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히 윤회(輪廻 saṃsāra, vaṭṭa)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어떤 나쁘다고 판단되는 일이 발생하면 전생을 운운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과정에 나타나는 삼명(tevijja; 宿命,天眼,漏尽)의 과정을 보면,
부처님 당신의 전생을 보시고(숙명), 다른 사람의 운명도 알게 되시고(천안) 나서
번뇌에서 풀려나셨다고 나타납니다.
우암은 이러한 부처님의 숙명통, 천안통의 과정이 연기법을 아시게 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선 M2 모든 번뇌의 경에서 전생에 대해, 혹은 미래생에 대해 (혹은 존재라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처님께선 왜 당신의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숙명통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지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다음 생에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 지를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도 일대사인연을 푸실 때(누진) 당신의 전생을 보시게 되니까요! 그것도 10만 전생까지...
우암이 추정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숙명통이란 '내가 있다.'를 전제(前提)하고 있기 때문에 추구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다고 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앎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직 모를 뿐'입니다.
마음 상태가 '대상과 나에 대해 알아야 겠다는 것' 조차 내려 놓게 되면
그 때 비로서 나타나는 것이 삼명이란 것입니다.
우암이 이해한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 (금강경식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이 펼쳐지는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음의 상태를 조절하여 탐욕과 진에(瞋恚)를 벗어나기 위해
①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상” (일체 중생;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 (有色), 무색 (無色), 유상 (有想), 무상 (無想), 비유상비무상 (非有想非無想))을 내려 놓고,
② 그것을 내려 놓는 “주관”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마저 내려 놓으라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우암이 중언 부언을 해 보자면
나라는 존재를 상정하면 마음이 고요해지지 못하고
그래서 번뇌가 끊이질 않으니
부처님께서 경험한 경지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하착(放下着; 내려 놓으라) 입니다.
나(주관)도 내려 놓고 대상(객관)도 내려 놓으라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존재"로 보는 것이 사견(邪見; 잘못된 견해)라고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전생을 알고 싶다면, 전생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삼명이 나타나는 경
맛지마니까야 M4. 두려움과 공포의 경 Bhayabheravasutta- 전재성님역
숙명통(pubbenivāsānussatiñāṇā)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 네 번 태어나고 다섯 법 태어나고 열 번 태어나고 스무 번 태어나고 서른 번 태어나고 마흔 번 태어나고 쉰 번 태어나고 백 번 태어나고 천 번 태어나고 십만 번 태어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고, 나는 그 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는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다. 그 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합니다.
천안통 (cutūpapātañāṇā)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 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어떤 뭇 삶들은 신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고 잘못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뭇 삶들은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 것이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 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알았습니다.
존재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쳐 주시는 경
M2 모든 번뇌의 경(Sabbāsavasutta)
9. 마음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
Tassa amanasikaraṇīyānaṃ dhammānaṃ manasikārā manasikaraṇīyānaṃ dhammānaṃ amanasikārā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그는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기울인다.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So evaṃ ayoniso manasi karoti:
‘ahosiṃ nu kho ahaṃ atītamaddhānaṃ?
Na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iṃ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athaṃ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iṃ hutvā kiṃ ahosiṃ nu kho ahaṃ atītamaddhānaṃ?
Bhavissāmi nu kho ahaṃ anāgatamaddhānaṃ?
Na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iṃ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athaṃ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iṃ hutvā kiṃ bhavissāmi nu kho ahaṃ anāgatamaddhānan’ti?
Etarahi vā paccuppannamaddhānaṃ ajjhattaṃ kathaṃkathī hoti:
‘ahaṃ nu khosmi?
No nu khosmi?
Kiṃ nu khosmi?
Kathaṃ nu khosmi?
Ayaṃ nu kho satto kuto āgato?
So kuhiṃ gāmī bhavissatī’ti?
ahosi: [aor. of hoti] existed; was, hoti の aor. ahosi-kamma 既有業
atītamaddhāna: [atīta+addhāna]
atīta: [adj.] past; gone by. (m.), the past, 已過去的, 過去的, 過去
addhāna: a long path, time, or journey; highroad, ① 時間, 世. ② 行路, 旅行
dhana: [nt.] wealth, riches
ad, (巴ad), 吃(eat)。
kathaṃ: [adv.] how? kathaṃkathā : [f.] doubt; uncertainty.。 如何?
hutvā: [abs. of hoti] having been, bhavati の ger., 有了,是了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기울이면,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난다.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이와 같이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Tassa evaṃ ayoniso manasikaroto channaṃ diṭṭhīnaṃ aññatarā diṭṭhi uppajjati.
‘Atthi me attā’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natthi me attā’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attanāva attānaṃ sañjānāmī’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attanāva anattānaṃ sañjānāmī’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anattanāva attānaṃ sañjānāmī’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atha vā panassa evaṃ diṭṭhi hoti:
‘yo me ayaṃ attā vado vedeyyo tatra tatra kalyāṇapāpakānaṃ kammānaṃ vipākaṃ paṭisaṃvedeti so kho pana me ayaṃ attā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tī’ti.
비구들이여, 이것을
견해의 심취,
견해의 정글,
견해의 험로,
견해의 왜곡,
견해의 몸부림,
견해의 결박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견해의 결박에 묶인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Idaṃ vuccati, bhikkhave,
diṭṭhigataṃ
diṭṭhigahanaṃ
diṭṭhikantāraṃ
diṭṭhivisūkaṃ
diṭṭhivipphanditaṃ
diṭṭhisaṃyojanaṃ.
Diṭṭhisaṃyojanasaṃyutto,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na parimuccati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na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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