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점수(漸修)가 나타나는 초기경전

우암(雨庵) 2016. 2. 16. 08:34

점수(漸修)란 점차 닦아나간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철스님께서 돈오돈수(頓悟漸修)를 주장하셨고

전통적으로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 두 주장의 차이는 깨달음이란 문득 혹은 담박 깨닫지만

점차 수행을 해서 닦을 것이냐 아니면 깨달으면 닦는 것조차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냐라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란 문득 이해를 하고(해오解悟; 부처님 사성제를 이해?) 몸을 조복 받는 수행으로 보입니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란 (간화선을 통해서) 몸으로 깨달아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경지로 보입니다.

(돈오돈수 돈오 점수에 대한 간단한 요약은 이 글 말미에 붙여놓은 이덕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님의 의견을 참조바랍니다.)


그런데 초기 경전을 읽다가 보니까

이 두 가지 가르침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아닐까하는 느낌이 드는 경전들이 있더군요.

거의 대부분의 초기경전은 지눌 스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보입니다.


먼저 점수(漸修)가 경전의 내용으로 명백하게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초기경전을 소개해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A8:19 빠하라다 경 (Pahārāda-sutta) 입니다.

이 경에서는 부처님의 법과 율을 대양 (samudda)에 비교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십니다.


이 법과 율에는                                              imasmiṃ dhammavinaye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anupubbasikkhā

순차적인 실천과                                            anupubbakiriyā

순차적인 도 닦음이 있으며,                            anupubbapaṭipadā,

갑작스럽게 완전한 지혜를 꿰뚫음이 없다.        na āyatakeneva aññāpaṭivedho


여기에서 순차적으로라고 번역된 원문은 anupubba란 단어입니다.

anu란 함께란 뜻이고 pubba란 이전에 란 뜻이니 합쳐서 '이전 것과 함께함' 즉 순차적인 혹은 점차적인 이란 뜻입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갑작스러운(돌출된) 진리의 관통(aññāpaṭivedho)이란 없다고(na) 천명하십니다.


§11. “빠하라다여, 예를 들면 큰 바다가 점차 기울어지고 점차 비탈지고 점차 경사지지, 갑작스럽게(āyatakeneva) 절벽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 법과 율에는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순차적인 실천과 순차적인 도 닦음이 있으며, 갑작스럽게(āyatakeneva) 완전한 지혜를 꿰뚫음이 없다. 빠하라다여, 이 법과 율에는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순차적인 실천과 순차적인 도 닦음이 있지, 갑작스럽게 완전한 지혜를 꿰뚫음이 없는 이것이 이 법과 율의 첫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mahāsamuddo anupubbaninno anupubbapoṇo anupubbapabbhāro, na āyatakeneva papāto; evamevaṃ kho, pahārāda, imasmiṃ dhammavinaye anupubbasikkhā anupubbakiriyā anupubbapaṭipadā, na āyatakeneva aññāpaṭivedho. Yampi, pahārāda, imasmiṃ dhammavinaye anupubbasikkhā anupubbakiriyā anupubbapaṭipadā, na āyatakeneva aññāpaṭivedho; ayaṃ, pahārāda, imasmiṃ dhammavinaye paṭhamo acchariyo abbhuto dhammo, yaṃ disvā disvā bhikkhū imasmiṃ dhammavinaye abhiramanti.


samudda : [m.] the sea; ocean
muddā : [f.] a seal; a stamp; an impression; gesture; printing, 印, 印契, 印算, 指算
pubba : [m.] pus; matter. (adj.) former; earlier; eastern
anupubbaninna: [anupubba+ninna]
anupubba : [adj.] successive; gradual, 次第的, 有順序的
ninna : [adj.] low-lying; bent down. (nt.), low ground, 下向の, 傾ける, 低き, 低地
poṇa : [adj.] sloping down; prone; covering or leading to, 傾斜の, 坂の, 傾ける.
pabbhāra : [m.] an incline of a mountain. (adj.) sloping; inclining; leading to, ① m. 傾斜, ② m. n. 洞窟, 山窟 (a cave in a mountain)
āyata : [adj.] long; extended; broad

āyataka :a. = āyata 長的, 已延長的, 急速的, 已持續的. instr. āyatakena 突然, 忽然, 急忙(出發等)
Āyamati ,[ā + yam] to stretch, extend, stretch out
papāta : [m.] a precipice; steep rock, 斷片, 破片; 絶壁
aññāpaṭivedha: [aññā+paṭivedha]
paṭivedha : [m.] penetration; attainment; comprehension, 貫通, 通達, 洞察





따라서 진리의 관통(돈오)이란 점수에 의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경전의 모든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의 과정을 여러 경전에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세존께서는 당신께서 깨달으신 과정을 그 깨달음의 지도를 여러 경전에서 중생들에게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으십니다.

