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먼저 제가 이해한 증오(證悟)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겠습니다.
증오란 말 그대로 증득해 깨닫는 것입니다.
증오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증오에 대비되는 해오(解悟)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해오란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성제 즉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이해하고(깨닫고; 견해의 구족)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수행방법을 통해서 열반의 경지(궁극적인 진리)로 수행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수행 방법은 이미 이 전 글에서 정리한 바 있습니다.
육근수호-사무량심-선정-삼명을 통한 번뇌의 소멸 등으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일대사인연(전생의 모든 인연)을 (삼매에서) 살펴보아 '이해'함으로써 모든 묶임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증오(證悟)란 이러한 인연의 얽키고 설킴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마음 상태를 해오의 최종 마음 단계와 같이 가져가서
지금 여기에서 진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최종 단계란 육조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무념(無念)'입니다.
다시말해 이해를 통해서 묶여있는 것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혜해탈)
묶인 것 자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번뇌의 불을 꺼버리는 열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이 꺼졌다는고 하는 것은
인과의 이해를 통해서 더 이상 연료를 공급하지 않을 수 있게 될 수도 있지만
생각이 멈춘 자리로 들어감으로써 번뇌라는 불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생각의 멈춤 자리로 들어가는 방법의 획득이(구족)
증오(證悟)라고 하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의 방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미 초기경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증오(證悟)로 향하는 방법의 이해가 중국의 선불교(禪佛敎)를 탄생시킨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무념의 경지는
말이 멈추고 개념과 가치판단이 멈춘 자리이기 때문에 언어적인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말을 하려는 순간 이미 그 경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는 해오의 최종 경지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두 경지의 궁극은 같기 때문입니다.
해오에서는 인연의 과보(연기)를 이해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기술됩니다.
그래서 선정을 통해서 나의 전생을 모두 보게 되고 (숙명통) 남의 운명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천안통)
반면에 증오에서는 수행 과정이 '생각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간화선이겠지요.
마치 생각이란 쥐를 소 뿔 안으로 몰아서 꼼짝달삭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화선에서는 경전 공부나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을 '알음알이'라고 경원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해란 모두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최종 목표가 무념인 사람이
무념을 얻겠다고 무념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니 이게 말이 되는가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해오의 관점에서는 인과의 이해 없이는 눈 앞에 일이 납득이 되지 않으므로 생각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과를 다 보고 나서 존재의 '완전한 이해'를 통해서 더 이상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마조스님께서는 이것을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고 하신 것입니다. ^^
따라서 증오에서는 어떻게 마음을 무념으로 가져가느냐가 관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다시 조사선과 간화선으로 갈릴 수 있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아직 제가 이 부분은 정리가 되질 않아서 정리가 되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초기경전을 공부하는 제 입장에서는
간화선을 수행하는 분들이 이상해 보였는데
그 이유는 초기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명 타파에 핵심인 삼명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
간화선 수행자들에게는 보이질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삼명 없이 무명을 타파한다는 말인가?'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이 생각을 일으켜 보니 간화선에서는 삼명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겠구나하는 이해가 생겼습니다.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아래의 두 경은
바로 이런 증오(證悟)라는 개념이 나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경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다시말해 증오라는 개념 역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란 의미입니다.
먼저 A9:36 선(禪) 경에서는 번뇌의 소멸이 초선 ~비상비비상처 어디에서도 일어난다고 알려주십니다.
이 가르침은 번뇌가 다하는 것은 순서가 있다는 말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초선에서도 열반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는 이런 (초선 등의 경지의)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不還者]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ṃ upasaṃharati: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So tattha ṭhito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No ce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teneva dhammarāgena tāya dhammanandiyā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opapātiko ho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Paṭivāpeti ,[Caus. of paṭi+vap] to turn away from, to free from, cleanse, 脱(free from), 弄乾淨洗淨(cleanse); 씨 뿌리고 풀베는 반대 방향으로 가다. 즉 자라지 못하게 하다란 의미?
