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참회란 무엇일까?

우암(雨庵) 2015. 2. 21. 12:30

참회란 무엇일까?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나도 없고

억울해 하는(적의를 내는) 나도 없는

‘오온이 라는 한 생각에서 풀려나는 것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는 참회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아마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살다 보면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잘못에 대해서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참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초기 경전 니까야에는 참회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참회라는 단어를 팔리어로 찾아보려 하니 그런 단어가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겠다.잘못을 드러냄(S1:35 accayam desayantinam), 혹은 용서받지 못함(AN 8.7 atekiccho) 이란 뜻에서 유추해서 번역자들이 참회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tekiccha : [adj.] curable; one who can be pardoned 可医治的,可被宽恕的人, a: not

 

초기 경전에서는 오히려 후회(, kukkucca)가 삼매에 드는데 방해하는 요소인 오개 안에 포함되어 있다. 후회란 들뜸(, uddhacca)과 함께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바람에 흔들리고 움직이고 소용돌이치고 물결치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로 묘사된다.

 

부처님 당시에도 전생에 대한 참회를 통해서 더 높은 경지를 얻으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신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M101 데바다하의 경 (Devadahasutta)

 

- 니간타들(자이나교)의 교리-견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경험하는 모든 것은 전생의 업에 기인.

그래서 전생의 업을 고행으로 없애버리고 (Iti pur???na? kamm?na? tapas? byant?bh?v?)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고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음으로써 업을 파괴하고,

업을 파괴함으로써 괴로움을 부수고

괴로움을 부숨으로써 느낌을 부수고

느낌을 부숨으로써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 부처님의 논박

우리는 전생에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전생에 악업을 저질렀는지 저지르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이러이러 해서 악업을 짓는다.’는 것도 모르고,

이와 같이 악업이 소멸되었고, 이와 같이 악업이 소멸될 것이고, 이와 같이 괴로움이 소멸되었고, 이와 같이 괴로움이 소멸될 것이다.’라는 것도 모르고,

지금 여기에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는 것에 대하여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니간타들의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이 말씀은 니간타들의 고행에 대해서 비판하신 말씀이시지만

어찌되었든 이치를 알지 못하면서 고행(참회)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신다.

 

그렇다면 현대의 우리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전생에 대해 참회를 한다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의미가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왜 대승 불교권에서는 참회가 중요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참회란 나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남의 잘못에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좀더 풀어서 설명해 본다면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란

우리가 나의 육근을 즐겁게 해 주려고 노골적으로 그것을 신구의로 추구하는 경우인데,

 

만약 우리가 윤회하는 존재라면, 그리고 깨닫지 못한 존재라면

그 길고 긴 세월 속에서 실타래처럼 엉킨 인연이

결국 현재의 모습을 가져왔을 것이기에

내가 육근의 즐거움을 추구한 것을 참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이 육근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연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철저하게 깨닫지 못했다면

'나'만 참회하는 것이 억울할 것이다.

세상사람 누구나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왜 나만 못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억울함이(적의가) 생겨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진짜 참회란

육근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나도 없고 억울해 하는(적의를 내는) 나도 없는

‘오온이 라는 한 생각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그리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으로 그들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가 이해한 바를 쓰지만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제 수준에서는 이런 수희함을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수희란 결국 또 다시 대상이 있고 내가 있는 상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수희를 해 줄 경우는 대부분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경우일 수 있은데

이때 '나'가 살아있어서 적의를 품게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이야기들은 아마도 대승불교 쪽의 태도인 것 같다.

또한 이 내용은 성경의 왼 빰을 맞거든 오른 빰을 내주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참으로 세세생생 우리의 인연은 얼마나 얽키고 설켜 있길래......이리 괴로움을 주는가?

참회란 그 괴로움의 실타래를 이번 기회에 끊으라는 말씀으로 보인다.

 

S1:35 허점을 찾는 자 경 (Ujjhānasaññi­sutta)

 

"만약 잘못을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해주지 않고

가슴에 화를 품고, 증오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원한을 강하게 품는 것입니다."

 

[세존]

“여기 이 경우에는 잘못이란 없었고

죄과(罪過)를 범한 것이 본래부터 없었으니

증오 역시 이미 만일 가라앉아 버렸다면

이 경우에 그는 결코 비난받지 않습니다.”

 

[천신]

“누가 잘못이 없고

누가 허물이 없으며

누가 미혹에 떨어지지 않으며

누가 항상 마음챙기는 현자입니까?”

 

[세존]

“여래요, 깨달은 자요, 모든 존재를 연민하는 자.

그에게는 잘못도 없고 허물 또한 없습니다.

