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생각

우암(雨庵) 2015. 7. 29. 11:16

초기경전에서는 해탈을 통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알려주십니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S12:23 기반 경)

 

괴로움의 발생(12연기)
믿음(saddhā)
환희(pāmojja) ; delight; joy; happiness
희열(pīti) ; rapture, enthusiasm
경안(passaddhi) ; calmness; tranquility ; serenity
행복(sukha)
삼매(samādhi)
그대로 알고 봄(yathābhūtañāṇadassana) ; 'the knowledge and vision according to reality'
염오(nibbidā) ; aversion; disgust; weariness
탐욕의 빛바램(virāga)
해탈(vimutti)
멸진의 지혜 (khayasmiṃ khayeñāṇaṃ ; 멸진이 일어나는 멸진의 지혜)
번뇌의 멸진(āsavānaṃ khayaṃ)

 

그런데 대승 경전에서는 괴로움 자체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반야심경의 무고집멸도라는 표현에서 보면 괴로움이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관점에서 말씀을 드려 보려면

우리는 괴로움의 소멸이란 것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바를 바로 알아야 그 전체 맥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저는 깨우친 사람이 아니니 이건 하나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기 전에 괴로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즉 인생을 살아가면 왜 괴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가지셨습니다.

(제 기준으로 본다면 고타마 싯달타의 삶에서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바뀌는 극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고타마 싯달타의 인생에서는 명확히 보이질 않아서

저도 사실 이 부분은 석연하게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수준 낮은 제 입장에서는 사문유관이 그렇게 큰 괴로움으로는 보이지가 않아서요...ㅠㅠ

하여간 어떤 동기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풀어보시려고 출가를 하시어

당대 최고 선정을 공부해 보시고 또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행을 수행하십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괴로운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지 못하십니다.

 

이 시점에서 세존께서는 고행을 버리시고

고행으로 망가진 몸을 수자타가 공양한 유미죽을 드시고 추스리신 후에

보리수 아래에서 어린 시절의 선정의 기억을 떠올리시면서

사선정에 드시어서 모든 전생을 보시게 되고 (숙명통)

다른 사람들의 인과를 아는 천안통이 열리시고

그래서 누진 즉 번뇌를 벗어나시게 됩니다. (누진통)

 

그리고 성도하신 후에도 세존께서는 당신이 깨우친 것은 삼명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연기법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숙명통을 통해서 알게된 업의 상속자 삶의 민낯이 아니었을까요?

10만생 삶의 인과를 보시니 당연히 그 법칙을 아실 수 밖에 없었고

그 십만생의 전생이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중생들과 얽키고 설키는 것이기에

그 업들의 전개를 석연히 보시게 되니 다른 중생의 인과 조차도 통찰하시게 된 것 아닐까요?

결국 중생의 모든 삶을 통찰하시니 더 이상 탐하거나 성낼 것도 없어지시게 되고

그래서 현생의 내가 존재의 모든 것인 줄 알고 그 나를 위해서 살던 생각인 번뇌에서 풀려나시니 (누진통)

해탈이 되어 열반 상태에 이르시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즉 반야로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신 겁니다.

 

 

 

 

저는 괴로움이 발생한 원인이 과거 전생의 업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많은 분들이 반대를 할 겁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어떤 사건에 있지 않고 태어남 자체가, 모든 오온이 괴로움이라고 봐야한다.'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 합니다.

이 말씀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건 부처님 법을 다 아시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직 불교의 초보자라면 그는 자신의 문제에 집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사건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상황을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고타마 싯달타조차도 그 괴로움의 문제를 갖고 계셨다고 저는 어렴풋이 생각합니다.

대체 '이 괴로움을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현실적이고 확실한 문제의식이 있었을 겁니다.

(제 수준이 낮아서 부처님의 철학적인 고민을 폄하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죽음이란 문제가 큰 충격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선정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고행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의 해결은 숙명통과 천안통을 통한 연기를 이해하시고서 풀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하는 생각이 들고서야 비로서 그 괴로움을 내려 놓으실 수 있었다는 겁니다.

