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는
(괴로움의 파도가 휘몰아 치는 고해의 바다에서)
나라는 섬(Attadīpā) 그리고 법이라는 섬(dhammadīpā)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나라는 것이 피난처이고 다른 것이 피난처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법이 피난처이고 다른 피난처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Bhikkhus, dwell with yourselves as an island, with yourselves as a refuge, with no other refuge; with the Dhamma as an island, with the Dhamma as a refuge, with no other refuge.
Attad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viharatha = ( vihara + atha ) atha 主动态(act.)%复数(p.)%现在式(pr.),祈使/命令(imp.)%人称(2)
vihāra: 'abode'
saraṇa : [nt.] protection; help; refuge; a shelter 피난처
añña : 'other', being of the opposite category
anañña : na+añña
vihāra: 'abode'
saraṇa : [nt.] protection; help; refuge; a shelter 피난처
añña : 'other', being of the opposite category
anañña : na+añña
이미 전에 이 내용을 한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새로 더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더 올려 봅니다.
이 말씀은 '나'라는 것을 철저히 공부해서 풍랑이 치는 고해에서 섬처럼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것'을 철저하게 공부하는 방법은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법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국 '나(atta)'라는 것에 대해서 철견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나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나를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감각기관으로 경험한 경험의 집합체로 '나'라는 것을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고 봅니다.
세존께서는 중생인 우리가 나(atta)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S24:9 세상은 영원함 경(Sassataloka-sutta)
§6 본 것(안 diṭṭhaṃ), 들은 것(이 sutaṃ), 감각한 것(비설신 mutaṃ), 인식한 것(의 viññātaṃ), 얻은(획득한) 것(pattaṃ), 탐구한 것(pariyesitaṃ), 마음으로 고찰한 것(anuvicaritaṃ manasā)
Yampidaṃ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tampi niccaṃ vā aniccaṃ vā
부처님 께서는 보다 분석적으로 이 나라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게 색수상행식의 다섯 무더기 오온입니다. 우리는 중생이므로 오취온이 되겠지요.
제가 오온이 우리 경험의 집합체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경험하고(색온), 그래서 대상에 대한 느낌을 경험하고(수온), 그 느낌에 대해서 (우리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경향성을 경험하고(상온), 그래서 행동을 하고(행온), 그 행동에 대한 판단하고 기억으로 기록을 하게 됩니다(식온).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경험 무더기의 집합체를 우리는 '나'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를 제대로 공부한다면
풍랑이 휘몰아 치는 바다에서 흔들림없는 섬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안다는 것은 오온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통해서 오온이 '내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서 '내가' 겪는 고통을 벗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그 '나'라는 것을 반야지혜로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 공부법이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법(dhamma)'이며 따라서 우리는 법을 섬 삼아서 고해를 건너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설법을 해 주시고는 바로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따라서 사념처 수행이란 '나라는 것'을 알아가는 수행입니다.
신수심법이란 몸(kaya), 느낌(vedana), 마음(citta), 법(dhamma) 입니다.
사념처란 우리가 알고 있는 오온에서 색수상식을 공부의 도구 삼아 수행하는 것입니다.
오온에서 행(saṅkhara)이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행이란 이미 '나'라는 존재가 전재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12연기에서도 무명 때문에 행을 한다고 하니 행은 수행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깨달음에 도달한 분들은 무위(無為 asaṅkhata)의 행을 하시므로 행은 수행의 수단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것'을 공부한다는 것은 오온 중에서 신수심법(색수상식)을 따라서 관찰(anupassati, 隨觀)하는 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공부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 나를 찾아서(자성을 보아서^^) 섬과 같은 흔들림이 없는 피난처를 찾으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래서 세존께서는
자신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셨다. 또한 법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셨다. 또한 법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세존의 가르침의 배경에서는 큰 전재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세상살이의 고통이 크면 클 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까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나라는 것'에 대한 공부일 것입니다.
한문으로는 이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네가지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가 고집멸도(苦集滅道)인 것입니다.
인생의 괴로움을 맛 보고(苦) 그 원인을 찾게되고(集), 그래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滅).
그리고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道)이 바로 팔정도인 것입니다.
인생의 괴로움이란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에 기반합니다.
내가 어찌되어야 하는데(탐심) 그게 이루어 지지 않을 때 우리는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그걸 이루어 보려하다가(치심) 성을 내고 합니다(진심).
과연 그 나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지도도 없이 수행을 하셔서 연기법을 찾았습니다.
'나'라는 것이 조건지워져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인생에서 겪는 일들이 모두 조건 지워져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명지를 보신 것입니다.
내 전생을 모두 아는 숙명통 및 남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천안통을 통해서
윤회가 연기임을 아신 것입니다.
이러한 최상의 지혜(abhiññā)를 통해서 수만생을 살아온 업의 상속자에게는 과연 '나'란 무엇일까요?
현생의 내가 겪는 기쁨, 슬픔, 분노, 환희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들이 모두 조건지워져 있다면 과연 현생의 일희일비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눈 앞에서 펼쳐지는 사건에 대해서 연민과 자애를 느끼셨을 것이고
그래서 번뇌를 모두 제거하시는 누진지를 얻으신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상태에 도달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번에 이해한 '나라는 것'을 공부해서 섬으로 삼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_()_
S22:43 자신을 섬으로 삼음 경 (Attadīpā-sutta)에서
세존께서는 우리가 괴로움의 근원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서 atta가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세존께서는 우리가 괴로움의 근원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서 atta가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나라는 섬(Attadīpā)이란 괴로움의 근원자리인 atta를 공부해서 괴로움의 고해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평화로운 섬이되게 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다른 것이 피난처가 아니다.'라는 말씀은
나라는 것을 철견하는 것 외에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귀의처로 번역되는 saraṇa는 어원적으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saraṇa : [nt.] protection; help; refuge; a shelter, 帰依, 帰依所, 隠家
araṇa : [adj.] peaceful; passionless, 已遠離(村落)的, 無諍
raṇa : [nt.] war; battle; sin; fault, 争論, 諍, 諍乱
sa는 함께하는 이라는 뜻이 있으니 saraṇa는 평화로움과 함께하는 곳이니 귀의처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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