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촉식의 비유 - S12:63 아들의 고기 경

우암(雨庵) 2016. 3. 2. 15:32

아들의 고기경의 사식 중 두번째인 촉식의 비유입니다.


제가 이해한 촉식이란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상한다. 혹은 세상은 신이 만든 것이다 등등의 견해를 갖는 것을 촉식이라 하신 것으로 우암은 이해를 했습니다.


저도 이 번역을 해 보기 전에는 촉이란 단순히 감각적인 접촉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촉식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촉을 삼사화합, 즉 근-경-식의 만남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에서 바로 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 경의 비유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식이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존재에 대한 견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전에 생각했던 단순한 감각적인 접촉이라면 그것은 근-경의 만남입니다.

식이 들어가야 비로서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각묵스님의 번역입니다.


6. "비구들이여, 그러면 감각접촉의 음식은 무엇과 같다고 봐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소가 가죽이 통채로 벗겨져서 벽에 기대어 서 있다 하자. 그러면 그 벽에 붙어사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먹을 것이다. 만일 나무 곁에 서 있으면 나무를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먹을 것이다. 만일 물속에 서 있으면 물을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먹을 것이다. 만일 노지에 서 있으면 노지를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먹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소가 가죽이 통채로 벗겨져서 의지해서 서 있는 곳마다 각기 거기에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먹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의 음식은 이와 같다고 봐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의 음식을 철저히 알 때 세 가지 느낌을 철저히 알게 되고, 세 가지 느낌을 철저히 알 때 성스러운 제자가 더 이상 해야 할 바가 없게 된다고 나는 말한다." 


저는 이 번역을 읽으면서 그 내용이 아마도

윤회에서 우리가 어떤 중생으로 태어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우암이 새로 번역을 해 보니 그 의미는

우리의 견해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핵심적인 도구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암이 해 본 번역


어떻게 촉식을 보아야 하는가?
비구여 마치 가서 분리된 자(gavi; 세상을 살아가면서 있고 없고 알고 모르고등으로 나누어 보는 자)가 (세상은) 항상하다고 보고 나(atta)라는 것에 의지하여 머문다.
그래서 나라는 것에 의지하는 생명체는 그걸 먹는다.
허무한 것에 의지하여 머물면, 허무한 것에 의지하는 생명체는 그걸 먹는다.
(신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일으켜 진) 것에 의지하여 머물면, 만들어진 것에 의지하는 생명체는 그걸 먹는다.
‘함께 하는 것은 없다’에 의지하여 머물면, ‘함께 하는 것은 없다’에 의지하는 생명체는 그걸 먹는다.


비구들이여,  가서 분리된 자(gavi)가 항상함에 의지하여 머물면, 그것에 의존하는 생명체가 그걸 먹는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나는 설한다. '촉식을 이와 같이 보라!'고. 비구여 촉식을 관통하여 알면 느낌을 관통하여 아는 것이다. 세가지 느낌을 관통하여 아는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빨리어 원문


Kathañca, bhikkhave, phassāhāro daṭṭhabbo?

Seyyathāpi, bhikkhave, gāvī niccammā kuṭṭañce nissāya tiṭṭheyya.

Ye kuṭṭanissitā pāṇā te naṃ khādeyyuṃ.

Rukkhañce nissāya tiṭṭheyya, ye rukkhanissitā pāṇā te naṃ khādeyyuṃ.

Udakañce nissāya tiṭṭheyya, ye udakanissitā pāṇā te naṃ khādeyyuṃ.

Ākāsañce nissāya tiṭṭheyya, ye ākāsanissitā pāṇā te naṃ khādeyyuṃ.

Yaṃ yadeva hi sā, bhikkhave, gāvī niccammā nissāya tiṭṭheyya, ye tannissitā pāṇā te naṃ khādeyyuṃ. Evameva khvāhaṃ, bhikkhave, ‘phassāhāro daṭṭhabbo’ti vadāmi. Phasse, bhikkhave, āhāre pariññāte tisso vedanā pariññātā honti. Tīsu vedanāsu pariññātāsu ariyasāvakassa natthi kiñci uttarikaraṇīyanti vadāmi.






우암의 분석과정


황소로 번역한 gavi를 저는 '가서 분리된 자'라고 보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놀란 것은 그 발음이 가위(gavi)라는 것입니다. 자르는 도구의 발음이 gavi와 같다는 것은 제가 과장하고 있는 것까요???^^)

앞서 덩어리진(kabaḷīkāro 어리석은 행동의 것) 음식을 먹은 결과 나타나는 것이 gavi 즉 분리된 자입니다. (잘려진 자?)


그런데 껍질이 벗겨진 채입니다. (niccammā) 저는 이 의미를 무상함(anicca)와 연결시켰습니다. 즉 무상하지 않다 혹은 항상하다로 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상정한 사람은 그 견해가 항상하거나 허무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렇게 머무는 자는 나라는 것(kuṭṭanissitā kutta<kattā)에 의지하는 생명체는 그걸 먹는다 라고 보았습니다.


두번째 나타나는 Rukkhañce는 (nu + kha)의 의미로 보았습니다.

원래 rukkha란 나무란 뜻입니다.

저는 ru의 의미를 nu :adv. [〃] 是否. nanu 確實 로 보았습니다. (ru와 nu의 발음이 유사해서...)

kha는 空, 虛空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Rukkhañce를 허무함으로 보았습니다.

항상함과 댓구의 의미로 읽었습니다.


세번째 나타나는 Udakañce는 (uda + ka)의 의미로 보았습니다.

원래 Udaka란 물이란 뜻입니다.

저는 그 의미를 일으켜 세워진 것이란 의미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신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로 읽었습니다.


네번째 나타나는 Ākāsañce는 ‘함께 하는 것은 없다’라고 읽었습니다.

원래 ākāsa란 하늘, 공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a + ka + sa로 보아서 '함께 가는 것은 없다.' 즉 이 세상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단멸론)로 읽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 견해로 세상을 접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항상하다고 보고, 허무하다고 보고, 유신론으로 보고, 무신론으로 보면 그것에 의지해서 그걸 먹어버린다고 가르쳐 주신 것을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괴롭다든가 즐겁다던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느낌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