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Attadipa, 나라는 섬? 섬같은 나?

우암(雨庵) 2015. 2. 21. 12:03

세존께서는
(괴로움의 파도가 휘몰아 치는 바다에서)
나라는 섬에 머무르라고 하셨다.
내가 피난처이고 다른 것이 피난처가 아니라고 하셨다.
법이 섬이고 법이 피난처이고 다른 피난처가 아니라고 하셨다.


Bhikkhus, dwell with yourselves as an island, with yourselves as a refuge, with no other refuge; with the Dhamma as an island, with the Dhamma as a refuge, with no other refuge.

Attad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viharatha = ( vihara + atha ) atha 主动态(act.)%复数(p.)%现在式(pr.),祈使/命令(imp.)%人称(2)
vihāra: 'abode'
saraṇa : [nt.] protection; help; refuge; a shelter 피난처
añña : 'other', being of the opposite category
anañña : na+añña

대체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한 마디로
'나'라고 믿는 신수심법(색수상식)에서 수행을 해서 섬과 같은 흔들림이 없는 피난처를 찾으라는 말씀이 아닐까?,

세존께서는
자신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셨다. 또한 법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자신’과 ‘법’을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고 법이란 무엇인가?

무아(anatta)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나(atta)를 피난처(saraṇa)으로 삼는단 말인가?
또한 섬이란 무엇이고 피난처란 무엇인가?

세존께서는 중생인 우리가 나(atta)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주신다.

S24:9 세상은 영원함 경(Sassataloka-sutta)

§6 본 것(안 diṭṭhaṃ), 들은 것(이 sutaṃ), 감각한 것(비설신 mutaṃ), 인식한 것(의 viññātaṃ), 얻은(획득한) 것(pattaṃ), 탐구한 것(pariyesitaṃ), 마음으로 고찰한 것(anuvicaritaṃ manasā)

Yampidaṃ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tampi niccaṃ vā aniccaṃ vā

따라서 atta를 이 경으로 해석한다면
이 세상 경험(견문각지)인 atta를 섬으로 삼고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이다.
무슨 말씀이실까?

이 문장의 해석은 S22:43 자신을 섬으로 삼음 경 (Attadīpā-sutta)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존께서는 우리가 괴로움의 근원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고 알려 주신다.
그러면서 atta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근원자리가 섬이되게 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이 말씀은 그 휘몰아치는 고해의 인생 경험에서 흔들림이 없어지는 자리가 있다.
인생 경험이 섬이되고 피난처가 되라는 말씀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이 피난처가 아니다.'라는 말씀은
앞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나'라는 것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찾으라는 말씀이 아닐까?

S22:53 속박 경(Upaya Sutta)

§4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길
'나는 물질과도 다르고 느낌과도 다르고 인식과도 다르고 심리현상들과도 다른 식(viññāta)이 오거나 가거나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자라거나 증장하거나 충만하게 되는 것을 천명하리라.'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에서는 식(나라는 것)이 색수상행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즉 그것 외에 따로 무엇이 있지 않다는 말씀이시다.

따라서 내가 흔들림이 없는 섬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파도가 휘몰아치는 세상을 경험하면서
내 가운데서 (인생 경험에서) 흔들림이 없는 곳을 찾아야 하고
그곳이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하신 것 아닐까?
그리고 그 곳 외에는 다른 특별한 피난처가 따로 없다는 말씀이신 것 아닐까?

다시 말해서 인생의 피난처란
돈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그 누구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이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 가족도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다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상은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인생의 피난처란 바로 '내 삶을 알아차리는 것'이란 말씀이시다.
그리고 곧 바로 법을 섬으로 삼고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신다.

문제는 이 법이 중생의 법인가 아니면 부처님의 법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제 소견으로는 이때의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께서 이 문구를 설명해 주실 때 항상 사념처 수행을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섬 같은 나를, 피난처인 나를 찾는 방법이 사념처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 atta'는 사념처의 신수심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신수심법은 오온의 색수상식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행은 sati의 수행처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행의 수행이란 사여의족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죠.

사념처 수행의 내용을 보면

몸에서 몸을, 느낌에서 느낌을, 마음에서 마음을,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라는 것입니다.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M10 새김 토대에 대한 경)


초기불교를 공부하신 불자라면 많이 들어 보셔서 당연한 내용 같아 보이겠지만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할 것이다.

왜 몸에서 몸을 관찰하라고 하셨는가?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다시 말해 왜 '내'가 몸을 관찰하지 않고 몸에서 몸을 관찰하라고 하셨는가?

주어인 내가 빠지고 '몸에서'가 나온 이유는 수행 상태에서는 주어인 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관찰 대상인 몸과 관찰자인 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각묵 스님 번역)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loke abhijjhādomanassaṃ) 제거하며 (vineyya) (전재성 박사 번역)'는

이미 대상과 나라는 생각에 물들지 말라는 말이다.

깨달음이란 내 인생 가운데 있으며, sati 수행을 통해서 섬 같은 곳, 피난처를 발견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D16 대반열반경 大般涅槃經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짓기를 원하는 비구들은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S22:43 자신을 섬으로 삼음 경 (Attadīpa-sutta)

3. “비구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비구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 자들은 ‘우울, 슬픔, 근심, 절망, 탄식, 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라고 그 근원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은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거룩한 분을 보지 못하고 거룩한 분의 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분의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을 알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여,

그는 물질을 자아라고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진 것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일어난다.


S47:9 병 경(Gilāna-sutta)

8.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9.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문다.
 여기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문다.
 여기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문다.
 여기 비구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10.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 짓기를 원하는 비구들은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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