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어리진 음식 이후에 나타나는 촉식, 의도식, 식식을 깊이 공부하다 보니
제가 처음에 번역한 덩어리진 음식의 번역이 거꾸로 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덩어리진 음식이란 '나 라는 것'의 생겨남을 뜻하는 것으로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아들의 고기 경의 대의는
덩어리진 음식: 나라는 것이 생겨남
촉식: 세상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짐.
의도식: 그 견해에 의지해서 생각을 일으켜 판단을 함.
식식: 일어난 것을 판단해 보지만 온통 괴로움 뿐임.
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즉 사식이란 괴로움이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자아가 생기고, 그 자아에게 가치관(견해)가 생기고, 그 가치관에 맞게 의도를 일으키고, 그래서 언제나 괴로움에 시달린다는 의미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먹는다는 비유 및 그 결과는 '나라는 것이'가 더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 나로 향하는 것 putta)을 먹는다는 것은 나라는 것을 중심에 놓고 알음알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나를 중심에 놓고 내가 탐욕을 부리고 (나를 먹고) 나를 중심으로 성을 내며 (나를 먹고), 그래서 그 나에 취해서 그 아들이 귀하다면서 '오 나의 하나뿐인 아들!'하고 아들에게 취착되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황무지도 중도가 아니라 중간(antāra)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간이란 견해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좋고 싫음으로, 알고 모름으로, 음과 양으로 갈라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그 '선택을 한 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선택 이전에는 없던 자 입니다. 선택과 동시에 나타나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내가"라는 표현으로 서술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아들을 먹는 순간입니다. 자아를 먹는 순간입니다. 그러면서 '자아'라는 개념은 더욱 강화됩니다.
이 부분을 시로 표현한 것이 김춘수 시인의 꽃일 것입니다.
"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아직은 제 견해를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경전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정 반대의 번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습니다.
일단은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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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에서는 소위 먹방 (먹는 음식 방송)이 인기를 끌고 있어서
저도 한번 다뤄 보려고 합니다. ^^
사실은 제 사념처의 이해를 바로 잡아 보려고 염처 상윳다를 읽다가
S47:8 요리사 경의 nimitta(표상)의 뜻을 선명히 하려다가
문득 요리라면 음식 (자양분 āhara)과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양분의 의미를 찾아들어 가다가 S12:63 아들의 고기 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들의 고기를 설명해 주시는 비유가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다시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역시나 부처님께서는 언어의 마술사로서 진면목을 보여주시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덩어리진 음식이란 그동안 우암이 상상했던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에서 기인하는 탐과 진입니다. 그것이 바로 덩어리진 음식입니다.
덩어리진으로 번역된 kabaḷīkāro란 어리석은 행동의 것 (ka + bala + karoti)로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암이 이해한 kabaḷīkāro āhāro (덩어리진 자양분)이란
어리석음에서 기인한 탐냄과 성냄 (혹은 감각적인 욕망 kama, 악의 byāpāda, 해꼬지 vihiṃsā) 입니다.
더 나아가 '나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황무지로 제가 번역한 kantāra가 사실은 중도의 길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우암은 kantāra를 ka + antara의 구조로 읽어서 '중간의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의 것이란 탐과 진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도시가 아니라 황무지로 나아가면 탐과 진이 없어지듯이
적극적으로는 부정관(asubhabhāvanā) 등의 길을 간다면
소극적으로는 객관적인 입장 (치우치지 않은 입장)에서 주어진 사건을 본다면
탐과 진이 없어질(옅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과 진이 없어질(옅어질) 때, 비로서 드러나는 문제는
바로 탐과 진을 제거하는 도구인 부정관 혹은 객관적인 입장이 다시 극복의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구'는 바로 '나 라는 것'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삼켜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황무지의 길이라고 표현하셨고 우암의 생각에는 중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양분 (음식 āhara)에는 4가지가 있다고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S12:11 음식 경 (Āhāra-sutta)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 첫 번째요, Kabaḷīkāro āhāro—oḷāriko vā sukhumo vā,
감각접촉[觸]이 두 번째요, phasso dutiyo
마음의 의도가 세 번째요, manosañcetanā tatiyā
의식이 네 번째이다. viññāṇaṃ catutthaṃ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그 각각의 음식에 대해서 비유를 들어 주십니다.
이중 먼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에 대한 비유입니다.
먼저 각묵스님의 번역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S12:63 아들의 고기 경 (Puttamaṃsasutta)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덩어리진 [먹는] 음식은 무엇과 같다고 봐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적은 양식만을 가지고 사막의 길을 떠났다 하자. 그들에게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외아들이 있었다. 비구들이여, 그런데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사막의 길을 떠나서 그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리고 다 소비되어버렸지만 아직 사막은 남아있고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남편과 아내 두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적은 양식이 이미 다 떨어져버리고 다 소비되어버렸지만 아직 사막은 남아있고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외동아들이 사랑스럽고 소중하지만 이를 잡아서 육포를 만들고 꼬치에 꿰어 구워서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아직 남아있는 사막을 건너야 하지 않을까? 우리 셋 모두 다 죽어서는 안되니까?'라고.
