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병에 걸려 있다.
그래서 세상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잘못된 인식을 근거로 언어를 만들고 생각을 한다.
이 문제를 제기하시고 해법을 주신 분이 부처님이시다.
여실지견을 하도록 수행법을 알려 주신 스승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눈병에 걸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나 attā'라는 것일 것이다.
세존께서는 anattā라고 하셨다.
그런데 anattā[1]를 무아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누가 윤회하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불자들은 석연한 답을 못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많은 불자들이 세존께서는 무아(내 자아가 없다!)라고 이야기 해준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자의 일상 생활을 보면,
‘내’가 행동하면 업이 쌓이고 그게 다음 생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서 선업을 쌓으려 노력하고 악업을 멀리하려 한다.
만약 자아라는 존재의 주체가 없다면 (무아라면) 선업과 악업을 받는 주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무아라고 번역한 말의 빨리어는’anattā’인데
이는 무아(egolessness)라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아가 오취온이 아니다(not-self) 즉 ‘attā가 아니다.’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anattā 의 뜻은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 자아라는 것이 잘못된 인식이다.’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M2 모든 번뇌의 경 §9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이란 삼세에 걸친 내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며 이러한 정신활동은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한가지 견해가 생겨나게 한다.
‘나는 자아가 있다.’ ..........................................견해의 심취
‘나는 자아가 없다.’ ..........................................견해의 정글 (단멸론? 무아?)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 ........................견해의 험로 (파스칼?)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 ........................견해의 왜곡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 ........................견해의 몸부림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견해의 결박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세존께서는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지
우리가 경험하는 오온이 없다고 이야기 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아(오취온이 내가 아니다.)라는 관점으로 논리를 진행시킬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렇다면 오취온이 나는 아니지만 '다른 어떤 실체가 존재할 것이다.'라고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 ‘존재’를 기름, 심지, 땔감 등등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서 나타나는 등불 혹은 불로 비유하신다.
세존께서 말씀해 주신 것은 우리의 존재란 그렇게 무상하게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엇 하나 잡을 수 없는 그런 존재라고 알려 주신 것이다.
내 앞에 키보드를 치면서 이 키보드가 실제 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이 키보드를 내가 잡을 수 있을까? 그저 인식의 흐름은 아닐까?
이런 모습은 우리는 마치 공간 감각이 발달해서 물체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 감각이 둔해서 그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시간적인 흐름을 느끼는 순간은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접했을 때 일 것이다.
열심히 살려고 하다가 죽음에 닥쳐서 모든 것을 놓고 사라져 갈 때
우리는 강렬한 시간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무아라고 번역하는 것도 타당한 측면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 설명을 듣고는 '불 자체가 없다!'고 한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불은 있다. 단 고정된 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은 변치 않는 것이 아니고 연료, 심지 등으로 조건 지워진 것이다!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만약 자아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견해의 정글이다. 무슨 일이 발생할 지 모르는 난감한 지경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오온은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오취온이 나인 줄 알고 윤회하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나’라는 그 무엇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Anekajātisaṃsāraṃ,
나는 헛되이 치달려 왔다. sandhāvissaṃ anibbisaṃ;
집 짓는 자를 찾으면서 Gahakāraṃ gavesanto,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dukkhā jāti punappunaṃ.
집 짓는 자여, [드디어] 그대는 보여졌구나. Gahakāraka diṭṭhosi,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puna gehaṃ na kāhasi;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gahakūṭaṃ visaṅkhataṃ;
마음은 업 형성을 멈추었고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법구경 153-4)
이 글에서 나타나는 것은 깨달음 이전의 세존께서는 골재, 서까래에 해당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셨고 그래서 집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이란 아마도 오취온의 집합체인 아뢰야(阿賴耶)식[2]일 것이다. 즉 중생에게는 이러한 식이 존재한다.
단 이 식의 특징은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고 계속 변화하는 ‘무엇’이란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눈병’을 극복(제거)할 수 있기도 하다.
세존께서 ‘집 짓는 자여, [드디어] 그대는 보여졌구나.’ 라고 표현하신 것은 윤회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뢰야식을 포함하고 있고 그 보다는 훨씬 큰 개념은 아닐까?
아뢰야 식은 집에 해당하고 집의 구조물은 오취온에 해당한다.
윤회하는 자리는 집을 짓는 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행(saṅkhā)이 멈추었으므로 오취온도 멈추고
그래서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영원히 존재하는 업의 상속자(불변의 존재)로서 나’라는 개념은 잘못된 상상이다.
눈병이 나서, 세상을 언어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누가 느낍니까?’라고 질문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타당한 질문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있습니까?’ 이다. (S12:12)
즉 연생연멸이다. 개념으로서 변함없는 객체가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신 후(번뇌가 모두 사라진 후) 어디로 가셨을까? (M72 §24~28, 전재성 번역 pp. 796-797))
“사람들은 오온(색수상행식)으로써 여래를 묘사하려 하지만, 여래에게는 그 오온이 끊어졌습니다.
여래는 오온의 뿌리를 끊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밧차여,
참으로 여래는 오온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 해탈하여,
측량할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어 마치 커다란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이 무명(avijjā; ignorance, unknowing) 혹은 치(moha; delusion, 무명+번뇌)라면
대체 어떤 존재가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이 되는가?
금강경 9분 일상무상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은 그러한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불릴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자아, 개아, 중생, 영혼(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수보리는 적정행(무쟁삼매, araṇa-vihāri)을 즐기는 사람이다.
araṇa: [adj.] peaceful; passionless, vihāra: an abode (거처); a dwelling place; mode of life
[1] anattā: 'not-self', non-ego, egolessness, impersonality
[2] 알라야(ālaya)에서 기원하였으며 한역에서는 음사하여 아뢰야(阿賴耶)가 됨. 욕망 또는 경향을 말한다. 다섯 가지의 욕망, 즉 오욕락에 집착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ālaya : [m.] 1. abode; roosting place; 2. desire; attachment; 3. pretence 阿賴耶(아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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