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깨달으셨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육도윤회의 세계가 무엇이고 왜 그리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다 보시고
그것이 연기의 세계임을 보시고
중생에게 연기법으로 괴로움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시어
그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인 해탈 열반이란 상태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즉 세존의 해탈과 열반은 체험이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적인 표현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볼 때
논리의 구조상 나타나는 '나'라는 개념에 문제이며
따라서 이 '나'라는 개념을 '공'이라는 대체물로 회피해보자고 말씀하신게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수행을 통해서 연기법을 확인하시고 무명을 타파하셔서 해탈 열반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열반 자리에는 당연히 '나'가 없습니다.
또 '나'가 약해져야만 그 자리를 비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를 약화시키는 방법이 선정이라고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수행을 하는 분이라면 좌선을 할 때는 잘 된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일반 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때 능과 소가 구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별이 멈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걸어가면 걸어갈 뿐!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알음알이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낼 바에는 철저히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내서는 병이 도집니다.
어설프게 내서 병이 도진 경우가 부파시대의 문제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현대는 부파시대와는 다릅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의 양도 엄청나게 많고 게다가 매우 빠르게 검색할 수 있어서
알음알이의 문제점을 비교적 쉽게 파악 및 교정할 수 있습니다.
현상을 묘사하는 언어적 표현이 절대적으로 맞지는 않더라도
(논리가 표현에서 중복성이 있더라도 또한 개념이 절대적이지 않더라도)
언어적인 표현(논리)은 '현상'을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논리, 개념에서 나타나는 단점 때문에 논리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논리, 개념, 언어의 문제를 정밀하게 살펴서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아서
그것에 대처하면 될 뿐입니다.
만약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여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요.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홀로 독거하지 않는 한, 다시말해 중생에게 가르침을 펼친다면
정교한 언어를 사용해서 그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삶 아니었나요?
45년간 사람들을 만나서 팔만 사천 경전이라는 엄청난 언어로서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지식인 만을 가르친 것도 아니고 어부, 대장장이, 마부 등 다양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침묵은 공양을 허락하실 때 주로 사용했지요!^^
불립문자(不立文字)란 언어로는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분별을 내지 말라는 말은 아니지 않을까요?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펼치는 모습을 보아도
중생의 잘못된 개념, 논리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개념 및 논리로 대응하셔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대승 불교에서 처럼 '해탈 열반이란 공이야! 그래서 모든게 공이야!' 하고 결론을 말씀하시지 않고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과정'을 매우 친절하게 논리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가 초기경전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애매하지도 않고 신비롭지도 않지만 광명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최근 동국대 김성철 교수님이 중론을 설명하시면서
'논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두 가지 제시했습니다.
저는 이 문제점 제시가 깨달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두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능소(能所) 즉 주어(행위자)와 동사(작용)의 문제; 비와 내림의 문제
2. 판단 기준의 애매함(판단의 상대성); 많다 적다의 문제
1. 비가 내린다는 표현의 문제점 - 중언 부언의 문제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궁극적인 이유는 '현상'을 행위자와 행위로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우리가 현상을 분별할 때 그 현상에 행위자(所)가 있고 또 행위(能)가 있다고 생각(분별)하니
그 현상에 대한 언어적인 표현이 주어와 동사로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그 하나의 현상을 표현하는데 주어에서 한번 또 동사에서 또 한번 중언부언이 되는 겁니다."
'비가 내린다'는 표현의 문제점은
비에는 이미 내린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또 내린다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가 언어를 (개념을) 사용하는 방법과 관계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행위자와 행위로 구분을 합니다.
내 친구가 학교를 가고 있다고 해 봅시다. 나는 그 현상을 '그는 간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의 문제점은 '그' 따로 '간다' 따로라는 점입니다.
언제나 언어를 사용해 온 '보통' 사람들에게 당연해 보이는 이 표현이 왜 문제가 될까요?
그 이유는 '그'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냐는 것입니다.
'그'라는 대상은 어떤 행위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경험이 축적된 존재입니다.
('그'라는 내 친구는 과거 경험의 집합체입니다. 어디에서 태어나 부모는 누구고 ....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는 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라는 개념 안에는 이미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행위가 경험으로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간다.'라는 표현에는 걸어간다는 개념이 포함된 '그'가 또 '간다.'는 말이 됩니다.
중언부언이란 말입니다.
그 따로 간다 따로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구요? 현상을 잘 표현하고 있지 않나요?
이 문제를 좀더 쉽게 이해하려면 비가 내리는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비가 내린다.'는 표현은 하늘에서 수증기가 물방울로 응결되어서 땅으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비(rain)'라는 명사로 표현하지요.