세존께서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 뿐만 아니라

반야가 생겨서 중생의 삶이 무엇인지 훤히 아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과거에 무한 겁으로 펼쳐졌던 것에 대한 밝지 못함 (무명)에서 벗어나시게 된 겁니다.

 

중생인 우리는 전생을 보지 못하므로 무명에 휩쌓여 있으며

그래서 현생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이므로 이 한 몸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어리석음(痴) 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또 업을 쌓게 되고 그래서 또 몸을 받게되는 원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기법이 작동하는 세계이고 괴로움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세존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사성제, 팔정도를 알려주신 겁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의 괴로움 뿐 만 아니라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신 겁니다.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게되고

이것이 일어남에 저것이 생겨남이 일어난다.

이것이 있지 않을 때 저것이 없어지고

이것이 사라질 때  저것의 생겨남이 사라진다.

 

이것은 업의 작용에 대한 설명이실 수 있습니다. 혹은 12연기의 각 지에 대한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각자 이해한 만큼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것은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가르침은 세상만사에 적용이 되므로

전생에 적용시켜도 말이되고 지금 이 순간에 적용시켜도 말이 됩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맥락에서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지 가르침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의 대상이 되는 것은 꼭집어 한 가지 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런 이해를 갖게 된다면 현생의 괴로움이란 그 원인이 과거에 있게되는데

문제는 과거는 흘러갔으니 어쩔 수 없어서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어쨌든 현상이 이러하니 과거나 탓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생의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전생에 집착하는 일도 발생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모두는 현생 혹은 미래생의 내가 잘되게 하려는 모습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해탈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전생 및 미래생에 매이는 모습은 결국 무명에 휩쌓인 또 다른 모습에 불과했다는 말이죠.

또한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지도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래서 대승 불교에서 전생에 대한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해서

윤회를 '가볍게' 처리한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과거의 원인 제거 보다는

현재의 행위를 통해서 과거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괴로움이란 느낌은 지금 여기에 있지 과거 미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12연기도 지금 이 순간의 '인식의 문제'로 바라다 봅니다.

이러한 접근은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괴로움을 벗어난 자리와도 유사점이 있습니다.

괴로움을 벗어난 자리란 분별이 멎는 자리입니다. 자성을 보았다고 할 때 그 자리입니다.

제게 문득 드는 생각이 이것이 혜해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는 것으로 부터의 풀려남이란 분별에서 풀려남이고 그러니 괴로움이 없다는 겁니다.

과거의 선사들도 이 지점을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삼근, 뜰 앞에 잦나무...

 

이런 대승불교 가르침의 장점은 부처님 가르침의 마지막 지점을 바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37 조도품도 필요없고 그야말로 '직지'입니다. 통쾌합니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맥락(삼명의 과정)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하자

중생들이 생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분별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세존께서 전생을 다 보시고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시자

중생들은 깨달음 보다는 전생에 주목하여 현생과 미래생을 위해 알음알이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 최고의 위 없는 자리는 언어로는 표현이 되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분별을 벗어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알려주려고 '언어도단,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심전심(연꽃을 한송이 들어 올리심)...' 등등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러자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그 진리의 내용을 깨달음을 향해 공부해 나아가는 과정에 적용해서

'문자적인 이해는 알음알이라서 추구해서는 안된다.'라고까지 말하고 

특히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니 경전을 배척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경전은 전혀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처님 깨달음의 방법이었던 '삼명'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습니다.