그 예들 중에 하나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M38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Mahātaṇhāsaṅkhayasutta)


§66 부처님의 출현
§67 출가
§68 몸으로 짓는 계를 지키는 삶(정업)
§69 입으로 짓는 계를 지키는 삶(정어)
§70 청정한 삶(정명?)
§71 옷, 음식, 거처에 구애 받지 않는다.
§72~77 육근수호; 육근은 작동하지만 인상과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78 정념 정지
§79 계행을 갖추고, 육근을 수호하면서, 정념하면서 외딴 처소를 벗 삼는다.
§80 다섯 가지 장애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81 사선정을 성취한다.
§82~87 안이비설신의에 대해서


사랑스런 대상에는 애착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은 대상에는 혐오하지 않음.
piyarūpe dhamme na sārajjati, appiyarūpe dhamme na byāpajjati


piyarūpa: (nt.) an enticing object of sight
piya : (adj.) dear; amiable; beloved
sārajjati : (saṃ + raj + ya) to be pleased with, to be attached to


몸에 대한 sati를 확립하고 한량 없는 마음을 가짐.
upaṭṭhitakāyasati ca viharati appamāṇacetaso,


upaṭṭhita : (pp. of upaṭṭhāti) got ready; arrived; presented; served by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잘 앎.

tañca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yathābhūtaṃ pajānāti


호감과 반감에 따라 경험하는 느낌을 기뻐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탐닉하지 않음(갈애).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o taṃ vedanaṃ 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


nandati : (nand + a) is glad; rejoices; finds delight in 喜, 歡喜
vadati : (vad + a) speaks; says; tells 言う, 説く
nājjhosāya 움켜쥐지 않음; saya =saka (?) one’s own
tiṭṭhati : (ṭhā + a; ṭhā is changed to tiṭṭha) stands; stays; abides; lasts; remains


그에게 환락(nandī)이 소멸하는데, 그 환락이 소멸함으로써 집착이 소멸함.
vedanāsu nandī sā nirujjhati, nandīnirodhā upādānanirodho


nirujjhati : (ni + rudh + ya) ceases; dissolves; vanishes 방해 받는 것에서 멀어짐.
rujjhati : (rudh + ya) is obstructed or prevented 방해 받음


집착 → 존재 → 태어남 →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함.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소멸함.
Tassa nandī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i.


jarāmaraṇaṃ : Old age and death, decay and death
jarā : 'old age, decay',
māra : (m.) the Evil one; the tempter; death personified
soka : (m.) grief; sorrow
parideva : (m.) wailing; lamentation
domanassa : lit. 'sad-mindedness', grief
upāyāsa : (m.) tribulation; grief


이덕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님의 돈오돈수 돈오 점수에 대한 정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조 스님에 대한 성철 스님의 비판은 대개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성철 스님은 선사인 하택 신회(荷澤 神會, 670-762)를 선종의 이단이라 평한 뒤, 지눌 스님의 사상이 신회를 이은 종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현대 한국의 조계종은 내부적으로 신회, 종밀, 지눌 스님로 이어지는 돈오점수적 화엄선을 신봉하면서도, 겉으로는 간화선을 위주로 하는 임제선을 한국선의 정맥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임제선의 전통은 마조, 황벽, 임제, 대혜로 이어지는 돈오돈수적 공안선이다. 즉 성철 스님은 현재의 한국불교는 겉보기에는 임제선을 하면서 속으로는 교가인 종밀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성철 스님은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설을 깨치지 못한 거짓 선지식이 알음알이〔知解〕로 조작해 낸 잘못된 수행이론이라고 보았다. 알음알이는 깨달음을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따라서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므로 해오점수(解悟漸修)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지눌 스님이 말하는 돈오(頓悟)는 해오(解悟)이자 지해(知解)일 뿐이라고 본다.


셋째, 성철 스님은 돈오〔해오, 지해〕에 대해 지눌 스님과 견해를 달리함을 표명하였다. 지눌 스님은 사람들이 돈오〔解悟〕한 다음 점수하지 않는 것을 큰 병으로 여겼다. 돈오〔解悟〕는 사량분별하는 지식의 획득과는 다른 일종의 생명의 탄생으로서, 해오를 얻고 난 뒤에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닦음’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탄생만으로는 생명의 총체성이 완결되지 않듯이 해오라는 인격적 변화의 시작이 변화된 인격의 총체적 실현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해오 이후에 점수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궁극적 깨달음인 증오(證悟)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철 스님의 견해는 다르다. 지해(知解), 즉 지눌 스님의 돈오(頓悟)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절대로 깨달음이 아니며, 만(萬)에 하나라도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깨달음의 길을 등지는 자살행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오 이후의 닦음은 결국 증오(證俉)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고, 그것이 수단적인 한, 그것은 증오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업장(業障)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철 스님의 비판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우리는 두 번째 조항과 세 번째 조항의 성철 스님의 지눌 스님에 대한 견해를 전체적으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다음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지눌 스님의 이론과 성철 스님의 주장은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는 매우 흡사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지눌 스님 : 교리 학습(불경 공부) → 해오[지눌 스님의 돈오, 성철 스님의 지해] → 점수(만행겸수, 용맹정진) → 증오
성철 스님 : 백일법문, 삼천배, 불경, (지눌 스님의 지해나 해오에 해당하는) 어떤 계기 → 간화(삼관돌파) → 구경각[증오, 성철 스님의 돈오]



