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는 상견과 단견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십니다.
S12:17 나체 수행자 깟사빠의 경
9. ‘그가 짓고 그가 경험한다.’고 하면 (So karoti so paṭisaṃvedayatī)
이는 처음부터 존재해서 ‘괴로움은 스스로 짓는다.’라는 주장이 되며 이것은 상견에 떨어지게 된다.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경험한다.’고 하면 (Añño karoti añño paṭisaṃvedayatī)
이는 느낌에 압도된 자가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는 주장이 되며 이것은 단견에 떨어지게 된다.
10. 여래는 이러한 양 극단에 의지하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S12: 18 띰바루까 경
5. ‘느낌과 느끼는 자가 같다.’고 한다면 (Sā vedanā, so vedayatī)
이는 처음부터 존재해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짓는다.’는 것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느낌과 느끼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Aññā vedanā, añño vedayatī)
이는 느낌에 압도된 자가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는 것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6. 여래는 이러한 양 극단에 의지하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그런데 세존께서 숙명통을 이야기하실 때를 보면 정말 아나타인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원하는 만큼 수 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나는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즐거움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서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즐거움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
세존께서는 과거의 경험을 갖고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설명해 주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나타란 무엇일까요?
세존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아나타란
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조건 지워진 존재란 것이 아닐까요?
즉 변치 않는 나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흐름(촛불)'으로서 과거의 기억이 있으며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다 조건 지워진 것이지
변치않는 자아가 겪게되는 경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변치않는 자아'라는 생각을 갖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짚기 위해서는 상견과 단견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가 왜 문제가 될까요? 이것이 왜 상견일까요?
오온을 나라고 하면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 됩니다.
세상의 경험이 즉 '색수상행식'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각기 경험이 다릅니다.
심지어는 같은 경계를 접하면서도 그에 따른 생각은 각기 다르죠.
그런 다름이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되겠지요.
그래서 오온의 다름을, 즉 하나의 독특한 세상의 경험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취온입니다.
문제는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고 하면, 항상하는 고정된 주체(자아)를 가정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전개시키는 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 짓는가?
내가 짓는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이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존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것인가?
그 세상을 경험하는 내게 유리하도록 살 것이다.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는데 어떤 것이 내게 유리한 것인가?
현재뿐만 아니라 내세에도 유리하게 되도록 '내 깜냥(견해)대로' 그렇게 살겠다.
'나라는 것이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다'라는 생각은 인류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이러한 개념을 갖고있습니다. (선언하고 있지는 못하지만...왜냐하면 너무 당연해서^^)
그런데 세존께서는 이러한 '나'라는 개념이 잘못되었다고 알려 주신겁니다!
우리는 존재를 상정하는 순간 곧바로 고정된 실체라는 개념에 빠져버립니다.
식이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존재의 개념을 실체화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과정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M1 근본법문의 경
§4 배우지 못한 사람은,
땅을 땅으로 여기고 pathaviṃ pathavito sañjānāti pathavi; 땅(地)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pathaviṃ pathavito saññatvā saññatvā 인식 (想)
땅을 생각하고 pathaviṃ maññati maññati; √man:생각하다. 왜곡된 사유
땅 가운데 생각하고 pathaviyā maññati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pathavito maññati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pathaviṃ meti maññati. me : to me; my; mine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 pathaviṃ abhinandati. abhinandati : rejoices at
이 가르침에서 첫째로 제가 주목한 점은, 본 주제에서 벗어나기는 하지만, 인지 과정입니다.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즉 생각(의근의 작용 ma??ati)하기 전에 경향성(습 saññatvā)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과거 경험이 작동하고 (saññatvā)
그 기반 위에서 의식이 작용해서(maññati) '탐진치'를 강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경향성이 12연기에서 무명-행-식 에 해당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세존께서 알려주신 우리 모습이란
강물과 같이 계속 흐르는 것이고 그래서 무엇하나 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오온을 나라고 상정하고 그것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기반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취온)
우리의 문제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 오온을 나로 여기는 것에 있습니다.
오감의 대상을 개념화시키면서 주객으로 나누고 그 기반위에서 '생각'을 전개시키는 것입니다.
그 움켜쥔 생각을 기반으로 해서 그것을 실체로 인정하고는 그 다음 생각을 전개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덕택에' 우리는 우리의 본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을 번뇌, 오염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내려 놓으라는 겁니다.
생각을 멈추라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멈추려하면 그 멈추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입하려는 주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남을 바라다 보라고만 하신 겁니다.
생각이 번져나가는 것을 문지기로서 바라다 보라고 알려주신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란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할이 있는 것입니다. 몽둥이가 있는 것입니다.
개념이 붙을 여지가 없는 지금 이 순간이란 말입니다.
한 생각 이전이란 말입니다. 말(생각)의 머리(화두)란 말입니다.
생각이 번뇌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 본래 그 자리겠지요.
세존께서는 항상 무상(anicca)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무엇도 쥘 수 없음을 항상 알려주셨습니다.
그 무상한 것을 '나'라고 할 수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경계를 마치 영화 Matrix의 가상 세계처럼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만약 경계를 실체로 본다면 (상견) 실체의 생각에 빠져들어 본래 그 자리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문제는 결국 또 다시 실체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한계겠지요.^^)
오취온이 내가 아니란 가르침은 바로 고정된 실체로서 항상하는 내가 아니란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온을 나라고 간주하는 순간,
모든 것이 실체화되면서 사바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견에 빠지지 말라고 알려 주신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이 짓고 남이 받는 것'을 세존께서는 단견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남이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 할까요?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 '가짜 나(가아)'라고 한다면
그리고 '진아(아트만)'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지금 내가 하고있고 겪고있는 일들은 모두 진아와는 무관한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은 '남이 짓고 남이 받는 것'이 됩니다.
즉 진아와는 무관한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인 가아는 단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견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겠지요.
세존께서는 우리가 이런 자세를 갖게 되는 이유를
'느낌에 압도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내 앞에 펼쳐진 경계의 현실에 압도되어서 도피를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존께서 알려주신 가르침은 세상을 12연기의 흐름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이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majjhena)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상견과 단견 두 극단은 모두 '나'를 근거로 한 생각에서 내려진 판단 결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그런 결론을 얻게 되는 지를 살펴보고
생각 이전 자리를 간수해 나가라는 것이 세존의 가르침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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