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 혜능 스님께서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려 주셨다.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佛)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함이 생기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주어졌던 윤회와 이번 생을 받아들임)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法 dhamma)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nekkhamma: 出離, 離欲, nibbidā : 厭, 厭離, 厭惡, 厭逆 욕망에서 벗어남)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僧)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virāga: 離貪, 離, 遠離, 離欲)을 중중존이라고 하느니라."
육조스님의 이러한 삼귀의 정의는 창의적이고 독특하면서도 부처님의 법을 가르치시는 손가락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귀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불법승이 밖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귀의가 아닌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육조스님께서는 삼귀의를 철저하게 나의 문제에 대해 해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존(尊)이란 부처·보살·명왕 등에 대한 존칭이라고 합니다.
불(佛)을 만족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어떠한 경계가 오더라도, 그것이 전생이든 현생이든, 불만족을 하시지 않는 것을 부처님 자리로 보셨습니다. 만족과 불만족의 대상을 재물과 색으로 보셨습니다.
양족존의 사전적인 해석은 두 발로 걷는 인간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 곧 부처를 일컫는다고도 하며, 또 다른 해석은 양족(兩足)은 두 가지 일이 족한 것이니, 부처님은 복덕(福德; 자비)과 지혜(智慧)의 둘을 다 만족하게 갖추고 계시므로 이를 갖춘 가장 높으신 분이란 말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육조스님께서는 '自心이 歸依覺하야 邪迷不生하며 少欲知足하야 離財離色이 名兩足尊이요' 라고 말씀하시니 이는 내 마음이 깨달음 (자리)으로 돌아가 삿되고 미혹한 것이 일어나지 않고 적은 욕심에도 만족을 알아 재물과 색을 떠나는 것이라 하시니 사전적인 의미와는 좀 다르게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법(法)을 바름으로 푸셨습니다. 바름이란 경계를 대할 때 탐진치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탐진치를 싫어하여(厭 싫어할 염)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름입니다. 그래서 이욕존이라고 하셨나 봅니다. 법(dhamma)은 의(義 mano)에 대응하는 대상입니다. 즉 경계를 대하고 그에 대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바름이란 이 판단에서 '나'라는 가짜 존재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가짜 존재를 중심에 놓는 것이 어리석음이요, 그 어리석음을 내면 욕심과 성냄이 따라오게 됩니다.
승(僧)이란 깨끗함이라 하시면서 중중존(衆中尊)이란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승이 무리 가운데(衆中) 있는 부처님이라고 해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깨끗함이라고 하셨습니다. '自心이 歸淨하야 一切塵勞妄念이 雖在自性이나 自性이 不染著' 즉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淨)으로 돌아가서 일체의 망령된 생각이 자성에 있지만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승을 말씀하시면서 무리를 말씀하셨고 무리를 말씀하시면서 자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 전개는 승이 승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중(衆)을 중생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생이란 저의 현생을 포함한 모든 생에서 나타나는 역할을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승이란 바로 '나'라는 존재가 깨달음으로 향해가는 모든 여정(역할)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생 및 현생의 모든 기억이 모두 자성(나라는 성질; 아뢰야식) 안에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자성이 지금 이자리에서 물들지 않으니 (不染; 無念) 그것이 깨끗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각 역할에 물들지 않으니 그 역할에 치우침이 없으며 그래서 가운데 중(中 majjha)이란 표현이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중도의 삶이란 팔정도의 삶입니다. 정견을 갖고 정사유-정어-정업-정명의 삶을 살고 정정진-정념-정정의 수행을 하는 존재를 衆中尊이라 표현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제가 해석해 본 육조스님의 삼귀의란 한마디로 '생각을 내려 놓음'입니다.
내려 놓으려면
주어진 경계에 만족을 해야하며
그래서 경계에 탐진치를 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습이 작동하지 않도록 청정해야 합니다. _()_
13. 三 歸 (삼귀의)
今旣懺悔已하니 與善知識으로 授無相三歸依戒케 하리라
금기참회이 여선지식 수무상삼귀의계
지금 이미 참회하기를 마쳤으니 선지식을 위하여 '무상삼귀의계'를 주리라.
授 줄 수 1. 주다 2. 수여하다(授與--) 3. 전수하다
大師言하되 善知識아 歸依覺兩足尊하며 歸依正離欲尊하며 歸依淨衆中尊하라
대사언 선지식 귀의각양족존 귀의정이욕존 귀의정중중존
從今已後로는 稱佛爲師하야 更不歸依餘邪迷外道하노니
종금이후 칭불위사 갱불귀의여사미외도
願自性三寶는 慈悲證明하라
원자성삼보 자비증명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오며,
바름의 이욕존께 귀의하오며,
깨끗함의 중중존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 하라.
善知識아 惠能이 勸善知識하야 歸依自性三寶하노니
선지식 혜능 권선지식 귀의자성삼보
佛者는 覺也요 法者는 正也요 僧者는 淨也니라
불자 각야 법자 정야 승자 정야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니라.
自心이 歸依覺하야 邪迷不生하며 少欲知足하야 離財離色이 名兩足尊이요
자심 귀의각 사미불생 소욕지족 이재이색 명양족존
自心이 歸正하야 念念無邪故로 卽無愛著이니 以無愛著이 名離欲尊이요
자심 귀정 염념무사고 즉무애착 이무애착 명이욕존
自心이 歸淨하야 一切塵勞妄念이 雖在自性이나 自性이 不染著이 名衆中尊이니라
자심 귀정 일체진로망념 수재자성 자성 불염착 명중중존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함이 생기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하느니라.
제 이해
衆中尊의 의미가 잘 와 닫지 않는다. 과거 전생을 다 보고 그 모든 중생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것 그것이 정(淨)이며 그것이 번뇌에서 풀려남이니 그래서 불염착이라. 이것을 중중존이라 한 것 같다. 즉 승이란 내 과거 전생의 모든 존재란 말이 된다.
凡夫는 不解하고 從日至日하야 受三歸依戒하나니
범부 불해 종일지일 수삼귀의계
若言歸佛인댄 佛在何處며 若不見佛하면 卽無所歸니 旣無所歸면 言却是妄이니라
약언귀불 불재하처 약불견불 즉무소귀 기무소귀 언각시망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만약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말한다면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하였다면 곧 귀의 할 곳이 없게 된다.
이미 귀의할 곳이 없다면 말로만 물리치는 것이니 이것은 허망할 뿐이니라.
却 물리칠 각 1. 물리치다 2. 물러나다 3. 피하다(避--) 4. 돌아가다 5. 그치다, 쉬다, 멎다
善知識아 各自觀察하야 莫錯用意하라
선지식 각자관찰 막착용의
經中에 只卽言自歸依佛이요 不言歸他佛이니
경중 지즉언자귀의불 불언귀타불
自性에 不歸하면 無所歸處니라
자성 불귀 무소귀처
선지식들아. 각자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였고 다른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莫 없을 막, 저물 모, 덮을 멱 1. 없다 2. 말다, ~하지 말라 3. 불가하다 4. 꾀하다(=謨) 5. 편안하다
錯 어긋날 착, 조 1. 어긋나다 2. 섞다 3. 섞이다 4. 꾸미다 5. 도금하다
只 다만 지, 외짝 척 1. 다만, 단지(但只) 2. 뿐, 오직 3. 겨우, 한갓 4. 그러나 5.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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