그리고 위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현상을 '내린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라는 개념 안에는 이미 내린다는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린다.'라는 표현에는 내리는 것이 또 내린다는 중언 부언이 됩니다.
'내린다'는 표현을 싫어하셔서 '비가 오신다'해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 의견은
언어 표현 구조의 정밀성을 떠나 이 표현은 현상을 설명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궁극적인 이유는 '현상'을 행위자와 행위로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우리가 현상을 분별할 때 그 현상에 행위자(所)가 있고 또 행위(能)가 있다고 생각(분별)하니
그 현상에 대한 언어적인 표현이 주어와 동사로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그 하나의 현상을 표현하는데 주어에서 한번 또 동사에서 또 한번 중언부언이 되는 겁니다.
이런 현상에 대한 언어적인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해탈 열반 자리에 대해서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갖게는 해 줍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분들이 이런 문자 분석 혹은 분별에서 문제점으로 포착하신 것이
아마도 이 문제는 결국 '자아'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아 문제란 '나(행위자)'란 것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것이 하나의 가설이지 진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나를 상정하는 순간 동시에 나와 구별되는 나 아닌 것도 상정하게 됩니다.
어떤 행위를 논리를 이용해서 분석해보면 행위자가 나타나게 되고
그 행위자는 나 혹은 나 아닌 것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개념적인 나를 상정함으로써 괴로움의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어서, 내가 원한는 것이 사라져서, 내가 싫어하는 것이 생겨서
또 내 존재가 병이나 죽음에 직면해서 그 모든 것을 잃게 생겨서...
즉 이 모든 괴로움의 중심에는 행위의 소유자인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이 '나'라는 것을 사라지게 하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즐거움도 사라집니다.^^
주목할 점은 이것은 그저 논리일 따름입니다. 체험이 따르지 않은 말일 따름입니다.
이런 '나'라는 언어적인 개념이 괴로움을 일으킨다라는 것은 한편에서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논지를 동물의 세계로 확대시켜 보면
동물에게는 언어가 없는데도 동물은 나를 상정하여 괴로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동물에게도 공포가 있고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언어는 없지만 표현은 다 할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하이디라는 서양 분이 동물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 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하이디는 동물과의 '감응'을 통해서 모두 알아냅니다.
즉 동물들이 말만 못할 뿐이지 개념과 표현들은 다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동물에게는 '내 몸'이 나라는 개념은 있으며, '내 것'이란 개념도 있습니다.
동물에게 나의 '자아' 혹은 영혼이란 개념은 있을까요? 그런 개념은 없어 보입니다.
만약 그런 개념이 있다면 그에 걸맞는 행동이 나타날 터인데 이타적인 행동은 없어보입니다.
(제가 아직 명확하게 확정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결론은 유보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먹이를 놓고 다투는 늑대 무리에서 늑대는 힘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로 구분됩니다.
힘 없는 자는 먹이를 먹는데도 서열이 처져서 '내 것'이 줄어들고 그래서 괴롭습니다.
짝짓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 짐승의 세계는 마치 우리 시대를 사는 유물론자의 세상과 유사합니다.
내 몸과 내 것 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제게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내 몸과 내 것에 함몰되어 살면 다음 생에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사는 패턴이 두 경우가 유사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아! 새끼를 키우는 동물의 경우에는 다를 수 있겠군요. 부모는 이타적이 될 수 있겠네요.
구애를 하는 경우에도 상대를 위해서 먹이 등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를 위한 행동입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이성이구요.)
어쨌든 '나'라는 문제는 언어의 표현 상에서 나타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타나는) 분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나'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언어적인 표현 때문에 괴로움이 생겼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2. 개념이란 것의 상대성; 많다 적다!
우리가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란 상대적입니다.
즉 비교를 통해서 많다 적다 길다 짧다를 판단하지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판단 기준이란 상대적이어서 (절대적 기준이 없어서) 공(空)하다는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판단이 모두 상대적이어서 판단 자체를 하면 안된다면
그건 너무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필요에 의해서 상대비교를 할 때에는 이런 개념이 필요합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으 논리로 논리를 만들어서 확대 재생산되는
희론의 경우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명으로 해석해 본 유식 30송 (0) | 2015.07.22 |
---|---|
동시성의 문제-객관은 있다! (0) | 2015.07.22 |
중생세간, 기세간, 지정각세간-해인삼매 (0) | 2015.07.18 |
공과 공병(空病) (0) | 2015.07.18 |
삼명으로 번역해 본 의상대사의 법성게 (0) | 2015.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