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이 초기경전을 공부하다 보니 부처님께서 세상을 고통의 바다(苦海)라고 직접 비유하신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에서 바다(samudda)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구절이 우암의 눈에 띄였다. '대체 왜 부처님께서는 바다(samudda)는 바다일 뿐인데 범부들의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하셨을까?'라는 의문이 생기면서 동시에 '중국 한국 등에서 사용되는 해인(海印)이란 단어가 문제가 있는 해석은 아니었을까?'하는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 글을 써 본다.
S35:228 바다 경1 (Samudda-sutta) -우암의 번역 (각묵스님의 번역과 다름!)
2. 비구들이여, ‘바다 바다’라고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말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성자들의 율에서 바다는 그렇지 않다. 거대한 것, 비구들이여, 물이 모여서 거대한 물의 흐름이 된 것이 바다이다.
“‘Samuddo, samuddo’ti,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bhāsati. Neso, bhikkhave, ariyassa vinaye samuddo. Mahā eso, bhikkhave, udakarāsi mahāudakaṇṇavo.
이 경의 내용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사람(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samudda를 단순히 바다라고 이해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뜻'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세존께서는 그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시고
성자들의 율(ariyassa vinaye)에 따라 samudda를 다시 설명해 주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물들이 모여서 거대한 물의 흐름이 된 것(udakarāsi mahāudakaṇṇavo)이 바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잘 못 이해한 samudda란 무엇일까?'
또 '세존께서 물(udaka)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미 인도인에게 samudda(바다)라는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암이 추론해 보건데 그 내용은 아마도 "함무라비 법전(약 4000년 전)에 나타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방식의 도장이 찍히는 인과응보의 윤회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생각은 물질주의자, 단멸론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해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생각 아닌가? 즉 세상이 윤회(saṃsāra)하는 모습이 마치 도장이 찍히듯(mudda) 인과응보로 드러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모든(sam) 도장이 찍히는 곳(mudda)이라고 봤고, 그래서 세상을 바다(samudda)라고 비유하곤 했었을 것 같다는 것이다.
muddā: [f.] a seal; a stamp; an impression; gesture; printing, 印, 印契, 印算, 指算, 暗算, 記号, 符号術
그런데 연기법을 보신 세존께서는 samudda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함을 말씀해주신 것이다.
이렇게 우암이 주장해 볼 수 있는 근거도 있다.
A3:99 소금 덩이 경(Loṇaphala-sutta)
1.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떤 업을 지었건 그 업의 결과를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라고 한다면 청정범행을 닦음도 없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킬 기회도 없다.
따라서 도장이 찍히는 인과응보의 윤회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즉 나라는 주체가 있고 인과응보가 마치 도장이 찍히듯 드러나서 samudda가 아니라 육처의 행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 마치 물들이 쌓여서(모여서) 바다가 된 것과 유사하기에samudda라는 표현을 성자들이 사용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신다는 것이다.
S35:228 바다 경1 (Samudda-sutta) -우암의 번역 (각묵스님의 번역과 완전히 다름!)
3. 눈이란, 비구들이여, 인간에게는 바다(물이 쌓여 있는 것)다. 그것은 색을 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 든 색이 나라는 것의 극복은 이렇게 말해진다. 비구들이여, 눈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파도요, 내가 윤회하며, 내가 집착하는 것이고, 내가 내 모든 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의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은 극단을 벗어나 마른(물이 없는) 땅에 머무는 브라만을 뜻한다.
Cakkhu, bhikkhave, purisassa samuddo; tassa rūpamayo vego. Yo taṃ rūpamayaṃ vegaṃ sa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atari cakkhusamuddaṃ saūmiṃ sāvaṭṭaṃ sagāhaṃ sarakkhasaṃ; tiṇṇo pāraṅ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
(귀-소리, 코-냄새, 혀-맛, 몸-촉각, 의식-법에 대해서 반복됨. 즉 육처(salāyatana)에 대해 설하심.)
이 지점에서 우암이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쌓여있다(集)는 표현이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인데 집(集)은 '고통에는 원인이 있다.'로 해석된다.
우암은 한동안 '대체 왜 고통의 원인을 집(集)이란 단어로 표현하셨을까?' 의문이 들었었다.
오히려 因이 더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위 경을 이해하고 보니 고통의 원인이 육처의 행들이 쌓여있기 때문이라는 이해가 생겼다.
재미있는 점은 이 집(集)을 표현한 팔리어가 samudaya라는 점이다.
이 단어의 발음은 바다를 뜻하는 samudda와 거의 똑같다는 점에 주목하시라!^^
samudaya: [m.] [saṃ-ud-aya<i] rise; origin; produce 集, 集起, 生起, 起因, 原因
samudāya, (m.), a multitude, 多数,大量
따라서 samudaya를 쌓임(集)으로 번역하신 분은 고통의 원인이 육처의 행들이 쌓인 것임(samudda)을 이해하신 상태에서 번역을 하신 것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세존께서 물이라는 단어로 udaka를 사용하셨다.
우암이 '무식하게' 팔리어를 공부하다 생긴 '감'에 따르면^^
uda란 일어나는 모습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집착(da)이 일어나는(u) 이란 뜻이다.
