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삼명으로 법성게를 해석해 보았다.
그러한 번역을 하게 된 동기는
부처님 법을 통해서 깨달았다면
그 방법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도달하시는 방법인
숙명통 및 천안통을 통한 연기법을 확인한 결과라는 추론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숙생의 인연에 대한 무명에서 벗어나시자
번뇌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누진통)
유식 30송 역시 같은 맥락에서 번역을 해 보았다.
아직은 어색한 번역이 있지만
유식 30송 역시 숙명통 및 천안통을 식의 입장에서 알려주셨다고 보니
오히려 기존 번역 대비 이해가 쉬웠고
번역을 하면서 통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제가 이해한 유식 30송의 대의는
식의 관점에서 어떻게 윤회가 진행되는 가를 설명하신 글이라는 것이다.
감각기관으로 분별을 하고 (전오식 및 육식)
그 내용을 나라는 것을 근거로 유불리를 따지고 행동하는데 (칠식 말라식, 변계소집)
이때 그 신구의의 업이 이숙식에 저장되었다가 (팔식 아뢰야식)
다른 몸에 의지해서(의타기) 현생에 드러나는 모습(원성실)을 설명하셨다는 것이다.
원문과 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나라는 것을 잘못 가정함에 따라서
가지가지 현상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것은 식에 의해서 나타난 변화이며
이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오직 세가지 때문이다.
2.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즉 다른 존재가 익어가는 식, 사량하는 식
및 경계를 구별하는 식이다.
이숙(다른 존재가 익어가는 )이 아뢰야식이고
일체의 종자가 다른 존재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vipāka : [m.] result; fruition; consequence of one's actions, 異熟, 報, 果報
pāka : [adj.] cooking; that which is cooked; ripening, 烹饪,被烹调的
pacati : [pac + a] cooks, 煮(cook, boil), 炊, 燒(roast
3.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아뢰야식이 어떻게 쌓여서 받게되는지
어디에 쌓이는지 어떻게 아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觸作意受想思)에서
오직 평정하게 상응할 뿐이다.
阿頼耶는 ālaya를 음사한 것이다.
ālaya : [m.] 1. abode; roosting place; 2. desire; attachment; 3. pretence, 阿頼耶, 執著, 愛著, 所執處
laya : [m.] a brief measure of time, 頃刻, 少時, 短暂的时间的衡量
아뢰야란 단어가 나오게 된 근거가 아마도 ‘순간적이 아닌’이란 뜻이 아닐까? 즉 우리에게 과거의 식이 모두 내재되어 있어서 그게 계속 유지되고 있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 ālaya인 것이다.
그 식의 내용이란 결국 과거 전생에 집착한 것, 애착한 것이다.
4.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아뢰야 식은) 되풀이 되는 일도 없고 (전생에 대해) 기억되지도 않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觸作意受想思) 작용할 때 그러하다.
항상 전변하는 것이 폭류와 같으며
아라한이 되면 평정해 진다. (아라한에서 윤회가 멎는다.)
무부란 아뢰야 식이 에너지 같은 거라서 한번 작용하면 소멸이 된다는 말씀인 것 같다. 업장 소멸?
무기란 우리가 살아갈 때는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인 듯. 그러나 전생의 모습은 보여 질 수도 있다.
S38:11
ogha : [m.] a flood; that which sweeps a man away from emancipation; torrent, 暴流, 流, 洪水
Kāmogho, bhavogho, diṭṭhogho, avijjogho
감각적 욕망의 폭류: 욕계의 폭류
존재의 폭류: 색계의 폭류
견해의 폭류, 무명의 폭류: 나의 자아에 대한 폭류; 무색계의 폭류
5.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두 번째 전변하는 능력은
말라식이라 불리는데
저것의 인연에서 생겨 변화한 저것에 의지해서 (전생의 인연에서 생겨 변화한 현생의 나에 의지해서)
성질과 형상을 사량분별한다.
전생의 인연이 변화해서 내가 되었어야지 나와 전생의 인과 관계가 있게되므로...
그런데 우리는 전생을 모르므로 현생에서의 내 몸 만을 나인줄 알고 이를 근거로 사량분별을 한다.
6. 四煩惱常俱 謂我痴我見 幷我慢我愛 及與觸等俱
(말라식에는) 네 가지 번뇌가 항상 갖추어져 있어서
나라는 어리석음(我痴), 나의 견해라는 것(我見),
남과 비교하는 마음(我慢), 나라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我愛)이며
우리가 살아가는데 (觸作意受想思)에 구비되어 있다.
