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알라바까의 경 - 숫다 니빠따

우암(雨庵) 2020. 11. 1. 13:26

우암이 우연히 공부를 하다가

숫다 니빠따의 뱀의 품에 있는 알라바까의 경을 보게 되었다.

 

전재성 박사님의 번역이 아름다워 그 내용을 빨리어로 확인하다 보니

좀 많이 다른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

 

기본적으로 우암은 알라바까(alavaka)를

깨닫기 전의 싯달타 태자 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알라바까는 중생이 할 만한 질문들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재산이 무엇이냐? 라는 등의

또한 그걸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깨달으신 분은

그에 걸 맞는 답변을 주십니다.

 

우암이 알라바까(alavaka)를 깨닫기 전의 싯달타 태자로 본 이유는

알라바까란 이름 때문입니다.

우암은 alavaalaya로 읽었습니다.

따라서 알라바까(alavaka)란 '알라야라는 것(alaya + ka)'로 읽었습니다.

알라야란 우리를 윤회시키는 아뢰야식(함장식 제8식)입니다.

따라서 알라야는 중생입니다. 싯달타 태자로 볼 수 있습니다.

 

ālaya: [m.] 1. abode; roosting place; 2. desire; attachment; 3. pretence, 阿頼耶, 執著, 愛著, 所執處

 

이 경의 앞 부분은 알라야가 세존께 세번이나

들어오라 나가라 시킵니다.

어디로 들어오고 어디로 나간 것일까요?

혹시 이게 윤회가 아닐까요?

 

그런데 세존께서는 네번째에 그 야차의 말을 무시합니다.

 

그러자 알라바까가 질문을 합니다.

우암은 여기부터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이 번역을 해 보면서 세존의 가르침에 감동 또 감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경도 아닌데(?)

그 가르침에 감동 받을 수 밖엔 없었습니다.

몇 마디의 짧은 싯구지만

진리를 깨달으신 분의 깊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암이 아직 빨리어도 미숙하고

한글 표현도 매끄럽지 못해서

제대로 의미가 전달 될 까 걱정도 하면서

가르침의 환희를 칭하여 번역한 내용을 올려 봅니다.

 

참, 우암이 아직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은

이 번역의 마지막 구절인

"만약 진리에 길들여져 놓아 버린다면
인내 보다 이 세상에서 더 나은 것이다."라는 부분입니다.

우암이 추측하건데 일반적으로 당시의 사문 브라만은

'(다음 생을 위해) 참아야 한다.' 라는 말을 많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참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라고 우암은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빨리어 원문과 우암의 번역을 올렸고,

붓다의 옛길에 있는 (blog.daum.net/gikoship/15780700?category=16152) 한글 번역을 올렸고

마지막으로 빨리어 원문을 올렸습니다.

 

 

“Kiṃ sūdha vittaṃ purisassa seṭṭhaṃ,
Kiṃ su suciṇṇaṃ sukhamāvahāti;
Kiṃ su have sādutaraṃ rasānaṃ,
Kathaṃjīviṃ jīvitamāhu seṭṭhaṃ”.

 

§7. [알라바까] 무엇이 이 세상에서 좋은 재산이며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인가요?
무엇을 내가 잘 행동해야 행복이 옵니까?
무엇이 확실하게 더 행복하게 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 합니까?

 

“Saddhīdha vittaṃ purisassa seṭṭhaṃ,
Dhammo suciṇṇo sukhamāvahāti;
Saccaṃ have sādutaraṃ rasānaṃ,
Paññājīviṃ jīvitamāhu seṭṭhaṃ”.

 

§8. [세존] 항상 여기에서라는 재산이 사람에게 최고이며
길들이는(가르침을 주는) 자를 잘 따르는 자에게 행복이 옵니다.
진리(사성제)는 진실로 선(덕)을 뛰어넘는 말씀이며
지혜롭게(반야로) 사는 것이 삶 가운데 최고입니다.

 

“Kathaṃ su tarati oghaṃ,
kathaṃ su tarati aṇṇavaṃ;
Kathaṃ su dukkhamacceti,
kathaṃ su parisujjhati”.

 

§9. [알라바까] 어떻게 잘 (육근의) 폭류를 건너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잘 (전생이 쌓여있는) 바다를 건널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잘 괴로움을 지나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잘 완전히 포기할 수 있습니까?

 

“Saddhāya tarati oghaṃ,
appamādena aṇṇavaṃ;
Vīriyena dukkhamacceti,
paññāya parisujjhati”.

 

§10. [세존] 항상 연민(자비)을 보냄으로서 (육입의 혹은 nimitta 相의) 폭류를 건너고
빠져들지 않음으로써 쌓여 있는 식(anubyanjana)을 해결하고
행위와 분리되어서 괴로움을 지나가고
지혜로서 완전히 잘 내려 놓음을 일으킵니다.