따라서 udaka란 물도 되지만 집착이 일어난 것(uda+ka)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번뇌(煩惱)를 udaka란 물로 표현하셨다는 말이다.
팔리어 āsava는 번뇌로 해석되는데 그 의미는 흐르다(流動的) 혹은 샌다(漏)이며 이 역시 물에 대한 표현임을 주목하시기 바란다.
āsava: [m.] 1. that which flows; 2. spirit; 3. discharge from a sore; 4. ideas which intoxicate the mind. 流動的, 漏, 流漏, 煩惱, 酒, -kkhaya 漏盡\
한편 화엄경에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언급하는데 해인(海印)의 원어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한 모양이다.
우암은 海印이란 단어를 해석해 보려 할 때 '직관적'으로
海印이란 samudda의 두가지 의미 즉 바다라는 것과 (인과응보)의 도장(모든 도장; sam + mudda)이란 의미를 내포한 해석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의 문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samudda의 의미와 해인海印이란 사실상 다른 비유라는 것이다.
크게 볼 때,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다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sabbedhammā 諸法)이고,
해인에서 바다의 의미 역시 온 세상을 뜻한다고 우암은 판단합니다.
문제는 도장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됩니다.
이 문제는 제가 화엄경을 좀 공부한 다음에나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바다가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고통의 바다(苦海)라는 표현은
제행개고(Sabbesaṅkhārā dukkha)이기에 중생에게는 세상이 고해일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처의 행들이 쌓여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결국은 '그것'이 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힘이 아닐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 봅니다.^^
능엄경에는 감관과 대상의 매듭을 푸는 것에 대한 설법, 즉 6처에 대한 설법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S35:228 바다 경1 (Samudda-sutta)
각묵스님 번역
2.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바다, 바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 이 바다라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많은 물의 모임(합쳐진 것)이요, 많은 물의 폭류(거친 흐름)일 뿐이다.”
3. “비구들이여, 인간에게 눈은 바다요 그것의 흐름은 형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형색으로 이루어진 흐름을 감내하는(견디는) 것을 두고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도깨비가 있는 눈의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참된 바라문은 이것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하여 땅 위에 서 있다.
4.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스승이신 선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상어와 도깨비가 살고 험한 파도가 치는
건너기 어려운 저 바다를 건넌 사람
그를 일러 완전한 지혜를 얻은 사람, 청정범행을 완성한 사람
세상의 끝에 도달한 사람, 피안에 이른 사람이라 한다.”
우암 번역
2. 비구들이여, ‘바다 바다’라고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말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성자들의 율에서 바다는 그렇지 않다. 거대한 것, 비구들이여, 물이 모여서 거대한 물의 흐름이 된 것이 바다이다.
3. 눈이란, 비구들이여, 인간에게는 바다(물이 쌓여 있는 것)다. 그것은 색을 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 든 색이 나라는 것의 극복은 이렇게 말해진다. 비구들이여, 눈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파도요, 내가 윤회하며, 내가 집착하는 것이고, 내가 내 모든 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의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은 극단을 벗어나 마른(물이 없는) 땅에 머무는 브라만을 뜻한다.
4.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스승이신 선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이 바다 즉 내가 집착하고, 내가 내 모든 것을 보호해야 하고,
내가 파도이며, 내가 윤회하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건너기 어려우나 이를 건너간 이를
완전한 지혜를 이룬 사람, 청정범행한 사람,
세상의 끝에 도달한 사람, 피안에 이른 사람이라 한다.
팔리어 원문
Saṃyutta Nikāya 35
18. Samuddavagga
228. Paṭhamasamuddasutta
“‘Samuddo, samuddo’ti,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bhāsati. Neso, bhikkhave, ariyassa vinaye samuddo. Mahā eso, bhikkhave, udakarāsi mahāudakaṇṇavo.
Cakkhu, bhikkhave, purisassa samuddo; tassa rūpamayo vego. Yo taṃ rūpamayaṃ vegaṃ sa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atari cakkhusamuddaṃ saūmiṃ sāvaṭṭaṃ sagāhaṃ sarakkhasaṃ; tiṇṇo pāraṅ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
… pe … jivhā, bhikkhave, purisassa samuddo; tassa rasamayo vego. Yo taṃ rasamayaṃ vegaṃ sa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atari jivhāsamuddaṃ saūmiṃ sāvaṭṭaṃ sagāhaṃ sarakkhasaṃ; tiṇṇo pāraṅ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 … pe … mano, bhikkhave, purisassa samuddo; tassa dhammamayo vego. Yo taṃ dhammamayaṃ vegaṃ sa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atari manosamuddaṃ saūmiṃ sāvaṭṭaṃ sagāhaṃ sarakkhasaṃ; tiṇṇo pāraṅ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ti. Idamavoca … pe … satthā:
“Yo imaṃ samuddaṃ sagāhaṃ sarakkhasaṃ,
Saūmiṃ sāvaṭṭaṃ sabhayaṃ duttaraṃ accatari;
Sa vedagū vusitabrahmacariyo,
Lokantagū pāragatoti vucca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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