7.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번뇌는) 반복되어 나타나지만 (전생에 대한) 기억에 묶여 있지 않아서
태어나는 곳에 따라서 얽매이게 된다.
아라한의 멸진정과
출세도를 성취한 자에게서 이것이 없어지게 된다.
유부란 나라는 것이 항상한다고 생각하니 반복된다는 말이다.
무기섭이란 하지만 과거 전생을 모르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에 묶이지는 않는다는 뜻
그래서 이번 생만을 기억하니 태어나는 곳에 따라서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8.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다음은 세 번째 전변하는 능력으로
차이를 구별하는 6가지 종류가 있는데
경계의 ‘성질과 형상을’ 알아서
선과 불선, 선이 아닌 것과 불선이 아닌 것을 분별한다.
9.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定 皆三受相應
이 마음의 장소에는 변행(遍行 어느 식에나 두루 존재하는 심소란다.)
별경(別境 경계를 구분하는 것), 선(善), 번뇌(煩惱 탐진치? 이걸 근본 번뇌라 하고),
수번뇌(隨煩惱 근본 번뇌에서 파생된 번뇌 지말번뇌라 한단다.), 부정(不定 정해지지 않은 심소, 선 악 무기 등이 될 수 있다고 한다)이 있다.
이 모두 세가지 느낌(고 락 사)에 상응한다.
9~14번 게송은 심소에 대한 이야기 이다. 심소란 특별히 구분되는 마음의 장소라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우리 마음의 작용을 구분해 본 것이 아닐까 싶다.
변행이란 살아가는 어디에나 있는 식이란 말이다.
별경이란 그런 식에서 구분을 하는 것을 말한다.
10.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먼저 변행은 觸作意受想思 (우리의 일상 생활) 이며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욕(欲 욕망),
승해(勝解 확실하게 이해하는 마음), 염(念), 정(定), 혜(慧)이니
어떤 일에 반연하는 곳이 같지 않다.
변행의 재미있는 점은 욕도 있지만 염정혜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거이다.
승해란 이해하는 마음이라 하는데 아직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고 있다. 그저 이해하는 마음?
11. 善謂信慙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선(善)의 심소는 신(信 진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 참(慙 부끄러워 하는 마음), 괴(愧 부끄러워 하는 마음),
무탐(無貪 탐하는 마음이 없음), 무진(無瞋 화내는 마음이 없음), 무치(無痴 어리석은 마음이 없음) 등 3선근(三善根)과
근(勤 정진), 안(安 경안), 불방일(不放逸),
행사(行捨 평정한 마음) 그리고 불해(不害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12. 煩惱謂貪瞋 痴慢疑惡見 隨煩惱謂念 恨覆惱嫉慳
번뇌에는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악견(惡見)이 있으며,
수번뇌(隨煩惱)에는 분(忿),
한(恨), 부(覆 자기가 지은 죄를 감추는 마음), 뇌(惱 원망하는 마음), 질(嫉 질투하는 마음), 간(慳 인색한 마음)이 있다.
13. 誑諂與害橋 無慙及無愧 悼擧與昏沈 不信幷懈怠
광(誑 남을 속이다), 첨(諂 아첨(阿諂)하다) 그리고 해(害 자비심이 전혀 없음), 교(橋 자랑하는 마음)와
무참(無慙), 무괴(無愧)와
도거(掉擧 어수선한 마음) 그리고 혼침(昏沈 가라앉는 마음),
불신(不信 믿지 않는 마음), 해태(懈怠 게으르고 태만한 마음) 등이며
14.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방일(放逸) 그리고 실념(失念 과거에 익힌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마음)과
산란(散亂 경계에 대하여 흔들리는 마음)과 부정지(不正知 경계에 대하여 잘못 아는 마음)이다.
부정심소(不定心所)는 회(悔 후회하는 마음), 면(眠 잠들고 싶은 마음),
심(尋 짐작하거나 추측하는 마음이 일어남), 사(伺 짐작하거나 추측하는 마음이 진행됨)이니 이 2류(二類; 회면 및 심사)는 각자 선(善) 악(惡)의 2성(二性)이 있다.
15.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惑俱惑不俱 如濤波依水
근본식(아뢰야식)이 멈추는 것에 의지하여
전오식이 연을 따라 드러나니
혹은 함께 혹은 독립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치 파도가 물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
앞선 게송에서 무부(無覆)란 표현 즉 반복되지 않는다는 표현과 맥이 통하는 내용이다.