비구들이여, 그래서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은 외동아들이 사랑스럽고 소중하지만 그 아이를 잡아서 육포를 만들고 꼬치에 꿰어 구워서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아직 남아있는 사막을 건널 것이다. 그들은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외아들아, 너는 어디에 있니! 외아들아, 너는 어디에 있니!'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며 울 것이다."
이 경에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사실은 우리 아들을 먹고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각묵 스님의 번역을 읽다가 보면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마치 내 아이를 먹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듭니다. 그래서 우암은 처음에 이 경을 읽으면서 그런 이유로 부처님께서 적게 먹음을 말씀하시고 그래서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하라는 말씀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즉 내가 먹는 생명체들도 모두 나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생명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욕계 중생으로서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것을 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생명 모두가 사실은 내 모습임을 알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줄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경의 대의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비유하신 것이며, 먹는 것 (āhara)이란 그 과정에 나타나는 생각의 대상 (어리석음의 대상; 탐욕과 성냄)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생각의 대상인 어리석음에서 기인하는 탐욕과 성냄을 다 소진하고,
그 탐진치를 소진했다고 주장하는 ‘나라는 것’조차 내려 놓을 수 있는 ‘그 상태’를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 생각의 대상이 āhara라는 것입니다.
āhara란 hara가 아닌 것(a)이 될 수 있다. 그리고 hara의 의미는 가지고 가는 것이란 의미이므로 āhara란 원래의 의미인 음식 외에도 '취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음식이란 말이 아닐까 합니다.
(꼭 이렇게 볼 필요가 있는가?
만약 āhara를 부정적인 것의 조건으로만 본다면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āhara는 긍정적인 것의 조건으로도 사용이 됩니다. A10:62 갈애 경에 보면 '영지(靈知)를 통한 해탈도 자양분을 갖고 있다고 나는 말하지, 자양분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Vijjāvimuttimpāhaṃ, bhikkhave, sāhāraṃ vadāmi, no anāhāraṃ. 그런데 문장에서 사용된 '자양분을 갖고 있다고'는 sāhāraṃ 즉 자양분과 함께한다는 것이 그 직역일 것입니다. 즉 조건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취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Hāra ,[fr. harati] 1. that which may be taken; grasping, taking; grasp, handful, harati : [har + a] carries; takes away; plunders; steals booty, 運送, 拿來, 拿走, 除去, 奪取
먹는다(khādantā)는 의미는 '그 과정을 거쳐서 음식이 (취착하는 대상이) 사라지게 (kha 허공으로) 된다'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공한 것 (kha)에 묶여서(da) 극단으로 가다(anta).)
아래 글은 우암이 위 경을 다시 번역해 본 것입니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덩어리진 음식은 무엇과 같다고 봐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모든 어리석음의 비움으로 향하는 것을 알면서 황무지로 (다른 이들과 다른) 길을 떠났다 하자. 그들에게는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외아들(나라는 것으로 향함 putta; pa + atta?)이 있었다. 비구들이여, 그런데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모든 어리석음을 비움으로 향해서 완전히 소멸시키고 완전히 알게되었다. 그런데 아직 '중간이란 것(세속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수단)'이 남아있어 완전히 건너간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남편과 아내 두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우리는 모든 어리석음인 나를 비우는 방향으로 가서 소멸시키고 완전히 알았다. 그런데 아직 ‘중간이란 것’ (황무지: 생각의 양식을 소멸시킨 수단)이 남아 있어서 완전히 건너간 것이 아니다. 저 환상 같은 한 아들(하나의 나로 향하는 것)이 있어서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데 이 취하는 것이 들어있는 통을 깨뜨려 말려버리고 나로 향하는 고기들(분석 puttamaṃsāni = vimamsa??? 좋다 싫다 있다 없다 등의 분석)을 먹어버려서 (khādantā 길들여서 소멸시킴) 남아있는 중간의 것(황무지)들을 건너버리자. 셋 모두 (과거, 미래, 현재?) sati하지 않아서 (nasati nassi) 분리되게(vi + imhā 離格) 하지 말자. (인과 관계를 모두 보자. 기억하자!)’ '라고.
