧바로 알게 하기 위하 것도, 올바로 깨닫게 하기 위한 것도,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밧차곳따여, 이러한 위험을 보기에 일체의 이러한 사변적 견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 세존께서는 세상을 연기적으로 바라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밧차여, 사변적인 견해는 여래가 멀리하는 것입니다. 밧차여, 왜냐하면 여래는 참으로 이와 같이 ‘이것이 물질이고, 이것이 물질의 발생이고, 이것이 물질의 소멸이다. 이것이 느낌이고, 이것이 느낌의 발생이고, 이것이 느낌의 소멸이다. 이것이 지각이고, 이것이 지각의 발생이고, 이것이 지각의 소멸이다. 이것이 형성이고, 이것이 형성의 발생이고, 이것이 형성의 소멸이다. 이것이 의식이고, 이것이 의식의 발생이고, 이것이 의식의 소멸이다.’라고 관찰합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환상, 모든 혼란, 모든 ‘나’를 만드는 것, 모든 ‘나의 것’을 만드는 것, 자만의 잠재의식을 부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버려 버리고, 놓아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한다고 말합니다.
- 열반 후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17.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수행승이 그와 같이 마음을 해탈했다면, 어디에 다시 태어납니까?”
“밧차여,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존자 고따마여,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까?”
“밧차여,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존자 고따마여,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
“밧차여,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존자 고따마여,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입니까?”
“밧차여,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앎으로는(논리로는) 열반에 접근이 어렵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중생이 이런 견해에 이해가 어려울 것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알려주십니다.
밧차여, 그러한 말들이 그대를 의혹에 떨어지게 하고, 그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밧차여, 이 가르침은 깊고, 심오하여,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촛불의 비유를 드십니다.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이곳에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이나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 불은 섶과 나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르고, 그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으므로 꺼져버린다고 여겨집니다.”
그러시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오온으로 여래를 묘사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러시면서 여래란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는 마치 커다란 바다와 같다고 묘사하십니다.
밧차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물질(색)로써 여래를 묘사하려고 하지만 여래에게 그 물질은 끊어졌습니다. 여래는 물질의 뿌리를 끊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밧차여, 참으로 여래는 물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 해탈하여,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어 마치 커다란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수상행식으로 반복됨.
M139. 평화에 대한 분석의 경
13.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어떤 수행승은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2)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3) 희열이 사라진 뒤,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평정하게 지내고,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 있는 행복한 삶이라고 부르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4) 즐거움과 괴로움이 버려진 뒤,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을 뛰어넘고 즐거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은 욕망을 여읨의 즐거움, 멀리 여읨의 즐거움, 적멸의 즐거움, 올바른 깨달음의 즐거움이라고 불리며,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은 추구되어야 하고 증가되어야 하고 계발되어야 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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