A8:19 빠하라다 경 (Pahārāda-sutta)


1.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란자에서 날레루 님바 나무 아래에 머무셨다. 그때 빠하라다 아수라 왕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있는 빠하라다 아수라 왕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빠하라다여,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하는가?”

“세존이시여,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빠하라다여, 그러면 큰 바다에는 어떤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들이 있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하는가?”

“세존이시여, 큰 바다에는 여덟 가지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무엇이 여덟인가요?”


2.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점차 기울어지고 점차 비탈지고 점차 경사지지, 갑작스럽게 절벽이 되지 않습니다. 큰 바다가 점차 기울어지고 점차 비탈지고 점차 경사지지, 갑작스럽게 절벽이 되지 않는 이것이 큰 바다의 첫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3. “다시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머무는 특징을 가져서 해안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큰 바다가 머무는 특징을 가져서 해안을 넘어가지 않는 이것이 큰 바다의 두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4. 다시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죽은 시체와 함께 머물지 않습니다. 큰 바다에 죽은 시체가 있으면 그것을 즉시 기슭으로 실어가서 땅으로 밀어내버립니다. 큰 바다가 죽은 시체와 함께 머물지 않아서, 큰 바다에 죽은 시체가 있으면 그것을 즉시 기슭으로 실어가서 땅으로 밀어내버리는 이것이 큰 바다의 세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5. “다시 세존이시여, 강가, 야무나, 아찌라와띠, 사라부, 마히와 같은 큰 강들이 큰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큰 바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강가, 야무나, 아찌라와띠, 사라부, 마히와 같은 큰 강들이 큰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큰 바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이것이 큰 바다의 네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6. “다시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 강은 그 어떤 것이건 큰 바다로 이르고 또 허공에서 비가 떨어지지만 그것 때문에 큰 바다가 모자라거나 넘친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강은 그 어떤 것이건 큰 바다로 이르고 또 허공에서 비가 떨어지지만 그것 때문에 큰 바다가 모자라거나 넘친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 이것이 큰 바다의 다섯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7. “다시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하나의 맛인 짠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바다가 하나의 맛인 짠 맛을 가지고 있는 이것이 큰 바다의 여섯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8. “다시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진주, 수정, 녹주석, 소라, 규석, 산호, 은, 금, 루비, 묘안석과 같은 여러 종류의 많은 보배를 가지고 있습니다. 큰 바다가 진주, 수정, 녹주석, 소라, 규석, 산호, 은, 금, 루비, 묘안석과 같은 여러 종류의 많은 보배를 가지고 있는 이것이 큰 바다의 일곱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9. “다시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띠미, 띠밍갈라, 띠미라밍갈라, 아수라, 나가, 간답바와 같은 큰 존재들의 거주처입니다. 큰 바다에는 백 요자나의 몸을 가진 존재도 있고, 이백 요자나, 삼백 요자나, 사백 요자나, 오백 요자나의 몸을 가진 존재도 있습니다. 큰 바다가 띠미, 띠밍갈라, 띠미라밍갈라, 아수라, 나가, 간답바와 같은 큰 존재들의 거주처여서 큰 바다에는 백 요자나의 몸을 가진 존재도 있고, 이백 요자나, 삼백 요자나, 사백 요자나, 오백 요자나의 몸을 가진 존재도 있는 이것이 큰 바다의 여덟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세존이시여, 큰 바다에는 이러한 여덟 가지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아수라들은 큰 바다를 기뻐합니다.”


10.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합니까? (dhammavinaye abhiramantī)”

“빠하라다여,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이 법과 율에는 어떤 경이롭고 놀랄만한 법들이 있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합니까?”

“빠하라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들이 있나니, 그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무엇이 여덟인가?”