비구들이여, 그래서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은 외동아들(나라는 것이)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지만 그 취하게 하는 것이 들어있는 통을 깨뜨려서 말려버리고 나로 향하는 분석(고기 mamsa를 vimamsa로 봄)들을 먹어버려서 그 남아있는 황무지를 건넜다. 그래서 나라는 것으로 향하는 분석들을 먹으면서 (khādantā) 가슴에 paṭipiseyyuṃ 하면서 (전생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하면서?) ‘나라는 것,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나라는 것,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한다.."
우암의 분석 과정
남편과 아내 두사람이란 있음과 없음, 앎과 모름 등의 이분법적인 사고(개념)를 뜻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이란 바로 이 이분법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있다를 상정하는 순간 없다가 생깁니다. 안다고 하는 순간 모름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부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그것을 가진 자가 (아들(putta)이)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개념들이 낳은 '나라는 것'으로 향하는 것(pa + atta)입니다. 아들이란 상반된 개념을 토대로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나라는 개념’으로 향하게 (pa + atta; putta?)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 개념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것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내려 놓음 (방하착 Abhinikkhipana)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 두사람이 가는 길은 황무지길(kantāramaggaṃ)입니다. 이 황무지란 단어는 ka + anta 즉 극단의 것이란 뜻일 수 있습니다. 혹은 그 반대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antāra 즉 중간 (inbetween)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이 단어를 어떻게 읽느냐가 이 비유의 의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됩니다.
황무지길을 극단의 길이라고 읽는다면 팔정도에 반대가 되는 세속적인 삶을 의미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극단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문제는 antāra의 끝 ra의 의미가 알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암은 황무지란 것이 오히려 중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ntāra란 넘어서지(tara; crossing; passing over)않은 것이기 때문에 중(中 majjhima)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들에게는 양식(sambala)이 적습니다. 이 양식의 의미는 모든 (sam) 어리석음(bala)이며 그 양이 적다는 것입니다. (paritta; 비우는 방향으로 가다? 완전한 나라는 것으로 가다? pari + atta) 그렇게 적은 양식임을 알면서도(ādāya) 황무지로 (세상과 다르게; 시간을 거슬러) 나아갑니다.
parittaṃ sambalaṃ ādāya kantāramaggaṃ paṭipajjeyyuṃ
완전한 나라는 것으로 향하는(parittaṃ) 모든 어리석음으로(sambalaṃ) 연민도 없이(ādāya) 황무지의 길 (판단 이전의 길, 경계를 대하게 됨)로 들어간다.
Atha kho tesaṃ, bhikkhave, dvinnaṃ jāyampatikānaṃ kantāragatānaṃ yā parittā sambalamattā, sā parikkhayaṃ pariyādānaṃ gaccheyya.
비구들이여 이 부부 두사람은 황무지 길을 가는데 있어서 완전한 나라는 것으로 향하는(parittaṃ) 모든 어리석음으로(sambalaṃ) 갈 수도 있고 완전한 소멸과 완전한 깨달음으로 갈 수 있다.
Siyā ca nesaṃ kantārāvaseso anatiṇṇo.
이 부부는 아직 황무지에 머물러서 건너지 않았다. (두 길중 하나를 가지 않은 중립의 상태이다.)
그래서 두 부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어리석음인 나를 비우는 방향으로 가서 소멸시키고 완전히 알았다. 그런데 아직 ‘중간이란 것’ (사막: 생각의 양식을 소멸시킨 수단)이 남아있어서 완전히 건너간 것이 아니다. 저 환상 같은 한 아들(하나의 나로 향하는 것)이 있어서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데 이 취하게 하는 것이 들어있는 통을 깨뜨려 말려버리고 나로 향하는 고기들(분석 puttamaṃsāni = vimamsa??? 좋다 싫다 있다 없다 등의 분석)을 먹어버려서 (khādantā 길들여서 소멸시킴) 남아있는 중간의 것(황무지)들을 건너버리자.
셋 모두 (과거, 미래, 현재?) sati(기억)하지 않아서 (nasati nassi) (홀로) 분리되게(vi + imhā 離格) 하지 말자. (인과 관계를 모두 보자. 기억하자!)’ 그래서 나라는 것으로 향하는 분석들을 먹어서 (khādantā) 가슴에 paṭipiseyyuṃ 하면서 ‘나라는 것,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나라는 것,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한다. 이 말을 하신 이유는 아들이 나 임을 못 알아 볼까 봐 다시 강조하신 것이다.
paṭipiseyyuṃ란 그 원형이 Paṭipiṁsati입니다. sati를 저는 기억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Paṭi는 거슬러 올라간 것이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전생의 라는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pi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생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하면서'라고 번역해 보았습니다.