실로 그는 미혹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가 바로 항상 마음챙기는 현자입니다.

 

잘못을 드러내는 자들을 두고

받아들여 섭수치 않는 그 자는

안으로 분노 품어 성냄에 싸여

그는 분명 증오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증오를 즐기는 자 아니니

그러므로 그대들의 잘못을 섭수(용서)합니다.”

 

If one does not grant pardon
To those who confess transgression,
Angry at heart, intent on hate,
One strongly harbours enmity.”

 

The Blessed one:

If there was no transgression,
If here there was no going astray,
And if enmities were appeased,
Then one would be faultless here.”

 

A devat?:

For whom are there no transgressions?
For whom is there no going astray?
Who has not fallen into confusion?
And who is the wise one, ever mindful?” 
sn.i.25

 

The Blessed one:

The Tathagata, the Enlightened one,
Full of compassion for all beings:
For him there are no transgressions,
For him there is no going astray;
He has not fallen into confusion,
And he is the wise one, ever mindful.

 

If one does not grant pardon
To those who confess transgression,
Angry at heart, intent on hate,
One strongly harbours enmity.
In that enmity I do not delight,
Thus I pardon your transgression.”

 

Aññathā santamattānaṃ,
aññathā yo pavedaye;
Nikacca kitavasseva,
bhuttaṃ theyyena tassa taṃ.


Yañhi kayirā tañhi vade,
yaṃ na kayirā na taṃ vade;
Akarontaṃ bhāsamānaṃ,
parijānanti paṇḍitā”ti.


“Na yidaṃ bhāsitamattena,
ekantasavanena vā;
Anukkamitave sakkā,
yāyaṃ paṭipadā daḷhā;
Yāya dhīrā pamuccanti,
jhāyino mārabandhanā.

Na ve dhīrā pakubbanti,
viditvā lokapariyāyaṃ;
Aññāya nibbutā dhīrā,
tiṇṇā loke visattikan”ti




 

六祖壇經 懺悔品 (무비스님)

 

미혹한 이는 복을 빌며 도(道)는 닦지 않나니

오직 복 비는 것을 문득 도(道)라 하네

보시하고 공양 올려 복이야 끝이 없으나

마음속 삼악(三惡)을 원래부터 짓고 있네.

 

복 빌어 죄악을 소멸시키려 한다니

복이야 후세에 받을지언정 죄는 도리어 그대로 남아 있네.

오직 마음 속으로부터 죄연(罪緣)을 떨쳐버려야만

각자의 제 성품 속에서 참으로 참회하는 것이라네.

 

홀연히 대승(大乘)의 참된 참회를 깨닫게 되면

삿된 것 떨치어 올바로 행(行)하매 죄(罪)도 곧 없네.

도(道) 배우려거든 늘 제 성품 살피어 볼지니

모든 부처님들과 더불어 곧 한가지가 되리로다.

 

우리 조사께서 오직 이 돈교법을 전하사

다같이 성품 보아 한 몸 되기 두루 바라심이라

당래(當來)로 법신을 얻고자 할진대

모든 법상(法相) 여의고 마음 속에서 씻을지니라.

 

노력을 거듭하며 제 자신 보기를 게을리 말라

이후 생각 홀연히 끊기는 때 한 세상 끝나나니

만일 대승(大乘)을 깨우쳐서 견성(見性)코자 한다면

정성스레 합장하고 지심(至心)으로 구할지니라.

 

사(師)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식이여.

모름지기 다들 외워 이대로 수행함으로써 말 떨어지자 바로 성품을 보게 된다면 비록 나와 떨어져 천리 밖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같으려니와,

이 말 떨어지는 곳에서 터득치 못하면 얼굴 마주 대하고 있으면서도 천리 거리나 떨어져 있는 것이니, 어찌 바삐 올 까닭이 있으랴?

조심해서 잘들 가거라.” 하시었나니라.

대중이 한꺼번에 법을 듣고 깨우치지 못한 이가 없으니 환희하여 모두 받들어 행(行)하였느니라.

 

천수경의 참회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무비스님 풀이)

죄라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데

마음으로 좇아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이 소멸되면 죄 또한 없어진다.

마음도 없어지고 죄도 없어져서 그 두가지가 함께 공(空)해져서 없어져버릴 때

이것이야 말로 진짜 참회이다.

 

자자(自恣)에서는 수행인의 허물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그래서 참회를 찾아보려 했으나

자자란 안거 해제일, 보름 등의 의미만 있지 참회라는 내용이 없었다.

pavāraṇā : [f.] invitation; a ceremony at the rainy retreat

pavāraṇā:f. [BSk. pravāraṇā, pravāraṇa n. f.] 自恣, 雨安居的修了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