아뢰야 식이 현생에서 드러나게 되면 그 업식은 멈추어지고
우리 앞에는 전오식이 연을 따라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업식이란 에너지가 파동과 같이 전달되는 것 같으며
하나의 파동일 수도 있고 여러 일의 파동이 겹쳐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16.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여섯 번째 식인 의식은 언제나 드러나지만
무상천에 태어나거나
2선정 (무상정 無想定, 무심정 無心定)에 들거나
수면에 들거나 혼절하였을 때는 제외된다.
17.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이 모든 식이 전변하여
분별할 곳을 분별하게 된다.
그런데 분별(此)과 분별할 곳(彼)이 모두 없는 것이므로
그래서 일체가 오롯이 식뿐이라고 말한다.
유식(唯識)이란 오롯한 식이란 분별이 멎은 곳을 나타냄을 보여주셨다.
번뇌가 멈추어도 식은 남아있다는 말씀인 것 같다.
파도가 멈추어도 바다 자체는 있다는 말이다. 해인삼매의 경지로...
이는 부처님께서 성도 후에 반열반에 드시기 전까지의 삶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유여열반의 상태!
18.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모든 씨앗이 담겨진 식(아뢰야 식) 때문에
여러 형태로 변화해서
전변을 전개하는 힘이 있으므로
가지가지 분별이 생긴다.
아뢰야 식이란 (정신적인) 에너지와 같아서 퍼져나가서 분별이 생긴다는 말씀.
19.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모든 업이란 습기이기 때문에
전생과 현생이 습기를 갖추고 있으며,
앞선 이숙(생)이 이미 소진되어도
다시 다른 이숙(생)이 생겨나게 된다.
二取를 보통 능과 소, 주관과 객관으로 번역을 한다.
그렇게 번역하여도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는 현생 및 전생으로 보았다.
이런 번역의 문제는 그럼 왜 내생은 뺏나? 하는 문제일 수 있다. (왜 삼취가 아닌가?)
제 생각에는 내생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생은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취라고 하지 않았을까?
만약 능소의 분별 과정을 일으킨다면 결국 윤회의 세계 안에서 업을 쌓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전생 현생을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런 번역을 택했다.
이런 번역을 함으로써 훨씬 더 내용이 쉽게 이해된다고 판단했다.
20.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각각의 유불리를 따지기 때문에
여러 대상들을 판단하고,
이런 유불리 판단에 취착하기에 (변계소집)
자성은 있는 곳이 따로 없다.
21.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다른 것(전생)에 의지해서 생기는 성품은 (의타기)
분별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어서,
저것의 완전하게 이루어진 실다움(원성실; 현생의 모습)은
항상 전성(과거 전생)과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가 전생을 감각하기 쉽지 않다).
22.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전생연(他)에 의지해서 현생이 있기에
(전생과 현생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마치 항상함 등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현생에서 전생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3.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이 세가지 성질(변계소집, 의타기, 원성실)에 의지하므로
저 세가지에는 고정된 성질(자아)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숨겨진 뜻으로 말씀하시길
모든 것에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彼三은 24번 게송에서 설명하고 있다.
24.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먼저 형상(相)에는 (변치 않는) 고유한 특성이 없으며
둘째로 그렇다고 저절로 스스로 알아서 되는 특성도 없다.
마지막으로 (현생이) 전생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고로
나의 법성이라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나라는 것도 고유한 특성이 없는 것이다.)
이 게송은 23번 게송의 彼三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대상도 계속 변해가는 무상한 것이므로 고유한 자성이 없으며
그렇다고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 할 수도 없고
현생의 나라고 하는 것도 수많은 전생까지 모두 생각해 본다면 의미가 애매하여 자성이 없다할 수 있는데
전생은 기억조차 할 수 없으니 그것을 나의 법성이라고 집착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23번 게송에서 이미 밝혀주신 바와 같이
중생의 삶이란 변계소집, 의타기, 원성실에 의지하므로 (조건지워진 것이므로)
그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25.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이러한 법을 승의라 하고
또한 진여라 하며
항상 이와 같은 특성이 있는 고로
오직 식의 실다운 성품이라 한다.
26.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식을 세우기 전의 상태에 도달하면
오직 식의 성품에 머물기를 구하라.
전생과 현생이라는 잠을 자고 있다면 (꿈 속에 있다면)
오히려 복멸 (숨겨지고 사라짐; 未起識)에 능히 갈 수 없다.
二取를 저는 현생이다 전생이다로 보았다.
이런 번역을 선택한 것은 다음 게송에서 現前立少物 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현과 전을 二取로 본 것이다.
이런 번역의 문제는 그럼 왜 내생은 뺏나? 하는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능소의 분별과정에 든다면 결국 윤회의 세계 안에서 업을 쌓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전생 현생을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런 번역을 택했다.