이 경은 깨달음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탐욕과 성냄을 제압하고 그리고 나서 제압을 했다는 '나'라는 것 조차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덩어리진 음식에 대한 비유라면 덩어리진 음식이란 그동안 상상했던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에서 기인하는 탐과 진입니다. 그것이 바로 덩어리 진 음식입니다. 또 덩어리진으로 번역된 kabaḷīkāro란 어리석은 행동의 것 (ka + bala + karoti)로 볼 수 있습니다.
빨리어 원문 및 단어 정리
Kathañca, bhikkhave, kabaḷīkāro āhāro daṭṭhabbo?
Seyyathāpi, bhikkhave, dve jāyampatikā parittaṃ sambalaṃ ādāya kantāramaggaṃ paṭipajjeyyuṃ. Tesamassa ekaputtako piyo manāpo. Atha kho tesaṃ, bhikkhave, dvinnaṃ jāyampatikānaṃ kantāragatānaṃ yā parittā sambalamattā, sā parikkhayaṃ pariyādānaṃ gaccheyya. Siyā ca nesaṃ kantārāvaseso anatiṇṇo.
Atha kho tesaṃ, bhikkhave, dvinnaṃ jāyampatikānaṃ evamassa: ‘amhākaṃ kho yā parittā sambalamattā sā parikkhīṇā pariyādiṇṇā. Atthi cāyaṃ kantārāvaseso anittiṇṇo. Yannūna mayaṃ imaṃ ekaputtakaṃ piyaṃ manāpaṃ vadhitvā vallūrañca soṇḍikañca karitvā puttamaṃsāni khādantā evaṃ taṃ kantārāvasesaṃ nitthareyyāma, mā sabbeva tayo vinassimhā’ti.
Atha kho te, bhikkhave, dve jāyampatikā taṃ ekaputtakaṃ piyaṃ manāpaṃ vadhitvā vallūrañca soṇḍikañca karitvā puttamaṃsāni khādantā evaṃ taṃ kantārāvasesaṃ nitthareyyuṃ. Te puttamaṃsāni ceva khādeyyuṃ, ure ca paṭipiseyyuṃ: ‘kahaṃ, ekaputtaka, kahaṃ, ekaputtakā’ti.
jāyampatikā :, jayampatikā [jayā-pati-ka] 夫婦
jhāyana : [nt.] 1. burning; 2. meditation
paritta : [adj.] 1. small; insignificant; little; 2. protection; protective charm
ritta : [pp. of riñcati] devoid; empty; rid of, 捨てられた, 除かれた, 空無の, 欠けたる
riñcati : [ric + ṃ-a] neglects; abandons; empties
sambala :n. [cf. Sk. śambala] 糧食, 準備食, 旅資.。
ādāya : [abs. of ādāti] having taken, (有所)執取
adati : [ad + a] eats.。
ādāti, (ā + dā + a), takes; grasps
kantāra : [m.] wilderness; desert
(ka+anta + ra) 여기에서 두 부부라는 것이 드러난다. 즉 두 극단이다. ??? 아니다
antara : [nt.] difference. adj. inner; inter.。内的, 中間的
antarā, (adv.), in between; meanwhile, 在~之間
paṭipajjati: [paṭi + pad + ya] enters upon a path or course; goes along; follows a method pajjati :[Sk. padyate<pad] 歩行, 走路, 行去. pp. panna
amhā , (plu. of amhi), we are
pariyādāna:n. [pari-ādāna] 遍取, 了悟, 盡滅
nittiṇṇa : [pp. of nittharati] got out of; having crossed over
nittharati : [ni + thar + a] crosses over; gets over ; ni + tara 건너 결과
vāsesi: [aor. of vāseti] establised; made dwell; perfumed
vāseti: [vas + e] establish; makes dwell; perfumes, 建立,使居住,洒香水
vadhitvā : [abs. of vadheti] having killed; having teased or hurt
vadheti : [vadh + e] kills; teases or hurts
vidhi : [m.] method; way; luck; destiny; form
vallūra : [nt.] dried flesh, 乾肉
soṇḍika :m. [<soṇḍa] 泥酔者; 酒屋, 酒肆, 취한 것이 들어 있는 통
soṇḍa : [adj.] addicted to
karitvā : [abs. of karoti] having done
khādanta : [pr.p. of khādati] eating; chewing; bitting; gnashing
danta : [pp. of dameti] tamed; trained; mastered; converted
tayo : [nom. plu. of ti] three (persons) 과거 미래 현재?
nassi : [aor. of nassati] perished; disappeared
nassati : [nas + a] perishes; disappears, 滅亡, 遺失 기억이 없게 하자!
imhā 陽性%单数%離格
ura : [m.; nt.] the breast; chest
Paṭipiṁsati ,[paṭi+piṁsati] to beat against
piṃsati , = pisati. piṃsati: [pis + ṃ-a] grinds; crushes, ① 飾(꾸밀 식, 경계할 칙)る, 鳴る (울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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