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 불교와 유사한 가르침

우암(雨庵) 2016. 6. 1. 10:22

육신의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 욕심 때문에 세상을 알지 못하지만,

눈이 멀게 될 때 비로서 마음의 눈을 뜨게 되면서 세상을 바로 보게 된다!


참 아이러니한 이야기입니다.

사지가 멀쩡할 때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지만 ( '자만심' 때문일까요?)

세상을 다 잃고 나면 비로서 세상이 보인다는 말이니까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리어왕은 나이 80이 넘어 왕위에서 물러나려고 합니다. 그에게는 세 공주가 있었는데 이들에게 1/3씩 왕국을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묻고 그 대답의 흡족함에 따라 왕국을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리어왕의 첫 딸인 고너릴, 둘째 딸인 리건은 아첨하는 말로 각각 자기 몫의 재산을 받습니다.

하지만 리어왕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인 코델리아는 사랑은 말로 표현될 수 없다고 믿고 있어서 할 말이 없다고 합니다. 겨우 억지로 한 말이 ‘전 전하를 도리에 따라서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유산 한푼 받지 못하고 해외로 쫗겨나게 됩니다.


어쩌면 리어왕은 이상주의자와 현실론자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동이 중요한가 말이 중요한가?)
리어왕은 말이 중요했고,
코델리아는 행동이 중요했고,
고너릴과 리건은 물질적 이익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우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yathābhūtañāṇadassana)

그래서 자기 식대로 색안경을 끼고 해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리어왕에게는 그 해석의 '말'이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코델리아의 의견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랑이 개념의 옷을 입게된다면 (말로 표현된다면) 그건 더이상 사랑이 아니니까요.

마치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32상은 32상이 아니기 때문에 32상이라 한다.'와 같은 개념이지요.

담을 수 없는 것을 언어란 그릇을 빌려서 표현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코델리아는 그런 면에서 볼 때 너무 고지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지식이 없었다면 코델리아가 될 수 없었겠지요.

더 나아가 코델리아는 ‘전 전하를 도리에 따라서 사랑하고 있을 뿐’이란 폭탄 발언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의 내용도 한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코델리아가 태어나서 자라게 해준 은혜 때문에 리어왕을 도리에 따라서 사랑할 뿐이란 것입니다.

즉 조건지워진 것이란 말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키워준 부모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 있겠지만,

사실 사랑이란 이렇게 조건지워진 것이지요.


고너릴과 리건은 감각적인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깨닫지 못한 자들(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인생에 대한 고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저 내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육근, 느낌)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에 대해 목말라하고 갈애를 내는 것입니다.


만약 깨닫지 못했던 자가 모든 이가 육근의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인생이란 참혹한 거짓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마치 리어왕이 고너릴과 리건에게 배반을 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다른 사람들의 생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내가 인생을 바라다 보는 시각이 바뀌니

비로서 그들의 행위(신구의 삼업)가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 낸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우암이 유학하던 시절 룸메이트셨던 한 영문학자 분께서는 셰익스피어와 불교를 접목시켜 학위 논문을 쓰셨었습니다.

또 위 동영상은 리어왕을 일본식으로 해석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란(亂 1985)의 엔딩 부분인데

우리의 삶이란 눈 먼 봉사의 삶인데, 절벽에서 지니고 다니던 부처님(밝은 빛) 마저 잃어버리고, (무명에 빠져)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있다는 표현이라고 보입니다.

이는 마치 법화경의 삼계화택의 비유와도 같은 내용이겠지요. 우리가 사는 집에 불이 났는데 우린 불 난 줄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암에게 인생이란 '비극'으로 보입니다.

비극이란 깨닫지 못한 자의 시점에서 볼 때 비극이란 말입니다.

금강경의 표현을 빌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우암'에게는 인생이란 한편의 처절한 배신의 드라마입니다.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염오(nibbidā 厭離, 悪 싫어서 떠남)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대상에 물들고 있습니다. (raga)

어서 공부가 진전되어 이욕(virāga 離貪, 離, 遠離 물들지 않음)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멸진(nirodha 滅盡)할 수 있기를 서원해 봅니다.


더 이상은 심봉사의 삶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의 있다고 하는 것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