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글들은 모두 이해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내 인생의 문제를 풀 것인가?
왜 괴로운가?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왜 집착하는가? 왜 자유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왜 외로움을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하려 하는가?
어떻게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날 것인가?
제 나름대로는 문자적, 개념적인 이해를 통해서
이 몸이 '나'가 아님을 이해했다고 하지만
더 나아가 윤회의 전체 모습에 대해서 나름 '생각'을 일으켜서 나라는 개념을 극복해 보려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이해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제가 요즘 심취해 있는 삼명의 문제도
이러한 이해에 대한 '선명도'를 흔들림없게 유지하는 체험이며
결국은 이해의 문제입니다.
어찌 보면 부처님 연기의 가르침은 이해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윤회와 연기란 결국 현상의 흐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그리고 논리의 문제란 결국 '생각'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이란 언어와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해란 결국 언어와 개념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 글 서두에서 보여드린 개념인
존재, 괴로움, 외로움, 두려움, 자유에 대한 갈망은 모두 언어의 성(城)에서 생각 끝에 드러나는 개념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제 '마음'을 물들이고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어떤 행동(行 saṅkhāra)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중생들의 모습이고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 avijjā)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가 생각을 통해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1. 나라는 개념
그 대표적인 것이 존재라는 것이고 '나'라는 개념입니다.
언어 이전에 그리고 생각 이전에 우리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와 개념을 통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와 개념 이전에도 이미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주장은 잘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나'라는 개념은 사실은 생각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꼬집으면 아픈 것은 무엇이냐? 그게 나 아니냐?
맞습니다. 그게 '나'입니다.
이런 신체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우리는 나라는 개념을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오온인 색수상행식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것을 분석적으로 표현하신 것이 오온입니다.
물질적인 대상(色)을 보고 느끼고(受) 인식해서(想) 행동하고(行) 판단하는 것(識)
이것이 우리 중생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논리의 순서상 이러한 나라는 한 생각이 있기 전에도 이미 이 '존재'는 있어왔습니다.
즉 꼬집히면 아픈 그 무엇이 언어, 개념 이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의 일부를 표현한 것이지 '그것' 자체는 아닙니다.
2. 전도된 생각
우리는 생각(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나란 개념을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 몸이 나라는 생각을 갖고 살고 있으며
이 몸을 위해서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그것 때문에 세상 온갖 일들이 발생하고 결국 윤회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삼명에서 보신 내용은 연기법이라 표현되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며 수 없이 연결되어 온 삶이란 것입니다.
바로 전생에는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았고
또 그 전 생에는 .....
하지만 이러한 연결에는 다 원인과 조건이 있음을 아신 것입니다.
만약 내게 99999의 전생이 있었고 이번 까지가 십만생이라면
대체 그 중에 진정한 '나'는 누구일까요?
우리가 현생만이 나라고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면 (그게 중생의 모습이지요.)
1/100000인 현생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격은 아닐런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할 때, 중요도가 전도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현생의 몸이 나라고만 생각하고 산다면
이는 지난 99999 생이 그러했듯이 중생의 삶을 사는 것이며 윤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꼬집히면 아픈 내가 현재 분명히 존재하지만 또한 이번 생을 경험한 '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부처님께서 오온이 '나'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존재할까요?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행위의 소유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있고 그 행위에 따른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의 소유자란 일종의 '환상'이란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내가 전생에 어떤 업을 지었다면 그 업의 소유자는 그 사람이어야 하지만
현생의 내가 그 업의 과보를 받는다면 내 존재가 그 업을 받는 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생의 존재와 전생의 존재는 같은 것일까요?
업의 상속자라는 측면에서는 같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생(衆生)의 모습입니다.
중생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 됩니다.
S23:2 Sattasutta
Rūpe kho, rādha, yo chando yo rāgo yā nandī yā taṇhā, tatra satto, tatra visatto, tasmā sattoti vuccati. Vedanāya … saññāya … saṅkhāresu … viññāṇe yo chando yo rāgo yā nandī yā taṇhā, tatra satto, tatra visatto, tasmā sattoti vuccati.
라다여, 색(色, rūpa)에 대하여 욕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환락이 있고, 갈애가 있 는데, 거기에 붙들려서 얽혀 있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한다.〔수상행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3. 부처님의 가르침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바로 그런 업의 상속자라는 것은 업으로 '조건지워 진' 것이니
그 업에서 풀려난다면 업의 상속자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무념(無念)입니다.
무념이란 이해타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해타산이나 분별은 분명한 주어(나)와 목적어(대상)가 있습니다. 가치판단이 있습니다.
이런 언어와 개념으로 표현되는 생각이 이어지는 한에는
우리 마음은 그 생각에 물들게 되고 그래서 존재니 괴로움이니 외로움이니 해방이니 등을 싸매고 고민합니다.
무념(無念)이란 청정한 물들지 않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분별을 생각을 멈춤으로써 무념(無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는 언제나 움직임 없이 우리와 함께 해왔습니다. 그래서 고경(古鏡) 혹은 고불(古佛)이라 합니다.
심해탈이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물들었던 마음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명확한 반야 지혜가 있지 않더라도 내려 놓음으로써(방하 paṇidhāya bhāvanā)
물들었던 마음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된 생각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별과 생각이 윤회의 에너지였다면
무념(無念)을 통해서 그 불을 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념(無念)은 생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불립문자입니다. 언어도단입니다.
즉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해의 문제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눈 앞의 대상에 대해 무상, 고, 무아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무념(無念)을 실천하기 위함이 아닐런지요?
무상, 고, 무아 역시 우리의 언어, 개념의 테두리 내의 일이므로
이제 그 내용을 알았다면 그 뗏목을 버리고 가야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완전한 깨달음이 있으신 분께는 이런 무념(無念)의 문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방하(放下)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잡고 들어가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욕탐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개념의 문제에서 풀려나 계실 것입니다.
nidahati :To put down, to lay aside; to deposit, hide, to bury; to enshrine, 放下, 放置, 藏置, 貯蓄
paṇidahati : [pa + ni + dah + a] aspires to; longs for; puts forth; directs, 放置在前(put forth), 定置(放置在決定了的地方),
paṇidhāna : [nt.] aspiration; determination, 願, 誓願, 願求
paṇidhāya : [abs. of paṇidahati] having aspire to; having the intention of, 热望了,有了意图
'부처님의 가르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미타불 염불과 길이 단위 미터(meter) (0) | 2015.10.20 |
---|---|
오온의 색수상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다른 표현? (0) | 2015.10.01 |
나를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기 (0) | 2015.09.23 |
마음챙김(sati)이란 무엇일까? (0) | 2015.09.22 |
안지혜명광(眼智慧明光)? (0) | 2015.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