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를 공부하면서 마음챙김(sati)란 단어를 많이 듣게 되었다.
영어로는 mindfulness로 번역이 되었다. 한문으로는 념(念)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명확하게 와 닫지를 않는다.
그 이유는 제 수행의 수준이 낮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이 자신이 이해한 만큼 sati에 대한 견해를 제시해서
오히려 그 개념이 모호해진 것일 수도 있다.^^
제가 경전에서 찾아낸 sati의 개념이란 다음과 같다.
sati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감시하는 작용'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게 된 이유는 S47:4 살라 경(Sālasutta)에서 sati를 대신해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입니다.
ekodibhūtā vippasannacittā samāhitā ekaggacittā
이 부분에 대한 각묵스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그런데 사실 위 문장은 sati의 개념을 설명한 것이라기 보다는
sati의 결과 나타나는 상태라고 보여집니다. 즉 sati를 한 결과 그렇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제가 위 문장이 sati의 결과라고 보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경전에서 사념처를 설명할 때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근면하게(ātāpino) 분명히 알아차리고(sampajānā) 마음 챙기면서(satimā) 머문다.'
로 나타나는데 반해서
S47:4 살라 경(Sālasutta)에서는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몸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 머문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sati의 결과가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분별을 벗어나 삼매에 들게 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sati란 무엇이길래 이런 결과를 낳게 한다는 말일까요?
그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위와 같은 분석에서 남는 한 가지 의문은
sati란 그냥 sati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의 수식을 받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점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란 '분별에서 벗어나서'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sati란 우리가 대상을 감각할 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감시하는 작용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S35:245 낑수까 나무 비유 경(Kiṁsukopamasutta) 때문입니다.
이 경에서는 sati를 성을 지키는 문지기에 비유합니다.
문지기는 도시(몸)의 육문(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문을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문지기의 역할의 결과가 S47:4 살라 경(Sālasutta)에 나와있는 것과 같이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상에 휩쓸려 나가지 말아야 하며 (사마타)
만약 나가려 한다면 그 마음을 다시 돌이켜 잡아들여야 합니다. (위파사나)
그러한 감각기관에 인지된 대상에 대해
마음이 일어나고, 마음이 휩쓸려 나가는 것을 알아차려서 되돌이키는 작용이 바로 sati라는 것입니다.
한편 S47:4 살라 경(Sālā-sutta)에서는 신참 비구,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유학, 아라한에 대해서 사념처를 대하는 방법이 다름을 알려주십니다.
신참 비구: 몸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머문다. (kāyassa yathābhūtaṃ ñāṇāya)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유학: 몸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 머문다. (kāyassa pariññāya)
아라한: 몸에 초연한 채 머문다. (kāyena visaṃyuttā)
이 서술은 '신수심법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하고 생각하게 해 주는 대목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 전까지는 저는 신수심법이란 오온 중에서 색수상식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몸을 관찰한다 (kāyānupass 身隨觀 및 受心法 隨觀)를 현재 내 몸(느낌, 마음, 대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한다로 보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삼명에 대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진 다음에는
이 신수심법이란 전생의 것도 포함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군요.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사념처란 어찌 보면 숙명통을 얻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서 몸을 본다는 것은 전생의 몸을 보고 거기에 대해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sati함)을 뜻하고
느낌에서 느낌을 본다는 것도 당시의 상황에서의 느낌을 느낄 뿐 '나'의 느낌이란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sati함)
마음으로 마음을 본다는 것도 당시의 마음으로 알 뿐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sati함)
대상에 대한 판단에서 대상에 대한 판단을 본다는 것도 당시의 마음대상에 대한 판단으로 알 뿐 '나'의 자아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sati함)
이런 이해가 생겼습니다.
물론 당연히 현생에도 적용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S47:28 세상 경에서는 큰 신통지혜가 사념처를 확립하고 많이 공부했기 때문이라는 아누룻다의 답변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생의 안이비설신의가 내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즉 현생이라는 것은 수 많은 과거 전생의 과보이기 때문에
만약 현생에 주어진 조건에만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연을 그대로 받게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시말해 현생의 주어진 조건에서 내 몸을 이롭게 해 보려는 중생의 시도는
한도 없고 끝도 없는 중생의 고해를 윤회하는 업을 짓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나의 영역과 남의 영역이란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나의 영역이란 내가 쌓아 놓은 업의 영역입니다.
남의 영역이란 그 나와 남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 놓은 사건이 벌어지는 영역입니다.
만약 내 인생의 사건에 집중을 한다면 이는 결국 내 일은 해결도 못하고
또 다시 남과의 사건에 얽혀서 업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매에 들어서 삼명을 얻게 된다면
그간 쌓여있던 업에 대해 이해를 하고
그래서 업에서 풀려나는 길을 걷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념처란 바로 그렇게 하려면 sati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매에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 삼매의 모습이 'ekodibhūtā vippasannacittā samāhitā ekaggacittā' 입니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념처의 빨리어는 Paṭṭhāna인데 그 사전적인 의미에는 setting forth, putting forward이란 뜻도 있지만 “origin,” starting point, cause란 뜻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시작점이란 말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satipaṭṭhāna란 시작 점을 sati하라는 뜻도 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화두(話頭)도 말의 머리란 뜻이니 역시 생각의 처음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안과 밖이라는 개념도
안은 전생의 업연이고 밖은 현생의 업연이라 볼 여지도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안과 밖에 대해서라고 한다면 전생에서 기인한 현생의 업연이라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제 상상이 많이 작용한 이해임을 당연히 강조드립니다.
그러나 완전히 상상만 한 것은 아니고 경전적인 근거는 있습니다.