 

“Kathaṃ su labhate paññaṃ,
kathaṃ su vindate dhanaṃ;
Kathaṃ su kittiṃ pappoti,
kathaṃ mittāni ganthati;
Asmā lokā paraṃ lokaṃ,
kathaṃ pecca na socati”.

 

§11. [알라바까] 어떻게 하면 지혜를 얻습니까?
(지혜를 얻으면) 어떻게 재산이 드러납니까?
(지혜를 얻으면) 어떠한 명성(kitti)에 도달합니까?
(지혜를 얻으면) 어떻게 친구와 사귀게 됩니까?
(지혜를 얻으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어떻게 사후에 슬픔을 여의겠습니까?

 

Saddahāno arahataṃ,
dhammaṃ nibbānapattiyā;
Sussūsaṃ labhate paññaṃ,
appamatto vicakkhaṇo.

 

§12. [세존] 열반(번뇌의 불을 끄는 것)에 이르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는 자는
잘 듣고 지혜를 얻어서
휩쓸리지 않는 자, 재난 없는 자가 됩니다.

 

Patirūpakārī dhuravā,
uṭṭhātā vindate dhanaṃ;
Saccena kittiṃ pappoti,
dadaṃ mittāni ganthati

 

§13. 물질을 뛰어넘는 행위로
재산이 빛나게 드러납니다.
(사성제) 진리로 명성에 도달하며
(법을) 보시함으로써 친구와 사귀게 됩니다.

 

Yassete caturo dhammā,
saddhassa gharamesino;
Saccaṃ dhammo dhiti cāgo,
sa ve pecca na socati.

 

§14. 어떠한 현명한 가르침이든
집을 찾는 자를 함께 봅니다.
진리에 길들여진 자는 확고하게 버리는 자입니다.
스스로 정녕코 사후에 슬픔을 여읩니다.

 

Iṅgha aññepi pucchassu,
puthū samaṇabrāhmaṇe;
Yadi saccā damā cāgā,
khantyā bhiyyodha vijjati

 

§15. 이리 와서 진리에 대한 질문을
널리 사문이나 브라만에게 해보시게.
진리에 길들여져 놓아 버리는 것이
인내 보다 이 세상에서 더 나은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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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인 번역

 

10. 알라바카(alavaka) 야차

 

(182)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알라비국 알라바카 야차의 처소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알라바카 야차가 밖에서 돌아 와 스승께 와서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 주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나가셨다.

야차가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 오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들어 가셨다.

또다시 알라바카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 주시오."

"좋다, 친구여." 스승은 다시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 오시오.""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또 들어 가셨다.

세 번째 또 알라바카 야차는 스승에게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 주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 오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들어 가셨다.

네 번째 또 알라바카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 주시오."

이때 스승은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더 나가지 않겠다. 네 할 일이나 하도록 하거라."

 

야차가 말했다.

"사문이여, 제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제게 대답을 못 한다면,

당신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당신의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잡아 갠지스 강 건너로 던져 버리겠소."

스승은 대답했다.

"친구여, 신.악마.범천을 포함한 세계에서, 그리고 사문.바라문.신.인간을 망라한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내 심장을 찢고 내 두 다리를 잡아서 갠지스강 건너로 내던질 만한 자를 나는 아직 보질 못했다.

친구여, 그대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이든 물어보라."

알라바카 야차는 다음의 시로써 스승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입니까?

어떤 선행이 안락을 가져 옵니까?

맛 중에서 참으로 가장 맛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삶 입니까?"

 

(183)

스승은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으뜸가는 재산은 믿음(신앙)이다.

진리를 잘 따르면(덕행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온다.

진실이야말로 맛 중의 맛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184)

알라바카 야차가 묻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생사의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어떻게 해서 바다를 건너며 무엇으로 고통을 극복합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습니까?”

 

(185)

스승이 대답하셨다.

“사람은 신앙의 힘으로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 바다를 건너며,

근면으로써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지혜로써 완전히 맑고 깨끗해진다.”

 

(186)

야차가 물었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 지혜를 얻습니까?

어떻게 해서 재물을 얻고 명성을 떨치며, 어떻게 해서 친구를 사귑니까?

또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을 때 걱정이 없겠습니까(슬퍼하지 않겠습니까)?”

 

(187)

스승은 대답했다.

“성자들이 열반을 얻는 이치를 믿고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그 가르침을 들으려는 열망에 의해서 지혜를 얻는다.

 

(188)

적절하게 일을 하고 참을성 있게 노력하는 이는 재물을 얻는다.

성실을 다하면 명성을 떨치고, 무엇인가를 베품으로서 친구를 사귄다.