12. “다시 빠하라다여, 예를 들면 큰 바다가 머무는 특징을 가져서 해안을 넘어가지 않는 것처럼, 내가 제자들을 위해서 제정한 학습계목을 내 제자들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범하지 않는다. 빠하라다여, 내가 제자들을 위해서 제정한 학습계목을 내 제자들이 목숨을 버릴지언정 범하지 않는 이것이 이 법과 율의 두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13. “다시 빠하라다여, 예를 들면 큰 바다가 죽은 시체와 함께 머물지 않아서 큰 바다에 죽은 시체가 있으면 그것을 즉시 기슭으로 실어가서 땅으로 밀어내버리는 것처럼, 승가는 계를 지키지 않고, 나쁜 성품을 지니고, 불결하고, 의심하는 습관을 가지고, 비밀리에 행하고,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주장하고, 청정범행을 닦지 않으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주장하고, 썩은 업에 의해 안이 썩었고, 여섯 감각의 문을 통해 탐욕 등 오염원들이 흐르고, 탐욕 등의 쓰레기를 가져 청정하지 않은 사람과는 함께 머물지 않는다. 승가는 함께 모여 즉시 그를 내쳐버린다. 설혹 그가 비구 승가 가운데 앉아있다 하더라도 그는 승가로부터 멀고 승가는 그로부터 멀다.

빠하라다여, 승가가 계를 지키지 않고, 나쁜 성품을 지니고, 불결하고, 의심하는 습관을 가지고, 비밀리에 행하고,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주장하고, 청정범행을 닦지 않으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주장하고, 썩은 업에 의해 안이 썩었고, 여섯 감각의 문을 통해 탐욕 등 오염원들이 흐르고, 탐욕 등의 쓰레기를 가져 청정하지 않은 사람과는 함께 머물지 않고, 승가가 함께 모여 즉시 그를 내쳐버리며, 설혹 그가 비구 승가 가운데 앉아있다 하더라도 그는 승가로부터 멀고 승가는 그로부터 먼 이것이 이 법과 율의 세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14. “다시 빠하라다여, 예를 들면 강가, 야무나, 아찌라와띠, 사라부, 마히와 같은 큰 강들이 큰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큰 바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끄샤뜨리야, 바라문, 와이샤, 수드라의 네 가지 계급이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에 의지해서 집을 나와 출가하면 이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사꺄의 아들[釋子] 사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빠하라다여, 끄샤뜨리야, 바라문, 와이샤, 수드라의 네 가지 계급이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에 의지해서 집을 나와 출가하면 이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사꺄의 아들 사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이것이 이 법과 율의 네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15. “다시 빠하라다여, 예를 들면 이 세상에 강은 그 어떤 것이건 큰 바다로 이르고 또 허공에서 비가 떨어지지만 그것 때문에 큰 바다가 모자라거나 넘친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 것처럼, 많은 비구들은 취착이 없는 열반의 요소로 반열반에 들지만 그것 때문에 열반의 요소가 모자라거나 넘친다고 알려지지 않는다. 빠하라다여, 많은 비구들이 취착이 없는 열반의 요소로 반열반에 들지만 그것 때문에 열반의 요소가 모자라거나 넘친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 이것이 이 법과 율의 다섯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16. “다시 빠하라다여, 예를 들면 큰 바다가 하나의 맛인 짠 맛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 법과 율도 하나의 맛인 해탈의 맛을 가지고 있다. 빠하라다여, 이 법과 율은 하나의 맛인 해탈의 맛을 가지고 있는 이것이 이 법과 율의 여섯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17. “다시 빠하라다여, 예를 들면 큰 바다가 진주, 수정, 녹주석, 소라, 규석, 산호, 은, 금, 루비, 묘안석과 같은 여러 종류의 많은 보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 법과 율도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와 같은 많은 보배를 가지고 있다. 빠하라다여, 이 법과 율이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와 같은 여러 종류의 많은 보배를 가지고 있는 이것이 이 법과 율의 일곱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18. “다시 빠하라다여, 예를 들면 큰 바다는 띠미, 띠밍갈라, 띠미라밍갈라, 아수라, 나가, 간답바와 같은 큰 존재들의 거주처이다. 큰 바다에는 백 요자나의 몸을 가진 존재도 있고, 이백 요자나, 삼백 요자나, 사백 요자나, 오백 요자나의 몸을 가진 존재도 있는 것처럼, 이 법과 율도 큰 존재들의 거주처여서 그곳에 예류도,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 닦는 자, 일래도, 일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 닦는 자, 불환도, 불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 닦는 자, 아라한도, 아라한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 닦는 자가 있다. 빠하라다여, 이 법과 율이 큰 존재들의 거주처여서 예류자,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닦는 자, 일래자, 일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 닦는 자, 불환자, 불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 닦는 자, 아라한, 아라한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 닦는 자가 있는 이것이 이 법과 율의 여덟 번째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

빠하라다여, 이 법과 율에는 이러한 여덟 가지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들이 있나니, 이것을 볼 때마다 비구들은 이 법과 율을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