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에는
심해탈, 혜해탈, 양면해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제가 열반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해탈을 정의 내려 본 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아직 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분들께 도움이 될까하여
지금 수준의 이해를 드러내 봅니다.
먼저 해탈이란 상태가 아니라 작용이라고 보여집니다.
무슨말인고 하니 해탈이란 탐진치 번뇌에서 풀려나는 작용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열반(nibbāna)입니다. 열반이란 탐진치에서 풀려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탐진치에서 풀려나는 방법인 해탈은 여러가지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이야기 해 보려는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 양분해탈(兩分解脫, ubhatobhāgavimutti).
하지만 열반에는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심열반, 혜열반... 등등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열반이란 최종 목적지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목표가 서울이라면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해탈)은 다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해탈은 양분해탈(ubhatobhāgavimutti)일 것입니다.
ubhatobhāga: «ubhato+bhāga»
ubhato : [ind.] in both ways or sides; twofold
bhāga , (m.) a portion; part; share; faction
그렇다면 심혜탈은 무엇이고 혜해탈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혜해탈을 살펴보시죠.
혜해탈(paññāvimutti)이란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는 세상이란 것이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결국 고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paññā)'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의 번뇌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닐까요?
즉 '무상-고'로 세상을 바라다 보는 것입니다. (제 견해로는 이 경지는 아직 무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상이 무상이고 고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 가운데 '탐하고 화를 내는'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정말로' 무상하고 그래서 괴로운 것으로 본다면
무상한 대상을 가지고 그것을 탐내고, 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치)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경지에는 '무아'임을 알 수 있는 확고한 앎과 봄은 없어 보입니다.
즉 내가(관찰자가)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하는 문제에서 자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혜해탈이란 비록 궁극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이해만으로도 존재의 불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경계에서 나타나는 대상에 대해서 '무상이고 고'임을 확철해야 합니다.
즉 이 해탈 단계에서는 나도 있고 대상도 있고 판단도 있는 상태입니다.
대상이 있지만
그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현생의 몸'을 기반으로 한 판단작용이 아니라 (중생의 모습)
대상에 연해서 끌려나가 내린 판단에 대해서 '무상과 고'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존재'를 기반으로 판단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모습)
무상이고 고라는 '조건 지워진 현상'을 판단의 기반으로 하여 경계를 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의 것'이라는 개념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감각된 경계에서 우리가 주의를 주게 될 때
주의를 받은 대상은 우리 식의 판단과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때 이 판단과 평가를 '무상과 고'라고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과 평가는 궁극적인 자리에서 볼 때에는 반야(지혜 paññā)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해탈을 혜해탈(paññāvimutti)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수행법에서 혜해탈을 성취하는 수단이 위파사나 수행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란 무엇일까요?
심해탈이란
경계가 펼쳐지지만 그 어디에도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다시말해 분별을 내려놓음으로써
나에게서 풀려나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요?
우리 중생은 경계를 대하자 마자 주목을 받는 대상이 나타나고 그 대상에 대해 판단을 하게 됩니다.
혜해탈이 그 일어난 대상에 대한 '나의' 판단기준에 대해서 풀려나는 것이라면
심해탈이란 '주의를 주는 것'에서 풀려난다는 것이다.
주의를 주지 않기 때문에 판단으로 까지 생각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상이니 고니 하는 판단 작용도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분별 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흐르는 것이 심해탈인 것입니다.
이렇게 진행될 수 있다면 그 어디에도 '나'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즉 '나의 것'이라는 개념, '나'라는 개념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행법에서 심해탈을 성취하는 수단이 사마타 수행이 아닐까요?
다시말해 사마타 수행법이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멈추는(止) 수행입니다.
비어있는 마음이 되도록 하는 수행입니다.
심해탈은 아래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경전에 나옵니다.
무량한 마음의 해탈(appamāṇā cetovimutti)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ākiñcaññā cetovimutti)
공한 마음의 해탈(suññatā cetovimutti)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animittā cetovimutti)
그리고 심해탈의 최고봉은 확고부동한 해탈(akuppā cetovimutti)로 나타납니다.
이 말은 마음 상태에 따라서 그 마음에서 풀려나는 방법이 여럿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성냄, 미움, 불쾌, 혐오가 있다면 자비희사로 대응하여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정지시키고
그 번뇌가 나라는 것에 기반하므로 '나의 것'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정지시키고
또한 대상이 공하다는 판단에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정지시키고
그렇게 되면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확고부동한 해탈(akuppā cetovimutti), 평화로운 마음의 해탈(santaṃ cetovimuttiṃ)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마음이 멈추기 위해서는 일정부분 나와 대상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분해탈(ubhatobhāgavimutti)이란 무엇일까요?
위에서 설명한 두 가지가 겹쳐서 나타난다는 말인가요?
제 판단으로는 그 보다는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양분해탈이란 삼명을 얻으신 분의 해탈을 말합니다.
숙명통, 천안통을 통해서
'업의 상속자'라는 존재에 대한 앎과 봄이 확실해지시고 (최상의 지혜)
그렇게 존재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나'라는 존재의 문제를 확인하시고 나자
전생까지 포함하는 나라는 존재와 그 saññā에 대해 또한 세상에 대해서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이라는 여실히 아시게 되고
더 나아가 '나의 자아'라고 판단하던 무명이 사라지시게 됩니다.
즉 명지가 나타나자 무명이 사라지고 그래서 탐과 진이 동시에 사라지게 되시는 경지에 도달하십니다.
다시말해 탐진치 삼독심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시게 됩니다. (누진통 āsavakkhaya)
(양면해탈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보면 무색계 사선정이 나타납니다.
