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 중도란 팔정도라고 알려 주셨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중도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개념을 헷갈려 한다. 그래서 여러 해설들이 나왔다. - 단상중도, 유무중도, 고락중도... http://blog.daum.net/bolee591/16156028 을 참고하기 바란다. 중도를 한 마디로 현대적인 언어로 꿰찰 수는 없을까? 주관(나)과 객관(세상)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도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이 팔정도가 아닐까? 예를 들어보자! 단상에 대해 중도란 무엇인가? 존재는 항상한다! 그렇지 않다! 단멸한다! 이 논쟁을 얼핏 잘못 이해하면 항상과 단멸의 문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다. 이 문제는 존재라는 것을 가정하고 그것의 단과 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존재를 가정하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중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락 중도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중생은 느낌에서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봐야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를 반대로 추구하는 일단의 고행주의자가 나타난다. 어찌 보면 고행주의는 단순히 즐거움 추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고통 속에서 마음이 고통에 휩쓸리지 않게 간수할 수 있는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 보았지만 고행주의자들은 몸만 힘들게 했을 뿐 여전히 인생의 의미를 알 길이 없었다. 세존께서 보살로서 고행하셨을 때와 같이… 이러한 두 태도의 문제는 즐거움, 괴로움이라는 느낌에 대해서 그것을 아는 주체인 ‘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즉 느낌이란 '나라는 존재의 기반 위에서 나타나는 태도'이기 때문에 여전히 att?(자아)의 관점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나’라는 집착인 오취온에 기반한 것이므로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고 내가 느끼는 괴로움이기 때문에 느낌에 대해서 나라는 관점이 살아있는 한 쪽으로 치우친 관점이기 때문에 두 의견 모두 중도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세존의 가르침이 즐거움도 취하지 않고 괴로움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 중간 어디에 쯤 있어서 중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라는 관점을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식이 머물지 않으셨기 때문에) 중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유무중도 또한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란 선언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도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중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질문이 중도에서 벗어난 이유는 바로 '모든 것'이란 대상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즉 중도에서 벗어난 것이란 '나'라는 주관 혹은 '세상'이라는 객관을 설정하고 그 것의 특징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도란 이러한 주관 객관을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위의 예를 벗어나는 다른 중도에 대해서도 한번 이런 관점을 적용해 보기 바란다. 한편 세존께서 대답하시지 않은 질문들을 모아서 십사무기(十事無記)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십무기(無記, avyakata)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sassato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sassato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세계는 유한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ntavā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세계는 유한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nantavā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영혼과 육체는 같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taṃ jīvaṃ taṃ sarīraṃ,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ṃ,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ca na c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 즉 십사무기를 정리해본다면 1-4은 시공간의 유한 무한에 대한 것이다. 5, 6은 영혼과 육체에 대한 문제이다. 과연 영혼이란 무엇인가? 7-10은 여래의 사후 존재 문제 이다. 왜 여기에 대해서 앎과 봄이 있으신 세존께서 대답하지 않으셨을까? 이 모든 것이 나라는 주관과 세상이라는 객관이 존재한다라는 '한 생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중생이라는 '생각'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기때문에 즉 십사무기란 중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런 내용을 중생이 잘 이해하지 못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M72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밧차여, 그러한 말들이 그대를 의혹에 떨어지게 하고, 그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밧차여, 이 가르침은 깊고, 심오하여,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와 같이다른 견해를 갖고, 다른 가르침을 수용하고, 다른 경향을 가지고, 다른 수행을 하고, 다른 스승을 따르는 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은 존재하고 나도 존재한다는 확고한 '한 생각'에 기반한 사람은 세존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십무기에 빠질 때 나타나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M63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 (Cūḷamālukyasuttaṃ) §22 그것은 유익하지 않고, 청정한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멀리 여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이 '한 생각'이란 것을 알려주시고 그 생각 내려 놓으라고 알려 주신 것인데 주관과 객관을 꽉~ 쥐고 있는 중생은 이런 사실을 알리가 없다는 것이다. 십사무기에 대해서 경책을 주시는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M25 미끼의 경 (Nivāpasuttaṃ) 비록 청정한 생활을 하더라도 십무기라는 잘못된 견해에 빠지면 악마의 힘과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13) §10 미끼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 사냥꾼은 악마, 사냥꾼 무리는 악마의 무리, 사슴 무리는 수행자나 성직자를 비유한 것이다. §11 악마가 놓은 미끼에 빠져들어 세상의 음식에 뛰어들어 넋을 읽고 음식을 먹어 치우고, 도취하고, 방일하여 악마가 바라는 대로 사로잡혔다. 그는 악마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12 두 번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첫 번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경우를 생각해서, 모든 놓아진 미끼를 피하고 공포의 향락물을 피하고 숲 속으로 들어감. 숲 속은 먹을 것이 충분치 않아 몸이 수척하고 기력이 쇠진하자 마음에 의한 해탈을 잃어버리고 미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옴. 악마가 놓은 미끼에 빠져들어 세상의 음식에 뛰어들어 넋을 읽고 음식을 먹어 치우고, 도취하고, 방일하여 악마가 바라는 대로 사로잡혔다. 그는 악마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13 세 번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첫 번째, 두 번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경우를 생각해서, 악마가 놓은 미끼에 의지해서 살 곳을 마련함. 악마가 놓은 미끼에 경솔하게 뛰어들지 않고 넋을 잃지 않고 음식을 먹어 치우고, 음식을 먹은 뒤에 도취하지 않고, 방일에 빠지지 않고, 미끼에 걸려들지 않아 사로잡히지 않음. 그러나 그들에게 십무기의 견해가 생겨나 악마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나는데 실패하는 이유가 됨. 그는 악마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14 네 번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첫 번째~세 번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경우를 생각해서, 악마의 무리들이 오지 않는 곳에 살 곳을 만듬. 악마가 놓은 미끼에 경솔하게 뛰어들지 않고 넋을 잃지 않고 음식을 먹어 치우고, 음식을 먹은 뒤에 도취하지 않고, 방일에 빠지지 않고, 미끼에 걸려들지 않아 사로잡히지 않음. 그는 악마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악마를 눈 멀게 만들었으니, 악마의 눈을 뽑아 악마가 볼 수 없게 만드는 자(§15~22) §15 악마나 악마의 무리들이 올 수 없는 곳은 어디인가? 초선을 성취한 자 §16 이선을 성취한 자 §17 삼선을 성취한 자 §18 사선을 성취한 자 §19 공무변처를 성취한 자 §20 식무변처를 성취한 자 §21 무소유처를 성취한 자 §22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한 자 악마를 눈 멀게 만들었으니, 악마의 눈을 뽑아 악마가 볼 수 없게 만들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뛰어넘은 자라고 함. (§23) §23 상수멸정을 성취한자 중도의 삶- 지금 이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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