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세상을 바라다 보는 시각 - 능과 소

우암(雨庵) 2015. 7. 25. 10:50

일단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제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중도의 삶을 살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중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있다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지만 없다에도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상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것은 '무상하니 매이지 말라!'는 말씀이지

'이 세상은 꿈이다.'가 아닙니다. 꿈 같이 보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해한 무상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한 순간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 법칙에 종속되어 있어서

결국은 그 귀중한 것이 괴로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중한 것은 외부의 대상이기도 하고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온이 모두 괴로움이라는 겁니다. 이건 잘 아시고 있는 내용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무상이란 괴로움의 진리(고성제)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들은 불자가 이 가르침을 생각으로 더 발전을 시킴니다.

더더군다나 존재론적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육근이 무상하고 육경이 무상하고 육식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식의 작용이라면

세상은 혹은 나라는 존재는 꿈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내려놓고 공부를 계속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래서 욕망을 부리고 막행막식을 하면 어떻게 하냐는 말입니다.

이 문제점은 다른 글에서 이미 제가 많이 지적했습니다.

'만약 꿈이라면 대체 왜 수행은 하며, 왜 괴로워합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래봐야 다 꿈 속의 이야기이니까요.

한국 불교에서 막행막식을 하는 수행자들이 나오는 이유가

저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일반인에게 이 세상은 꿈이야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요???

만약 꿈이라면 매트릭스에서 처럼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해도 뭔 문제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무상을 설하신 이유는 세상이 괴로움임을 보라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색수상행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집착하지 않는데도,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견해가 일어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대상에 대한 문제를 시간(무상)과 공간(실체)의 문제 혹은 작용(능能)과 작용자(소所)의 문제로 봅니다.

우리의 세계는 작용(能)이 있고 그 작용자(所)가 있다는 겁니다.

업(能)이 있고 업의 상속자(所)가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업의 상속자는 시간에 속해 있기 때문에 계속 변화해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정지된 시간에서는 업의 상속자가 정의내려질 수 있지만 시간이란 정지될 수 없으므로

업의 상속자는 혹은 대상은 계속 변화하는 정의 내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꾸 취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잡을 수 없다고 해서 '대상이 꿈이야!'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상이란 있지만 무상한 것, 계속 변해가는 것, 잡을 수 없는 것, 꿈과 같은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그 대상 안에는 나라는 것도 포함되죠.

 

한편 업력(能)이란 우리 눈에 실체로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공묘유 )-마치 에너지와 같이

그 작용이란 마치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파도가 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능은 소에 의지하고 소는 능에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한 현상에 대한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능소가 없어진 경지를 유식 30송에서는 '唯識'이라 하는 걸로 저는 이해합니다.

 

시간이 흘러갈 때 물(所)에 의지해서 파도가 일어난다(能)는 것입니다.

번뇌가 가라앉으면 파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분별이 사라지는 겁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처럼 말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능과 소에 대해서 분별하지 않는 상태를 '오롯한 식(唯識)'이라고 칭 합니다.

분별을 한다면 능이 있고 소가 있습니다.

분별을 하는 사람이 대상(所)이란 꿈이야 라고 한다면,

이건 꿈이라는 분별을 낸 것으로

유식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 입니다.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유식 30송의 17번 게송)

이 모든 식이 전변하여

분별할 곳을 분별하게 된다.

그런데 분별()과 분별할 곳()이 모두 없는 것이므로

그래서 일체가 오롯이 식뿐이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있다는 것(atthitañceva)도 한 극단이고 없다(natthitañca)는 것도 한 극단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상을 분석할 때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바라다 보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작용자(所)에 치우친 견해이고

대상이 없다는 것은 작용(能)에 치우친 견해에 불과합니다.

중생의 입장(분별을 하는 입장)에서는 작용도 있고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唯識의 입장이라면 이런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대상이 있지 않느냐는 말씀을 강하게 드리는 이유는

분별을 하는 사람(중생)으로서 현실을 무시하는 듯한 언사는 가려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부처님 가르침이 헷갈려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모든 것이 꿈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한 사람의 인식(나의 인식)만을 너무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시니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씨앗을 갖고 있다는 표현이

이 세계란 모든 중생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계란 말이 아닐까요?

법성게에서 나타나는 다음 구절도 그런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즉 대승불교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유식(唯識)을, 여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중생들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한 중생 한 중생이 이 세상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내 인식이 사라진다고 대상 세계가 없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생각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