무색계 사선정이란 삼명의 다른 표현이라는 제 견해를 한번 더 확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양분해탈을 통해서 '나의 것'이라는 개념, '나'라는 개념, '나의 자아'라는 개념에서 완전히 풀려나시는 것입니다.
혜해탈에서는 지혜로운 분별을 함으로써 '나의 것'이라는 판단 작용을 쉬게하고,
심해탈에서는 분별을 멈춤으로써 '나의 것'과 '나'라는 개념이 작용하는 것을 멈춰지추는 것이고
양분해탈 경지에서는 대상도 보시고 판단도 하시지만
앎과 봄이 근거해서 더 이상 '나의 것', '나' 및 '나의 자아'라는 분별이 작용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양분해탈자는 대상을 보시지만 욕탐에 물들지 않으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명이 사라져서 대상에 대한 탐진치의 불이 꺼지고 열반에 드시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생명이 남아 있으므로 유여열반이 되겠죠.
이런 저의 견해는 당연히 완성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드립니다.
이런 이해로 팔해탈을 설명해 보려 했는데
아직 수행의 경지가 깊지 않아서 명확한 개념으로 정리가 되질 않는군요.
팔해탈에 대한 글은 훗날을 기약해야 하겠습니다. _()_
아래 경들은 혜해탈과 양면해탈, 심해탈을 설명해 주시는 경입니다.
제가 이해한 부분과 다른 부분이 있음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혜해탈의 경우에는 제가 설명드린 부분은
아주 낮은 단계의 혜해탈에 국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제 설명은 아직 한참 모자르다는 말씀을 다시한번 강조 드립니다. _()_
A9:44 혜해탈 경(Paññāvimutta-sutta)
1. “도반이여, ‘통찰지를 통하여 해탈한 자[慧解脫], 통찰지를 통하여 해탈한 자’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통찰지를 통하여 해탈한 자'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2.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떠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를 지닌,
떠남(離)에서 생겨난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기쁨으로부터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슬픔)이 사라진(소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4선(四禪)을 얻어 머뭅니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통찰지를 통하여 해탈한 자'라고 세존께서는 방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3.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뭅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識]’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뭅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뭅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뭅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에 들어 머뭅니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합니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통찰지를 통하여 해탈한 자'라고 세존께서는 방편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A9:45 양면해탈 경(Ubhatabhāgavimutta-sutta)
1. “도반이여,
‘양면으로 해탈한 자(兩面解脫),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까?”
2.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떠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를 지닌,
떠남(離)에서 생겨난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얻어 뭅니다.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기쁨으로부터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슬픔)이 사라진(소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4선(四禪)을 얻어 머뭅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경지가 있든지 간에,
그 방법대로 그 경지를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고 세존께서는 방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3.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뭅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識]’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뭅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뭅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뭅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경지가 있든지 간에
그 방법대로 그 경지를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고 세존께서는 방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에 들어 머뭅니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합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경지가 있든지 간에,
그 방법대로 그 경지를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고 세존께서는 방편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S41:7고닷따 경(Godatt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고닷따 존자는 맛치까산다에서 망고 원림에 머물렀다.
2. 그때 찟따 장자가 고닷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고닷따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찟따 장자에게 고닷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3. “장자여,
무량한 마음의 해탈(appamāṇā cetovimutti)과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ākiñcaññā cetovimutti)과
공한 마음의 해탈(suññatā cetovimutti)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animittā cetovimutti)이라는 이러한 법들은
뜻도 다르고 문자도 다릅니까? 아니면 뜻은 하나이고 문자만 다릅니까?”
4. “존자시여, 여기에 하나의 방법이 있어서 이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문자도 다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이 있어서 이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뜻은 하나이고 문자만 다릅니다.”
5.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어서 그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문자도 다릅니까?”
존자시여,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고 자애가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연민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고 자애가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고 자애가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평온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기처럼 여기고, 충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고 평온이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세상을 가득 채우고 머뭅니다.
존자시여, 이를 일러 무량한 마음의 해탈(appamāṇā cetovimutti)이라고 합니다.”
6.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ākiñcaññā cetovimutti)입니까?”
존자시여, 여기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뭅니다.
존자시여, 이를 일러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7.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공한 마음의 해탈(suññatā cetovimutti)입니까?”
여기 비구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이것은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 공하다.’라고 숙고합니다.
존자시여, 이를 일러 공한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8.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animittā cetovimutti)입니까?”
존자시여, 여기 비구는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아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 머뭅니다.
존자시여, 이를 일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9. “존자시여, 이런 방법이 있어서 이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문자도 다릅니다.”
10.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어서 그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뜻도 하나이고 문자만 다릅니까?”
11. “존자시여, 탐욕은 한계를 짓는 것이고, 성냄은 한계를 짓는 것이고 어리석음은 한계를 짓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것들을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존자시여, 어떠한 무량한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12. “존자시여, 탐욕은 무엇이 있는 것이고 성냄은 무엇이 있는 것이고 어리석음은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것들을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존자시여, 어떠한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13. “존자시여, 탐욕은 표상을 만드는 것이고 성냄은 표상을 만드는 것이고 어리석음은 표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것들을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끔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존자시여, 어떠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14. “존자시여, 이러한 방법이 있어서 이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뜻은 하나이고 문자만 다릅니다.”
15. “장자여, 그대는 심오한 부처님의 말씀에 정통한 통찰지의 눈[慧眼]을 가졌으니 이것은 참으로 그대에게 이득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그대에게 큰 이득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지혜명광(眼智慧明光)? (0) | 2015.09.21 |
---|---|
족쇄(saṃyojana)란 무엇일까? (0) | 2015.09.20 |
삼명과 무색계 사선정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0) | 2015.09.07 |
육입처 그리고 육근과 육경 (1) | 2015.09.02 |
법화경의 일불승은 돈오의 다른 표현이다! (0) | 2015.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