 

(189)

깊은 신앙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성실, 자제, 인내와 보시의 네 가지 덕이 있으면,

그는 내세에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190)

만일 이 세상에 성실, 자제, 인내, 보시보다 너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널리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물어보라.”

 

(191)

알라바카 야차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다시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널리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세상에 이익 되는 일을 깨달았습니다.

 

(192)

아, 깨달으신 분께서 알라비에 살러 오신 것은, 저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저는 남에게 베풀면 어째서 위대한 열매(과보)가 얻어지는가를 알았습니다.

 

(193)

저는 시골에서 시골로, 도시에서 도시로 돌아 다니겠습니다.

깨달으신 분과 진리의 뛰어남에 예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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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어 원문

 

Sutta Nipāta 1.10

 

Āḷavakasutta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āḷaviyaṃ viharati āḷavakassa yakkhassa bhavane. Atha kho āḷavako yakkh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etadavoca: “nikkhama, samaṇā”ti. “Sādhāvuso”ti bhagavā nikkhami. “Pavisa, samaṇā”ti. “Sādhāvuso”ti bhagavā pāvisi.

 

Dutiyampi kho … pe … tatiyampi kho āḷavako yakkho bhagavantaṃ etadavoca: “nikkhama, samaṇā”ti. “Sādhāvuso”ti bhagavā nikkhami. “Pavisa, samaṇā”ti. “Sādhāvuso”ti bhagavā pāvisi.

 

Catutthampi kho āḷavako yakkho bhagavantaṃ etadavoca: “nikkhama, samaṇā”ti. “Na khvāhaṃ taṃ, āvuso, nikkhamissāmi. Yaṃ te karaṇīyaṃ, taṃ karohī”ti.

 

“Pañhaṃ taṃ, samaṇa, pucchissāmi. Sace me na byākarissasi, cittaṃ vā te khipissāmi, hadayaṃ vā te phālessāmi, pādesu vā gahetvā pāragaṅgāya khipissāmī”ti.

 

“Na khvāhaṃ taṃ, āvuso, passāmi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yo me cittaṃ vā khipeyya hadayaṃ vā phāleyya pādesu vā gahetvā pāragaṅgāya khipeyya. Api ca tvaṃ, āvuso, puccha yadākaṅkhasī”ti. Atha kho āḷavako yakkho bhagavantaṃ gāthāya ajjhabhāsi:

 

“Kiṃ sūdha vittaṃ purisassa seṭṭhaṃ,
Kiṃ su suciṇṇaṃ sukhamāvahāti;
Kiṃ su have sādutaraṃ rasānaṃ,
Kathaṃjīviṃ jīvitamāhu seṭṭhaṃ”.

 

“Saddhīdha vittaṃ purisassa seṭṭhaṃ,
Dhammo suciṇṇo sukhamāvahāti;
Saccaṃ have sādutaraṃ rasānaṃ,
Paññājīviṃ jīvitamāhu seṭṭhaṃ”.

 

“Kathaṃ su tarati oghaṃ,
kathaṃ su tarati aṇṇavaṃ;
Kathaṃ su dukkhamacceti,
kathaṃ su parisujjhati”.

 

“Saddhāya tarati oghaṃ,
appamādena aṇṇavaṃ;
Vīriyena dukkhamacceti,
paññāya parisujjhati”.

 

“Kathaṃ su labhate paññaṃ,
kathaṃ su vindate dhanaṃ;
Kathaṃ su kittiṃ pappoti,
kathaṃ mittāni ganthati;
Asmā lokā paraṃ lokaṃ,
kathaṃ pecca na socati”.

 

“Saddahāno arahataṃ,
dhammaṃ nibbānapattiyā;
Sussūsaṃ labhate paññaṃ,
appamatto vicakkhaṇo.

 

Patirūpakārī dhuravā,
uṭṭhātā vindate dhanaṃ;
Saccena kittiṃ pappoti,
dadaṃ mittāni ganthati.

 

Yassete caturo dhammā,
saddhassa gharamesino;
Saccaṃ dhammo dhiti cāgo,
sa ve pecca na socati.

 

Iṅgha aññepi pucchassu,
puthū samaṇabrāhmaṇe;
Yadi saccā damā cāgā,
khantyā bhiyyodha vijjati”.

 

“Kathaṃ nu dāni puccheyyaṃ,
Puthū samaṇabrāhmaṇe;
Yohaṃ ajja pajānāmi,
Yo attho samparāyiko.

 

Atthāya vata me buddho,
­Vāsāyā­ḷavi­māgamā;
Yohaṃ ajja pajānāmi,
Yattha dinnaṃ mahapphalaṃ.

 

So ahaṃ vicarissāmi,
Gāmā gāmaṃ purā puraṃ;
Namassamāno sambuddhaṃ,
Dhammassa ca sudhammatan”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