만약 철저하게 '지금 이 순간'에 머무실 수 있다면 제 생각에는 삼명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대승 불교 쪽 경전인 법성게, 유식 30송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설픈 '지금 이 순간'은 오히려 잘못된 이해를 양산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블로그에서 대상 문제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살펴 본 이유는

모든게 인식의 문제라는 그 '지금 이 순간'의 지점을 살펴 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의 인식의 문제라면 전생이 왜 필요하며 죽음이 다 뭐란 말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전생이니 죽음이니 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중생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물지 못하면서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현실에 대한 이해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한 생각에 매몰되어서

엉뚱한 말을 하게 되고 사변적이 되며

그래서 생각의 세계, 연기의 세계,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제 수준에서는 이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해 가는 세계가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의미는 윤회의 세계가 분별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분별을 하면 좋고 싫음이 있게 되고 너와 내가 있게 되고 그래서 인생 드라마가 연출되고

그 에너지가 윤회를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을 오해한 분들이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상한 알음알이를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의 인식은 서로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내 인식이 사라지면 세상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객관 세상이란 없다! 세상이란 것도 다 내 식이 만들어 낸 것이다.

따라서 눈 앞에 보이는 물건도 모두 식의 작용에 불과하다.

그러니 실재란 없는 것이다. 모두가 다 꿈 같은 환상이다!'

 

이런 논리의 전개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 부분 타당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것이 과연 꿈과 얼마나 다를까요?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의 꿈에 내가 있는 것인가? 장자에 나타나는 호접몽이라 하나요?

 

 

 

 

하지만 우리가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것에는 연속성이 존재합니다.

그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객관성을, 연속성을 부정해 버린다면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식의 이런 특징을 말씀하시지는 않았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현실'에 근거해서 삼명을 확인하신 겁니다.

윤회세계의 연기법을 확인하시고 나자 우리가 현실이라고 바라다 보는 그것을 꿈 같이 보아야

탐내고 화내는 '나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괴로움을 벗어난다는 것을 아시고

그와 같이 꿈 같이 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라는 제 이해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식의 문제로만 바라다 보는 것의 문제점을 살펴 보시죠.

내가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고 하면 이는 이미 분별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 분별의 상태에서는 보는 작용(능能, 用)과 보이는 것(소所, 相)이 존재하게 됩니다.

혹은 보는 작용(능)과 보는 자(소, 體)가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둘 능과 소는 서로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의 인식(분별)작용입니다.

 

그런데 이 인식 작용을 감각작용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식은 분별의 문제이지 감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각작용이란 우리의 감각센서에 대상이 비추어지게 되는 과정입니다.

'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는 없다!'라는 표현은 인식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 눈은 많은 대상을 감각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주목해서 분별 할 때 그 대상이 드러나지

멍청하게 있다면 눈 앞에 무엇이 지나가는 것이 감각되더라도 우리는 알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분별을 통해 인식한 것만 존재하고

내가 감각은 했지만 분별하지 않은 것은 없는 것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감각된 대상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인식은 분별의 문제이지 감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분별의 문제로 감각 대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주장입니다.

 

이 생각을 더 확장시키면

내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게는 감각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분별해서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혹은

내게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금 내게 감각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분별해서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렇게 되면 이는 시간적으로 펼쳐진 윤회도 부정하는 것이고 공간적으로 펼쳐진 세상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 가르침을 펼치신 것이지

가치관의 세뇌가 아닙니다. 긍정심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가치관을 이상하게 형성하면 (사견에 빠지면) 무엇이든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란 것도 그 괴로움의 가치판단 기준을 내려놓으면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이건 내게 좋은 미래를 약속하기 위한 시련에 불과하다.'고 마음먹으면

그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일에도 마음이 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세뇌는 현재의 괴로움을 약화시키는 데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어찌 보면 마약과 같아서 사람을 바보를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런지요?

더더군다나 이런 접근으로는 죽음의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불교적으로는 윤회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기 전인 어떤 사람이 불교를 믿게 된다면

그는 인생의 괴로움을 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이해하는 교양으로서의,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깊이를 갖는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윤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윤회를 초기 불교를 접한 이후에도 한동안 믿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윤회가 중요치 않는 것처럼 말하는 한국 불교의 전통속에서 자랐으니까요.

 

대승 불교의 문제제기도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현대와 같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다시한번 부처님 말씀을 정리해서 우리는 제대로 불교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