27.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현생과 전생에 어떤 주인공을 세워
이것이 오로지 식의 성질이라 한다면,
이것은 얻은 바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롯한 식에 머무는 실다운 모습이 아니다.
28.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만약 어떤 때 인연이 닿아
얻을 바가 없음을 알게 된다면,
그때가 오롯이 식에 머무는 것이며
이는 과거생과 현재생을 떠나있기 때문이다.
이 게송에서도 二取를 분별로 보아도 되지만
앞 게송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생과 현재생이라고 번역해 보았다.
29.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얻지 못했다는 것은 헤아려 분별할 수 없으며
그래서 출세간의 지혜라 한다.
현생과 과거생의 크고 무거운 것에서 풀려난 고로
문득 깨달음을 얻어 의지함이 변하게 된다.
이 번역에서도 二를 과거생과 현재생이라고 번역해 보았다.
크고 무겁다고 한 것이 전생의의 업장 및 현생의 무명이라고 본 것이다.
만약 분별이라고 본다면 크고 무겁다는 粗重이란 표현이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다.
30.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이것을 번뇌가 다한 세상이라 하며
생각으로는 이를 수 없으며 선이 항상하는 것이며
안락이며 해탈한 몸이며
석가모니께서 법이라 하였다.
유식 30송의 심소 정리, 심소는 세가지 느낌(고 락 사)에 상응한다. | ||
심소란 우리 마음의 작용을 분류해 본 것으로 보인다. (유식 30송의 9~14번 게송 내용) | ||
심소 (心所) | 작용 | 참고 사항 |
변행 遍行 | 觸 (근(根)과 경(境)과 식(識)의 만남) | 중생의 일상 생활 |
作意 (mano 意根의 작용으로 주의를 주게 됨.) | ||
受 (느낌, 즐거움,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 | ||
想 (다생의 습인 판단 기준이 작용함, 경향성) | ||
思 (유불리의 사량분별) | ||
별경 別境 | 욕(欲 욕망) | 나라는 것의 작용 (말라식), 四煩惱常俱 謂我痴我見 幷我慢我愛 及與觸等俱 |
승해(勝解 확실하게 이해하는 마음) | ||
염(念) | ||
정(定) | ||
혜(慧) | ||
선 善 | 신(信 진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 | 육식의 작용. 경계의 성질과 형상을 알아서 선과 불선, 선이 아닌 것과 불선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 |
참(慙 베어버리고 싶은(斬) 마음, 없애버리고 싶은) | ||
괴(愧 행위를 부끄러워 하는 마음) | ||
무탐(無貪 탐하는 마음이 없음) | ||
무진(無瞋 화내는 마음이 없음) | ||
무치(無痴 어리석은 마음이 없음) | ||
근(勤 정진) | ||
안(安 경안) | ||
불방일(不放逸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음) | ||
행사(行捨 평정한 마음) | ||
불해(不害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 | ||
번뇌 煩惱 | 탐(貪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함) | |
진(瞋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화를 냄) | ||
치(痴 내 몸이 나인줄 알고 탐심과 진심을 냄) | ||
만(慢 비교하는 마음) | ||
의(疑 의심) | ||
악견(惡見) | ||
수번뇌 隨煩惱 | 한(恨 억울해 하는 마음) | 번뇌에서 파생된 번뇌들. 즉 2차적인 번뇌 |
부(覆 자기가 지은 죄를 감추는 마음) | ||
뇌(惱 원망하는 마음) | ||
질(嫉 질투하는 마음) | ||
간(慳 인색한 마음) | ||
광(誑 남을 속이다) | ||
첨(諂 아첨(阿諂)하다) | ||
해(害 자비심이 전혀 없음) | ||
교(橋 자랑하는 마음) | ||
무참(無慙 잘못을 모르는 마음) | ||
무괴(無愧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 | ||
도거(掉擧 어수선한 마음) | ||
혼침(昏沈 가라앉는 마음) | ||
불신(不信 믿지 않는 마음) | ||
해태(懈怠 게으르고 태만한 마음) | ||
방일(放逸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 | ||
실념(失念 과거에 익힌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마음) | ||
산란(散亂 경계에 대하여 흔들리는 마음) | ||
부정지(不正知 경계를 잘못 아는 마음) | ||
부정 不定 | 회(悔 후회하는 마음) | 선(善) 악(惡)의 2성(二性)이 있다. 선악이 나타나는 과정의 개념? |
면(眠 잠들고 싶은 마음) | ||
심(尋 짐작하거나 추측하는 마음이 일어남) | ||
사(伺 짐작하거나 추측하는 마음이 진행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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