Vāpeti,[Caus. fr. vap, representing vapati1 as well as vapati2] to cause to sow (씨 뿌리다) or to mow (풀을 베다) -- pp. vāpita
amatāya dhātuyā : 죽음이 없는 경지, 무념의 경지, 진리의 경지
upasaṃharati : [upa + saṃ + har + a] collects; focuses; concentrates; compares, 集める, 置く, 集中する
paṇīta : [adj.] excellent; delicious
upadhi : [m.] substratum of re-birth; attachment, 存在の基礎, 生の素質
puṇāti: [pu + ṇā] cleans; sifts
pāpuṇāti : [pa + ap + uṇā] reaches; attains; arrives at, 得る, 達す, 到達す
opapātika : [adj.] arisen without visible cause; born spontaneously [= upapātika] 化生的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amatāya dhātuyā 입니다.
그 의미는 죽음이 없는 계(界)이고 항상 우리와 함께하는 경지입니다.
여기에 머무르면 (차제에 무관하게) 번뇌가 소멸한다고 알려주십니다.
저는 이것이 증오(證悟)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이 불사의 경지에 대한 설명이 그 다음 경인 A9:37 아난다 경에 나타납니다.
인식이 있는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인식이 없는 자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Saññīmeva kho, āvuso, tadāyatanaṃ no paṭisaṃvedeti, no asaññī”ti.
즉 인식이라는 것으로는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식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다.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닙니다. 그것을 떠남입니다.
그래서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눈도 있을 것이고 형상들도 있지만 그 형상들의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리고는 그 경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십니다.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냄을 밀쳐내지 않으며,
애써 노력하여 오염원들을 제지하고 방해한 상태가 아니고,
해탈했기 때문에 확고하며,
확고하기 때문에 지족하고,
지족하기 때문에 안달하지 않는 이 삼매는 완전한 지혜를 결실로 가진다고 (aññāphalo)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yāyaṃ, bhagini, samādhi na cābhinato na cāpanato na ca sasaṅkhāraniggayhavāritagato,
vimuttattā ṭhito,
ṭhitattā santusito,
santusitattā no paritassati.
Ayaṃ, bhagini, samādhi aññāphalo vutto bhagavatā
abhinata : [pp. of abhinamati] bent; bowed down to
abhinamati : [abhi + nam + a] bends; bows down
namati : [nam + a] bends; bows down
Apanata ,[pp. of apanamati] “bent away”, drawn aside
Apanamati ,[semantically doubtful] to go away
niggayha : [abs. of niggaṇhāti] having rebuked; having censured; having restrained
niggaṇhāti : [ni + gah + ṇhā] rebukes; censures; restrains, 抑止, 折伏, 論破, 叱責
gaṇhāti : [gah + ṇhā] takes; holds of; seizes, 取る, 捕える
vārita : [aor. of vāreti] prevented; obstructed; hindered, 防止されたる
vāreti : [var + e] prevents; obstructs; hinders, 避免 ,阻隔,阻碍
santusita: pleased; happy. (see santuṭṭha: 刪兜率, 善知足, 都率天 ), 已取悦,已快乐
paritassati: [pari + tas + ya] is excited or worried; shows a longing after, To tremble, be afraid, 苦(煩)惱
제 번역:
비구니여, 이 삼매는 끌어당기지도 밀치지도 않으며
행위를 억제하는 것도 아니다.
해탈하여 머물고
머물러서 만족하고
만족해서 안달하지 않는다.
비구니여 이 삼매는 진리의 결실을 맺는다라고 세존께서 말씀해주셨다.
이 가르침에서 주목할 점은
오염원을 제지하고 방해한 상태가 아니라고 하신 점과
해탈해서 확고하고 확고해서 지족하고 지족해서 안달하지 않는 이라는 부분입니다.
특히 점수(점수)에서라면 그 순서가
오염원 제거 -> 안달하지 않음 -> 확고 -> 해탈 로 서술될 터인데
이 경에서는 그 반대로 먼저 해탈을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오의 무념의 경지가 아닐까 합니다.
한편 이런 말씀을 하신 후에 다시 언어의 속임수를 경계하십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Evaṃsaññīpi kho, āvuso, tadāyatanaṃ no paṭisaṃvedetī”ti
저는 이 아난다 경이 선불교의 기반이 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_()_
상황이 이렇다면 해오도 부처님의 설법이고 증오 또한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그리고 진리 자리로 가는 방법이 다를 뿐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제게는 보입니다.
