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암은 빨리어 경전을 번역하는 작업을 통해서 불교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암의 빨리어 공부 방법은 매우 무식하며 독특합니다.
그래서 기존 니까야 번역과는 매우 (혁신적으로?^^) 다른 번역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불경 공부를 하다가 마주친 개념이 금강경 묘행무주분에 나오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입니다.
그 의미는 선행을 할 때는 내가 선행한다는 생색을 내지 말고 선행하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지만 그 선행을 한 자가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은 당연한 것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나'라는 개념에 사로잡혀서
육처(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나'를 만족시켜야 한다면서
온갖 번뇌를 일으키면서 하인처럼 살고 있으니,
그 나라는 개념, 환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마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우암이 니까야를 읽다가 바로 무주상보시에 해당하는 빨리어 단어를 찾은 것 같습니다!^^
그 단어는 upādāna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취착, 집착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암은 이 단어가 무주상보시와 같다고 할까요?
upādāna : [nt.] grasping; attachment, 취착, 집착, 연료
우암은 파자(破字)를 통해서 빨리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upādāna를 파자해 보면 다음과 같은 구조입니다.
u (일으키다.) + pā (향하다.) + dāna (보시)
dāna: [nt.] gift; charity; alms; alms-giving, 보시, 자선
즉 upādāna를 파자해 볼 때 나타나는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보시를 일으켜 향한다는 것이니
단순히 '보시를 하다.'란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뜻이 니까야에서는 취착이나 집착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upādāna에서 dāna는 보시라기 보다는 '보시했다는 생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혹은 dāna를 말 그대로 보시로 읽는다면
사람들은 왜 보시를 하려고 하는가? 그 의도가 무엇일까?에 촛점을 맞춰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시를 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무조건 주고 싶을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을 보았을 때 연민심이 일어났을 수 있습니다.
또는 이리 저리 궁리해 보아 보시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인데, 미래생을 위해 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일반적인 사람이 '내 것'을 '남'에게 주었을 때는
'내가 그에게 주었다'는 마음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비록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고 내가 자발적으로 준 것일지라도
그 보시를 받은 사람이 후에 섭섭한 행동을 하게되면
'어떻게 보시했던 나에게 그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어!'하면서 원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보시한 자'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이게 업(kamma)입니다. 그래서 윤회(saṃsāra)합니다.
보시란 남을 위하는 선한 행동입니다.
나와 남에게 부끄러울게 전혀 없고 자기가 만족하고 남이 칭송할 일입니다.
이런 '나라는 존재'가 착함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에 마저
수행자라면 그 착한 나를 내려 놓으란 가르침이 무주상보시라고 우암은 이해합니다.
보시를 하게 되면 '내가 보시했다.'라는 강한 집착이 생기니
보시하다란 단어인 upādāna가 집착하다란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따라서 upādāna의 속 뜻은 '보시를 할 때는 집착없이 보시하라!'는 것으로 읽었고
그래서 무주상보시와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한편 보시를 나타내는 dāna라는 것도 파자가 가능합니다.
파자를 한 의미는 '묶이지 않는다.'입니다.
dāna : 묶이지(dā) 않는다(na)
dā 1.(=dad),(= 巴dad, dā)给,惠施(give);2./ di, =divide=划分;=share=分配,共用3./ di, =bind=束缚;4.=clear=清澈
만약 내 것이란 생각에 묶여있다면 결코 보시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dāna가 보시가 된 모양입니다.
윤회란 단어인 saṃsāra는 '나라는 존재와 함께 즐긴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saṃ(모든) + sā(함께) + ra(즐기다)
sā(함께)란 단어는 나(atta)를 전제한 단어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관찰할 때, '나'라는 "가상의(개념의) 존재"를 상정합니다.
부처님께선 그 나가 존재의 실상이 아니라 환상(maya)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maya를 파자해 보면 계교해서(ma) 이루어진 것(ya)이란 뜻입니다.
업으로 번역되는 kamma는 (이 몸이 나인줄 알고 만족스러운 느낌을 위해) 계교함을 즐겨한 것이란 뜻입니다.
kam(환희하다) + ma(계교하다.)
금강경 제4 妙行無住分 (묘행무주분)
復次 須菩堤,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 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 布施.
부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 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 보시.
須菩堤,菩薩應如是布施 不住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수보리,보살응여시보시 부주상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양
須菩堤,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 不. 佛也世尊.
수보리,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 부. 불야세존.
須菩堤 南西北方 四維 上下虛空 可思量 不. 佛也世尊.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 상하허공 가사량 부. 불야세존.
須菩堤,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堤,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금강경 제 4 묘행무주분
"다시 수보리야, 보살이 법에 응당히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할 것이니,
이른바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 것이며,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지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머물지 말 것이니 까닭이 무엇인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을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동쪽 허공을 가히 사량할 수가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사유상하의 허공을 가히 생각해 헤아릴 수 있겠는가?”
“못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의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그러해서 가히 사량할 수 없나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응당히 가르친 대로 머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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