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멸도를 얻은 중생은 왜 없을까요? - 금강경

우암(雨庵) 2017. 4. 5. 07:39

우암은 요새 한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참선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스님 가르침에 따라 참선을 하다 보니
금강경의 내용이 이전에 이해한 바와는 다르게 읽혀지는 부분이 있더군요.
그래서 그 이야길 해보려 합니다.


大乘正宗分(대승정종분)  第三


佛告 須菩提 諸菩薩 摩訶薩 應如是 降伏其心
불고 수보리 제보살 마하살 응여시 항복기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킬 것이니라


所有一切 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소유일체 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무릇 있는 바 모든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기는 것, 태로 생기는 것,
습기로 생기는 것, 화하여 생기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如是滅度 無量無數 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여시멸도 무량무수 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


이렇게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지만, 실로 멸도를 얻는 중생이 없느니라.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則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에게 `자아'라는 관념, `개아'라는 관념, `유정'이라는 관념, `영혼'이라는 관념이 있으면 이는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 가르침의 요지는 무엇일까요?
그 말씀을 드려볼 까 합니다.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실까요?
또 왜 모든 중생을 제도했는데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없을까요?

이 가르침의 도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우암이 참선을 하려고 앉아보니
여러가지 번뇌가 일어나더군요.


바로 그 번뇌의 대상이

"무릇 있는 바 모든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기는 것, 태로 생기는 것,
습기로 생기는 것, 화하여 생기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들"

입니다. 그 모두가 번뇌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지만"의 의미는
바로 이런 번뇌의 대상과 화해를 하는 것입니다.


좌선을 한다고 앉았는데 그런 번뇌가 떠오른 이유는
그 대상에 대해 내가 풀지 못한 어떤 것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지지 못하고 번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암은 이런 번뇌가 일어나면 사무량심으로 대처합니다.
그 대상에 대해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고, 비심을 일으키며, 일어난 그대로에 만족하고(희),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하니 번뇌가 사라지는 효과가 있더군요.


이렇게 마음을 내려놓으니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며
'나다, 너다, 중생이다, 생명이 있다'는 생각이 즉 번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있으면, 네가 있고 중생이 있고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대상이 생기고 번뇌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요함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_()_


이런 내용을 우암이 이해한 바대로 초기불교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相의 범어는 saññā라고 합니다.
따라서 금강경의 이 부분은 좌선을 하면서
마음 속에서 나타나는 경계에 대해서 혹은 눈 앞에 보이는 경계에 대해서
이것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상 경계가 모두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감각된 모든 대상에 마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마음이 가는 부분에만(manasikāra) 관심을 주고 판단을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 가치판단 기준 혹은 경향성인(우리가 따라서 가는) '무엇'인데
이를 saññā(想)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saññā(想): 마음 안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여 대상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saññā의 결정을 따라서 선택하고 그 선택된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굴릴 뿐입니다.
또한 그렇게 생각한 것이 어느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이 될 뿐입니다.


그 어느 것도 '객관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금강경에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의 모든 것이란 내 마음 속에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도 한다는 것은 그게 밖에 있는 것으로 알고 그걸 바꾼다는 말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그 번뇌의 대상과 화해를 하고 내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대상에 대해서 제도를 했어도 한 중생도 제도된 중생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제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남도 생기고 대상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 '그 마음을 항복 받는가?' 즉' 마음이 계속 일어나는 것을 멈추는가?'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도해야 할까요?
우암은 자비희사로 제도를 합니다.
대상이 된 존재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 연민의 마음, mudita의 마음(만족의 마음?), 평정의 마음으로 바라다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中道(majjhima-paṭipad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