S35:189-197을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눈은 무아였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은 과거의 내 모습도 내가 아니고 현생의 내 모습도 내가 아니고 미래의 생 역시 내 모습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눈 (인식: 감각작용(육입)+식)도 내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_()_
S47:4 살라 경(Sālā-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꼬살라에서 살라라는 바라문 마을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근래에 이 법과 율에 들어온 신참 비구들이 있나니, 그들이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닦는 것에 대해서 유념하도록 해 주어야 하고 들게 해 주어야 하고 확고하게 머물도록 해 주어야 한다. 무엇이 넷인가?”
4. 그것은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시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몸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머무시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머무시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느끼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머무시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무시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머무시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무시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법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머무시오.’라는 것이다.”
5. “비구들이여, 아직 마음의 이상인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유학들이 위없는 유가안은(열반)을 원하며 머무나니, 그들도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몸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머문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느낌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마음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법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 머문다.”
6. “비구들이여, 아라한들은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부수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하였나니, 그들도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몸에 초연한 채로 머문다. 그들도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느낌에 초연한 채로 머문다. 그들도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마음에 초연한 채로 머문다. 그들도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법에 초연한 채로 머문다.”
7. “비구들이여,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근래에 이 법과 율에 들어온 신참 비구들이 있나니, 그들이 이러한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닦는 것에 대해서 유념하도록 해 주어야 하고 들게 해 주어야 하고 확고하게 머물도록 해 주어야 한다.”
S35:245 낑수까 나무 비유 경(Kiṁsukopama-sutta)
"어떻게 해서 비구의 봄[견(見)-dassana]은 아주 청정하게 됩니까?"
§8. "비구여, 예를 들면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는 깊은 해지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여섯 개의 대문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지혜롭고 슬기롭고 현명한 문지기가 있어, 모르는 자들은 제지하고 아는 자들만 들어가게 한다.
그때 동쪽으로부터 재빠른 전령 두 명이 달려와서 그 문지기에게 '여보시오, 지금 이 도시의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말하면 그는 '지금 그분은 중앙 광장에 앉아 계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 재빠른 전령은 성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때 서쪽으로부터 … 북쪽으로부터 … 남쪽으로부터 … 보고를 한 뒤 들어온 길을 따라서 되돌아 갈 것이다."
§9. "비구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여, 도시라는 것은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두고 한 말이니
이 몸은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여, 여섯 개의 대문이란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문지기(Dovāriko)란 마음챙김(sati-념(念)-알아차림)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재빠른 전령 두 명이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성주는 알음알이[식(識)]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중앙 광장이란 네 가지 근본물질을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이다.
비구들이여, 있는 그대로의 말씀이란 열반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들어온 길이란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를 두고 한 말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Upamā kho myāyaṃ, bhikkhu, katā atthassa viññāpanāya. Ayañcettha attho:
‘nagaran’ti kho, bhikkhu, imassetaṃ cātumahābhūtikassa kāyassa adhivacanaṃ mātāpettikasambhavassa odanakummāsūpacayassa aniccucchādanaparimaddanabhedanaviddhaṃsanadhammassa.
‘Cha dvārā’ti kho, bhikkhu, channetaṃ ajjhattikānaṃ āyatanānaṃ adhivacanaṃ.
‘Dovāriko’ti kho,bhikkhu, satiyā etaṃ adhivacanaṃ.
‘Sīghaṃ dūtayugan’ti kho, bhikkhu, samathavipassanānetaṃ adhivacanaṃ.
‘Nagarassāmī’ti kho, bhikkhu, viññāṇassetaṃ adhivacanaṃ.
‘Majjhe siṅghāṭako’ti kho, bhikkhu, catunnetaṃ mahābhūtānaṃ adhivacanaṃ– pathavīdhātuyā, āpodhātuyā, tejodhātuyā, vāyodhātuyā.
‘Yathābhūtaṃ vacanan’ti kho, bhikkhu, nibbānassetaṃ adhivacanaṃ.
‘Yathāgatamaggo’ti kho, bhikkhu, ariyassetaṃ aṭṭhaṅgikassa maggassa adhivacanaṃ, seyyathidaṃ– sammādiṭṭhiyā … pe … sammāsamādhissā”ti.
S35:192 과거∙현재∙미래의 안의 무아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2.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과거의 눈은 무아였다. 과거의 귀는 무아였다. 과거의 코는 무아였다. 과거의 혀는 무아였다. 과거의 몸은 무아였다. 과거의 마노는 무아였다.
4.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귀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코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혀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몸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마노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을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S35:193 과거∙현재∙미래의 안의 무아 경
2.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미래의 눈은 무아일 것이다. 미래의 귀는 무아일 것이다. 미래의 코는 무아일 것이다. 미래의 혀는 무아일 것이다. 미래의 몸은 무아일 것이다. 미래의 마노는 무아일 것이다.
4.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귀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코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혀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몸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마노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을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S35:194 과거∙현재∙미래의 안의 무아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2.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현재의 눈은 무아이다. 현재의 귀는 무아이다. 현재의 코는 무아이다. 현재의 혀는 무아이다. 현재의 몸은 무아이다. 현재의 마노는 무아이다.
4.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귀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코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혀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몸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마노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을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S47:28 세상 경(Lok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사리뿟따 존자와 마라 목갈라나 존자와 아누룻다 존자는 사께다에서 깐따끼 숲에 머물렀다. …
3. “도반 아누룻다여, 아누룻다 존자는 어떤 법들을 닦고 많이 학습했기 때문에 큰 신통의 지혜를 얻었습니까?”
“도반이여, 저는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학습했기 때문에 큰 신통의 지혜(mahābhiññataṃ)를 얻었습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뭅니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뭅니다. 마음에서 마음에서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뭅니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뭅니다.
도반이여, 저는 이러한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학습했기 때문에 천(千)의 세상을 신통으로(abhijānāmī)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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