A9:36 선(禪) 경 (Jhāna-sutta)
1. “비구들이여, 초선(初禪)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2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3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4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비상비비상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2. “‘비구들이여, 초선(初禪)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떠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不善法) 멀어져,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를 지닌, 떠남(離)에서 생겨난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不還者]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떠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를 지닌, 떠남(離)에서 생겨난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초선(初禪)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3. “‘비구들이여, 제2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제3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제4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기쁨으로부터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슬픔)이 사라진(소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기쁨으로부터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슬픔)이 사라진(소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제2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제3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제4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4.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5.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6.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7.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인식이 함께한 선정의(삼매의) 증득[等地]이 있는 한 완전한 지혜로 꿰뚫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리고 비상비비상처의 증득과 상수멸의 이 두 경지는 증득에 능숙하고 증득에서 출정하는 것에 능숙한, 삼매를 닦는 비구들이 증득에 들었다가 출정한 뒤에 바르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A9:37 아난다 경 (Ānand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물렀다. 거기서 아난다 존자는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도반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응답했다.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2.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반들이여. 도반들이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는 재가에서도 기회를 터득할 수 있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이는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눈도 있을 것이고 형상들도 있지만 그 형상들의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귀도 있을 것이고 소리들도 있지만 그 영역들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코도 있을 것이고 냄새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혀도 있을 것이고 맛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몸도 있을 것이고 감촉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3. 이렇게 말하자 우다이 존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면 인식을 가진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인식이 없는 자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도반이여, 인식이 있는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인식이 없는 자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Saññīmeva kho, āvuso, tadāyatanaṃ no paṭisaṃvedeti, no asaññī”ti.
“도반이여, 그러면 어떤 인식을 가진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4.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숙고하지 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묾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Evaṃsaññīpi kho, āvuso, tadāyatanaṃ no paṭisaṃvedeti.
5.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識]’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6.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식무변처를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7. “도반이여, 한때 나는 사께따에서 안자나 숲의 녹야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자띨라가히야 비구니가 내게 다가왔습니다. 와서는 내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섰습니다. 한 곁에 서서 자띨라가히야 비구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 삼매는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냄을 밀쳐내지 않으며, 애써 노력하여 오염원들을 제지하고 방해한 상태가 아니고, 해탈했기 때문에 확고하며, 확고하기 때문에 지족하고, 지족하기 때문에 안달하지 않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 삼매는 어떤 결실이 있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까?’
samādhi na cābhinato na cāpanato na ca sasaṅkhāraniggayhavāritagato, vimuttattā ṭhito, ṭhitattā santusito, santusitattā no paritassati.
도반이여, 이렇게 말하자 나는 자띨라가히야 비구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이여,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냄을 밀쳐내지 않으며,
애써 노력하여 오염원들을 제지하고 방해한 상태가 아니고,
해탈했기 때문에 확고하며,
확고하기 때문에 지족하고,
지족하기 때문에 안달하지 않는 이 삼매는 완전한 지혜를 결실로 가진다고 (aññāphalo)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Evaṃsaññīpi kho, āvuso, tadāyatanaṃ no paṭisaṃvedetī”ti.
A10:6 삼매 경 (Samādhi-sutta)
1.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여,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2.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는 이러한 인식을 가진다.
아난다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A10:7 사리뿟따 경 (Sāriputta-sutta)
1. 그때 아난다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도반 아난다여,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2.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도반 아난다여, 한때 나는 여기 사왓티에서 어둠의 숲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나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었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었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었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었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 있었던 그런 삼매를 얻었습니다.”
3. “사리뿟따 존자는 그때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도반이여, 내게는 ‘존재의 소멸인 열반, 존재의 소멸인 열반’이라는 다른 인식이 일어나고 다른 인식 소멸합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장작더미에 불이 타고 있으면 다른 불꽃이 일어나고 다른 불꽃이 소멸하는 것과 같이, 내게는 ‘존재의 소멸인 열반, 존재의 소멸인 열반’이라는 다른 인식이 일어나고 다른 인식이 소멸합니다. 도반이여, 그때 내게는 존재의 소멸인 열반의 인식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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